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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마치 가위라도 눌린 듯 몸 한 쪽이 무겁고 답답한 기분에 노아가 뒤척거리며 작게 끙끙거렸다. 하지만 팔 다리를 움직여 봐도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 조금 바르작거릴 뿐이었다. 뭐지… 몸이 반쪽만 눌리는 가위도 있나… 자유로운 쪽 팔만 시트를 더듬거리고 있으려니 무언가에 의해 손목이 잡혔다.
“어…?”
팔이 끌려갈 때만 해도 잠에 취해 비몽사몽 한 상태이던 노아는 뭔가 뜨끈하고 축축한 것이 손가락 끝을 느릿느릿 핥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부터 뭐가 내 손가락을 핥고 있는 거지… 노아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제 몸 반 쪽을 깔아뭉개다시피 끌어 안은 채 막 잠에서 깨는 모습을 빤히 쳐다 보면서 이안이 손가락을 핥는 모습이 보였다. 노아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황해서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에요?”
“맛 보는 중…?”
이안이 입술로 손 끝을 물며 태평하게 대답하자 지난 밤의 단상들이 떠오른 노아가 휙 손을 빼 이불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이번엔 날름 귀를 핥는 바람에 노아가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왜 이렇게 답답한가 했더니 이안이 뒤에서 지나치게 꽉 끌어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아가 슬금슬금 이불을 뒤집어 쓰며 안으로 파고 들었다.
“하하. 재미있고… 귀엽네.”
교과서 읽듯이 말하며 이안이 노아를 도로 끄집어냈다. 팔이 저려서 노아가 이안의 품 안에서 불편하게 꼼지락거리자 이안이 아예 이불 채로 끌어 안았다. 노아는 이안이 왜 이렇게 제게 달라 붙어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흘깃 바라보니 이안의 얼굴은 조금 시무룩한 것 같기도 했다.
“회사 안 가도… 괜찮아요?”
“왜, 내가 가버렸으면 좋겠어?”
응, 이렇게 나를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을 때는 얼른 회사에 가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노아도 내어선 안 될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하품을 하는 척 웅얼거렸다. 그에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드디어 노아를 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으으…”
이안의 몸무게가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노아가 온통 당기고 뻐근한 근육에 앓는 소리를 내며 도로 꾸물꾸물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하도 어제 울고 소리를 지른 탓에 목도 아프지, 잔뜩 긴장했던 근육은 아직도 힘을 주면 벌벌 떨려서 후들거리지… 이안에게 얼마나 지독히도 쥐어 짜였는지 노아는 당분간은 사정은커녕 세울 수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당해본 게 대체 얼마만이더라? 어제는 마치 헤더와 알렉스의 가장 좋지 않았던 플레이를 각각 합쳐 놓은 것만 같았다. 헤더는 집요하게 거시기만 괴롭히는 걸 좋아했고, 알렉스는 핑거링을 좋아했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는데 둘을 합쳐 놓았다고 생각하니… 으으… 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젯밤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목이 말라 노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병이 하나 보였다. 끙끙거리며 조금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는 팔을 뻗으려 하자 이안이 고용인 호출 벨을 누르고는 자, 하면서 노아에게 물병을 쥐어주었다. 왠지 어젯밤 이안이 두 번째로 저를 괴롭힐 적에도 이렇게 수분 섭취를 하게 했던 게 떠올라 노아가 움찔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내 착각인가? 이안도 왠지 움찔한 것 같은데…
현재 노아는 근육이 뻐근한 것과는 별개로 몸은 굉장히 상쾌하다 못해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땀 냄새도 안 나고, 잠옷도 입혀져 있는데다가 뒤도 깔끔한 기분이고… 설마 이안이 다 뒤처리를 한 건가? 정말? 노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안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들들 트레이를 밀며 들어온 고용인이 식사가 차려진 트레이를 놓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다시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꼼짝도 하기 싫기도 했고 배도 고팠던 차라 노아는 식사가 몹시도 반가웠다. 침을 꼴깍 삼키며 따끈따끈 막 김이 오르는 음식들을 바라보던 노아가 익숙한 음식을 보고는 멈칫했다. 저거…… 어제 그 양고기 요리잖아…
“뭐야? 왜 안 받아?”
“전 아직 배 안 고파요...”
이안이 내미는 식기에서 애써 시선을 외면하면서 노아가 작게 말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속았어도 세 번째까지 속으면 그 때는 자신의 지능이 너무 의심되지 않는가. 그러나 배가 안 고프다고 하기가 무섭게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망했지만 여차하면 도망갈 기세로 시트를 꽉 부여잡고 있자 이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노아의 손에 식기를 쥐어 주었다.
“할 생각 없으니까 먹어.”
“…진짜요?”
“그래.”
“이안 거기를 걸고…?”
진심을 담아 물은 건데 이안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통에 노아가 얼른 포크를 손에 쥐었다. 반쯤은 농담으로 배가 고프지 않다 한 것이기도 했기에 얼른 냠 샐러드부터 입에 베어 문 노아가 행복감에 잠시 몸을 떨었다. 인생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식사가 있다면 이 요리사의 식사를 하리라…
배가 고팠던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안도 노아도 침묵 속에 각자가 식기를 놀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마침내 그 침묵이 깨진 것은 둘 다 식사를 거의 마쳐갔을 때였다. 노아는 잠옷을 입혀놓고는 정작 자신은 상의를 홀딱 벗고 있던 이안이 팔짱을 꼈다.
“어디 이야기 정리 좀 해보지.”
아직 푸딩이 반이나 남았지만 이안이 딱 각 잡고 이야기를 할 태도를 취하자 노아가 아쉬운 마음으로 스푼을 내려 놓았다. 노아가 집중하지 못하고 푸딩을 흘깃거리자 다시 한숨을 쉰 이안이 먹어도 된다는 의미로 톡톡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 행동에 노아의 안색이 환해졌다. 달콤하고 몰랑한 과육을 한 입 먹으며 노아는 제가 봤을 때도 자신이 좀 단순한 것 같다 여겼다…
“음… 시작은 우리 처음 만난 날인데요, 그 레스토랑에서 이안이 절 괴롭혀서 내쫓아 버리겠다는 걸 들었어요.”
꼴깍 푸딩을 삼키면서 노아가 말했다. 그 날 이안의 전화 통화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던지… 그래서 겸사겸사, 어차피 이혼할 거, 조금 즐겨도 되지 않을까 하고… 노아의 말에 이안이 잠시 어처구니가 없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동안 노아가 제 행동에 딱히 상처를 받지 않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 반, 그저 자신을 즐기는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하는 마음 반… 그 외 배신감, 약간의 분노, 슬픔, 기쁨, 기타 등등… 살면서 이렇게 이안은 감정이 복잡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실컷 즐기고 질릴 때쯤 되어서 이혼을 하자고 한 거라고?”
“아니… 질려서 이혼 하자고 한 건 아닌데…”
이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는 것 같고, 또… 이안이 자신을 그나마 덜 좋아하는 시점에서 이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고 지금 말하려니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노아가 어물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이안이 걱정되는 마음과 나름 대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상대방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이혼하자고 한 건데 과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노아는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이 좀 어두운 얼굴을 하자 노아가 다 먹은 푸딩 그릇을 밀어 두면서 흘깃 눈치를 보았다. 어제의 이안은 온도고 압력이고 최고점까지 치솟아 펑펑 용암이 터지는 활화산과 같았다면 오늘의 이안은 다 터지고 재만 남은 휴화산인 것 같았다. 물론, 쿡 찌르면 도로 터지겠지만. 노아가 저기,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 진짜… 저 좋아하는… 거에요?”
“너는?”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눈을 굴려 한번 노아를 바라본 이안이 담담하게 물었다. 너는 날 좋아한 게 아니지? 담담하게 물은 것과는 별개로 이안의 목소리에서 깊게 상처 입은 자존심이나 마음 따위가 들리는 것 같아 노아는 쿡쿡 양심이 찔렸다. 지난 번에 이안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아마…
그러나 어두운 안색을 한 게 언제냐는 듯 곧 이안이 턱을 조금 치켜 들며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또 노아를 좋아한다 말했던 게 언제냐는 듯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돌려 말하진 않겠어.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네가 원하는 성적인 관계를 제공해 주도록 하지.”
“네?”
노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내가 원하는 성적인 관계라면… 결혼 초기에 이안이 이렇게 저렇게 해주었던 그 행복하고도 달콤한 플레이들이 아니던가. 물론 당연히 노아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상태였고, 또… 이안처럼 자신을 만족시켜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노아가 죄책감을 가지던 당사자가 이렇게 직접 제공을 해준다는데 귀가 솔깃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피차 이혼하면 복잡해지게 되고, 배우자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니 나 역시 두 번 결혼하는 건 원하지 않아. 그렇다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우리 둘 모두에게 최선의 선택지지.”
지극히 사업가다운 분위기를 풍기며 이안이 말했다. 상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적당히 단련되어 근육이 있는 맨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그는 마치 정장을 입고 회장실에 앉아 있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그에 저야 좋지만요, 하면서 완전히 혹한 노아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자 이안이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서류였다.
얼떨떨해진 노아가 받아 들자 서류는 온갖 것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쓰여져 있었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노아 프로스트(이하 “N”이라 한다)와 이안 밀러(이하 “I”라 한다)는 상호간에 결혼 계약을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 아래와 같은 계약을 체결한다……
…[1] 비밀 유지 조항
1. 본 계약 사실을 제 3자에게 알리거나 그 비밀을 누설할 경우 아래 조항에 따라 누설한 계약자는 하루를 다른 계약자에게 ‘헌납’한다. 이 계약에서 ‘헌납’의 정의는 아래 내용을 따른다.]
첫 줄에서 노아가 고개를 들고 이안을 바라봤다. ‘헌납’이란 단어에서 불길함이 물씬 피어 오르는 게… 이안이 계속 하라고 고개를 까닥이는 통에 노아가 시선을 내려 계속 읽었다. 대체 이 계약서는 언제 만들어 둔 거야?
[….a. 이 계약에서의 ‘헌납’은 육체에 영구적이거나 ‘심각한 상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상대의 성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b. ‘심각한 상해’는 유혈 유무를 기준으로 한다.]
그 뒤로 이런 저런 세세한 내용이 따르긴 했지만 말인 즉 가령 노아가 이 계약서에 대해 남에게 말했을 때에는 어제와 똑 같은 하룻밤이 노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혹은 이안의 경우에는 노아가 이안에게 꼭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하루를 요구할 수 있거나… 그에 다른 장도 펄럭거리며 살펴본 노아가 이게 어떤 계약서 인가를 깨달았다. 이 서류는 법적인 효력은 없지만 플레이를 하기에 앞서 돔(Dom)과 섭(Sub)이 맺는 계약서와 매우 흡사했다.
클럽에서 계약서를 주고 받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직접 써보게 된 건 처음인 노아가 좀 흥미로운 얼굴로 쭉쭉 살폈다. 서로가 가능한 행위 목록의 체크, 세이프 워드 지정 등등… 딱히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없기에 몇 개 체크를 하고 넘어간 노아가 세이프 워드에서 눈을 깜박였다.
“저는 세이프 워드 필요 없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세이프 워드를 정해 본 적이 있는데 한번도 쓴 적이 없어서… 음…”
그 말에 썩 별로 좋다고는 못할 이안의 표정을 본 노아가 어… 생각해 보니까 있는 게 좋겠어요! 하고 재빨리 말하고는 세이프 워드에 ‘푸딩’ 이라고 적었다. 딱 봐도 방금 먹은 디저트인 게 한 눈에 보이는 이름이었다. 이안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거나 말거나 서류의 내용에 나름 크게 만족한 노아가 끝에 지장까지 딱 찍자 이안이 서류를 가져갔다.
그간 꽤나 고민했던 일도 해결 되고, 앞으로는 전처럼 다시 만족할만한 생활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진 노아가 아직 좀 노곤노곤하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배도 부르고 등도 좀 따시지… 진작에 이안에게 알릴 걸 그랬나 봐. 그래, 내가 애초에 원한 게 이렇게... 서로 좋은 결혼 생활이었다고... 물론 지금은 그 '서로 좋음'이 결혼 초기와는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이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던 노아의 눈꺼풀이 가물거리며 잠겼다.
그에 노아는 서류를 잘 넣으면서 이안의 입가에 맴돌던 쓴 미소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건 자조적이면서도 좀 체념하는 것도 같은 미소였다. 그랬기에, 이안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 간에 상관하지 않고 꾹 내리 누르며… 어떤 마음으로 이 계약서를 내밀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