소설리스트

68화 (6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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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이안의 목소리에 노아가 퍼뜩 뒤에서 손을 빼내고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최대한 이안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덕분에 노아는 이안의 눈에 띄지 않고 소파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만 몸만… 분명 서재에 있다고 들었는데 노아가 없자 주위를 둘러보던 이안의 눈에 아무렇게나 벗어 구겨져 있는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노아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제가 사용했던 기구가 담겨 있던 상자를 의자 밑으로 밀어 넣었다. 문득 제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노아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학부모 상담일에 겨우 시간을 내어 학교에 직접 방문한 테너에게 노아를 담당하던 교사 중 깐깐하기 짝이 없고 돌려 말할 줄 몰라 매번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지만 사람만은 좋은 교사가 이렇게 말했었다.





 ‘자녀 분은 어린 나이에 비해 예의도 몹시 바르고 심성이 착합니다. 그런데 다소 인내심이 약하여 참지 못하고 탐하는 습성이 있어 종종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긴 그 때 노아가 참지 못하고 수업 중에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의 단 간식을 까먹거나 게임을 해서 걸린 일이 종종 있었다. 칭찬만 해도 모자를 판에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그 프로스트의 회장이자 학교의 이사인 테너에게 곧이곧대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교사들이 새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그러나 불쾌해 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교사들과는 달리 벌써 자식만 셋이던 테너는 제 아버지 품에 끌어 안겨 파랗게 눈만 굴리던 노아를 도닥거리면서 껄껄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뭐, 세상에 완벽한 아이가 어디 있겠나. 아직 어리니까 열심히 가르침을 받으면 크면서 점점 나아 질 테지.’





 죄송해요, 아버지… 사실은 크면서 점점 안 좋아진 것 같아요. 노아는 이안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가거나, 최소한 바지라도 갖춰 입게 되기를 바랬지만 가망성이 거의 없는 소망이었다. 서재가 넓다고는 해도 사람 한 명 찾기 어려울 정도로 넓진 않았고, 제 바지는 이안의 손에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벅거리며 다가온 이안이 금방 소파 뒤에 몸을 숨기고 쪼그리고 있는 노아를 발견했다.





 더없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노아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꾸물거리며 수줍게 최대한 아래를 가렸고, 이안은 잠시 말끄러미 노아를 바라보았다. 수치플은 다 좋았지만 그래도 이런 수치플은 딱히 좋은 것 같지가 않다고 그 와중에서도 노아가 생각했다… 





 “잠시만…”





 노아와 마찬가지로 할 말이 없었던지 입을 다물고 있던 이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아의 팔을 낚아 챘다. 어어, 하는 순간 이안이 노아를 일으켜 세우더니 뒤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은 차츰 멎어가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피가 흐른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민망하여 발가락만 조금 꼼질거리던 노아가 제 팔을 붙잡은 이안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뭐야? 여기 왜 이러는데?”



 “어… 그게…”





 간만에 거칠고 험악한 이안의 분위기에 설레던 것도 잠시, 노아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욕구불만에 시달리다가 참지 못하고 이안이 없을 때 자위를 했는데, 오랜만에 하다 보니까 너무 좋아서 자제를 하지 못하고 뒤를 찢어 먹고 말았다고… 노아는 제 뒤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 말은 못할 거 같았다.





 응? 엉덩이는 원래 두 쪽이잖아? 하지만 네 쪽으로 갈라지는 건 좀 그런데…





 “여기 왜 이러냐고!”





 이안이 재차 재촉했다. 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빛이 더 험악해진 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정말 노아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치질이라고 할까…? 아냐, 그건 너무 좀 그래. 게다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그 곳이 몹시 멀쩡했다는 걸 이안도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싶어 노아가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게, 이안이… 요즘… 너무 안 해서…”





 갈팡질팡하다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노아가 말 끝을 흐리고 말았다. 이안이 관계를 갖지 않는다 = 당연히 욕구 불만이라는 이야기였으니 더 말하기는 어쩐지 좀 민망하기도 하여 얼버무리며 이 정도면 알아 들었을까 하고 노아가 눈치를 보자 노아의 팔을 잡은 이안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동시에 이안의 안색이 몹시 어두워져 노아가 당황했다.





 “젠장, 노아… 그럴 필요 없어.”





 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지 몰라 노아가 눈만 깜박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이안의 말도 노아는 한동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다 잘못된 거야. 전혀 맞는 말이 아니라고.”





 그 자식이면 가브리엘을 말하는… 거겠지…? 아니, 가브리엘에 대한 말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건지 나는 영… 아? … 아, 설마… 서서히 노아는 이안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가 굳이 관계를 가지지 않는 이유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야, 노아…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돼.”





 저, 그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이안이 지금 굉장히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노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 뻔 했다. 그야 물론 엄연히 원인을 따지자면 이안이 자신과 관계하지 않은 게 이유긴 하지만, 그건 욕구불만 때문이지 이안이 자신과 관계하지 않아서 불안해 스스로를 책한 게 아닌데… 자해에 가깝게 자위를 하긴 했지, 자해를 한 것도 혹은 이안을 위해 뒤를 개발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 한 켠이 뜨끔거리는 것 같아 노아가 입만 조금 달싹이다 말자 이안이 이리와, 하면서 노아를 끌어 당겼다. 방금 전까지 노아가 실컷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흔들의자 위였다. 이상하게 유독 이안이 다정하게 굴 때는 부끄러워서 귀를 조금 붉히면서 노아가 이안이 하는 대로 손잡이에 한 쪽 다리를 걸쳤다. 이안은 조심스럽데 뒤를 살폈다. 





 “그렇게 상처가 심한 것 같진 않은데.”



 “저기, 제가… 할게요.”





 손이며 발이 다 간질거리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노아가 말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이안이 잠시 서재를 나가더니 손에 재생 연고를 들고 돌아왔다. 그 동안 내도록 이안에게 더한 모습도 보여줬으면서 이번만큼은 묘한 기분에 노아가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하기 바빴다. 이안은 이제 점차 굳어가는 피를 닦아내고 연고를 발라 퉁퉁 부은 뒤에 바르다가 미심쩍은 듯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만 넣은 거, 아니지?”



 “그게…”





 이안이 그 동안 노아를 얼마나 열심히 괴롭혔던가. 노아가 만족할 만큼 고통스럽게 했으면서도 딱히 뒤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린 적은 없었고, 그 말은 어쨌든 이안이 나름 노아의 상태를 봐가며 괴롭혔단 의미였다. 그만큼 선을 넘는 정도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기구가 담긴 상자는 의자 밑으로 치워 버렸으니 노아가 머뭇거리자 이안이 쯧 혀를 찼다.





 “됐어, 굳이 말 안 해도 돼.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으아… 죽겠다… 노아는 이제까지 아주 다양한 수치 플을 해왔고, 이안은 정말 유독 수치스러우면서도 안전한(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중에서도 제일 부끄러웠다. 아니, 이전에는 거의 부끄럽지도 않았는데… 노아가 얼굴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동안 이안은 꼼꼼하게 약을 발랐다. 항상 그렇듯이 연고를 바르자 이내 곧 욱신거리고 쓰라린 느낌이 완전히 가셨다. 이안이 노아를 다시 반듯이 앉혀주고는 바지를 건네면서 말했다.





 “미처 미리 이야기를 못했는데 오늘 저녁 모임이 있어. 몸이 별로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돼.”



 “아, 아니에요… 갈 수 있어요.”





 완전히 새빨갛게 변한 노아의 귀를 흘깃 보더니 이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노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바라보는 가운데 잠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준비하고 나오라며 서재를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난 다음에 한참을 가만히 닫힌 문을 바라보던 노아가 그대로 흔들의자에 엎어졌다. 이제까지는 애써 죽 외면해 왔던 사실을, 이제는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안 밀러는 자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전혀 괴롭힐 생각이 없다는 걸, 그제서야 노아가 인정하고 말았다. 그대로 엎어져 있고 싶었지만 저녁 모임을 떠올리며 노아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옷을 갈아 입는 내내 노아의 머릿속은 이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신은 괴롭혀 주는 걸 좋아한다. 아니 그런데 자신을 싫어하는 상대가 저를 괴롭힌 다음 내쫓아 이혼하려고 한다네? 그럼 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결혼도 하고 상대가 자신을 괴롭히는 걸 즐겁게 즐기기도 하며 깔끔히 이혼 후에는 해피 싱글 라이프! …가 애초 계획이었건만…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 라는 전제부터가 잘못 되었구나, 하고 노아가 아주 뒤늦은 후회를 했다.





 언제부터 이안이 자신을 좋아한 걸까? 저녁 만찬 모임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며 노아가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을 때부터일 테니… 안드로이드를 갑자기 폐기 처분해버리고 전에 없이 신혼 여행을 다녀왔을 그 때부터일 것이다. 혹은, 그 전일 수도 있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안에게 솔직하게 자신이 이런 저런 취향이 있어서 그걸 노리고 이안과 결혼했다고 솔직히 말한 뒤 이혼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성적임과 동시에 매우 이론적인 선택지일 뿐이었다. 일단 전부터 누누이 본인이 말해왔듯이 이안은 저와 이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 노아는 이안이 자신이 내내 속아온 걸 깨달은 순간의 반응이 좀 두려웠다. 





 그래, 정말로 그랬다. 이제까지 노아는 단 한 번도 이 결혼 생활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내내 이안의 괴롭힘이 즐거울 뿐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어차피 이안이나 자신 둘 다 이혼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이안이 퍽 자신을 싫어했으니 결혼했음에도 서로 남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안에게 솔직히 말할 수도 없지, 그렇다고 이안이 이혼해 줄 것도 같지 않았고… 또 이혼을 한다 쳐도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더 이상 이안을 그저 즐기는 상대라고 편히 생각할 수가 없었기에 이혼을 한다고 해도 한동안은 노아도 그다지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혼을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살며 이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이기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노아는 이안보다는 제 성적인 생활이 좀더 중요했다. 이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문제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안이 싫지는 않지만 제 취향을 억누르며 살만큼 좋은 것도 아니었고, 가장 좋은 건 이안이 노아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받아 들여 이안도 자신도 즐기면서 사는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노아의 소망일 뿐이었다. 이안 성격에 화를 안 낼 리가 없었다. 지금 이안이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도 그저 놀랍고 생소할 정도였으니… 노아는 이안이 사실을 알 경우 미친 듯이 화를 낸 다에 제가 그 동안 모아온 Tear 시즌 별 컬렉션도 걸 수 있었다. 어, 어쩌면 가브리엘처럼 얻어 맞을지도 몰라…





 이안이 화를 내는 반응이 두렵다 한들 그저 한 때로 치부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노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안도 테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노아를 이용했고 노아도 자신이 즐기기 위해 이안을 이용한 거니 피장파장일 텐데도 어쩐지 자신이 가해자인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이안이 요즘 자신에게 너무 잘해줘서 그런가…





 이안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느라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던 노아는 문득 시계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오래 멍 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 모임이 있다고 했으니까 더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이안이 부드럽게 제 팔을 잡는 통에 노아는 또 한번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리며 찔리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의 말이 맞았어. 이렇게 결혼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노아가 조금 한숨을 쉬면서 이안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모임의 어떤 사건 이후 마침내 마음을 정한 노아가 며칠이 지나서 이안에게 찾아가 조심스럽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안의 반응은 노아의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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