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자세.”
이안의 말에 조금 입을 벌리고 있던 노아가 제대로 엎드렸다. 결혼 초기 이안이 가르쳐 준… 소위 그 자세였다. 최대한 상체를 납작 엎드린 채 엉덩이는 높게 드는 야하기 짝이 없는 그 자세.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니 다가온 이안이 뒤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읏, 아읏…”
질척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이안이 안에 들어가 있던 사탕들을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굴리고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충분히 뒤가 젖었다 싶자 플러그를 꾸욱 문질렀다. 보통 노아가 하던 플라스틱이나 금속 따위의 딱딱한 종류의 것이 아닌, 말랑하고 물컹한 느낌이 드는 실리콘이었다. 다만 제법 크기가 있었다.
“제대로 안 넣을래?”
“하으, 아, 아니요… 아!”
차라리 단단했으면 좋겠는데 워낙 물컹거리는 재질이라 자꾸만 제대로 삽입이 되지 않고 플러그가 미끄러지기만 했다. 쯧 혀를 찬 이안이 뒤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 당기며 밀어 넣자 묵진하게 밀려오는 압박감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아, 좋아… 흐으… 더 넣어 줬으면… 노아가 붉게 상기된 뺨을 바닥에 문질렀다.
마침내 실리콘 플러그가 뒤를 천천히 벌리며 들어오자 노아가 헉, 하고 숨을 쉬었다. 느릿느릿 뒤가 열리는 느낌이 몹시도 선연했다.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플러그가 조금씩 전진하더니 마침내 굵은 부분이 삼켜지고 난 뒤에서야 뒤에 꽉 물렸다.
“아… 으읏…”
뒤가 완전히 가득 찬 기분에 노아가 몸을 들썩이자 겨우 뒤에 물린 실리콘 덩어리가 도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차 싶어 노아가 뒤늦게 뒤를 꽉 조였지만 제대로 되질 않았다. 물컹거리는 재질은 삽입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삽입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노아가 끙끙거리며 몸을 떨고 있자니 뒤에서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언제 꺼냈는지 청 테이프를 길게 늘어트려 뜯고 있었다.
“물려 줬으면 잘 물고 있어야지.”
조금 밀려 나온 걸 도로 꾹꾹 더 깊이 밀어 넣으며 희롱한 이안이 이내 플러그 위로 테이프를 붙였는데, 회음부부터 등까지 쭉 곧게 가로 지르는 방향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붙였다는 듯 희게 드러난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나도록 몇 번 때린 이안이 패들을 손에 들었다.
“내가 몇 대라고 했지?”
“읏,… 서, 서른 대요…”
패들의 매끄럽고 넓적한 표면이 엉덩이를 가볍게 착착 두드리고 문지르는 느낌에 노아가 기대감에 더 엉덩이를 바짝 높이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게 얼마 만에 엉덩이를 맞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기대하며 노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피부를 문지르던 패들로 엉덩이 사이 플러그를 지그시 누르자 노아가 몸을 움츠리는 반응을 노골적으로 즐기면서 이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맞는 동안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면 조금 더 때려주도록 할게. 대신 자세가 흐트러지면, 바로 끝나는 거야.”
맞는 걸 즐기긴 해도 엄연히 고통은 고통인지라 자세 유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잘하면 좀더 고통을 즐길 수 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즐거운 시간은 끝나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노아가 짝,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내려쳐지는 매에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불시에 첫 번째 매를 시작한 이안이 겨우 자세를 제대로 한 노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노아,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난 제안한 게 아니야.”
“아으흐,… 읏, 아!”
지그시 노아의 허리를 누르며 이안이 이내 또 다시 짝, 하고 패들을 내리쳤다. 노아의 몸이 움찔 튀었다. 패들은 케인 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아픈 도구다. 벌써부터 엉덩이가 화끈거리면서 고통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패들에 맞은 엉덩이뿐만이 아니었다.
“흐으, …아!…”
다시 철썩 패들이 엉덩이 위로 떨어지자 일순간 실리콘이 밀려 들어오면서 압박감이 심해졌다. 마치 피스톤 질을 당하는 것도 같았다. 패들에 맞을 때마다 고통이 이중으로 밀려 들어 왔으나 그 모든 게 노아에게는 쾌감이요 기쁨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아가 바들바들 떨면서 달콤한 고통을 삼켜내고 있을 때 열 대에 이르러서 이안이 잠시 노아의 엉덩이를 꾸욱 쥐었다. 따끔거리는 여운에 노아가 아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좋아, 노아?”
“읏, 좋아… 좋아요… 아으!”
잠시 꽉 노아의 엉덩이를 틀어쥐던 이안이 재차 패들을 내리쳤다. 피부와 패들이 닿는 큰 마찰음이 일 때마다 노아가 신음하고는 발을 조금 동동 구르며 고통에 고개를 젖혔다. 점차 못 견딜 정도로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 감각이 커져가며 에이는 듯한 괴로움이 되었지만 노아의 것은 오히려 더욱 단단해질 뿐이었다.
절로 낑낑거리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픈 게, 노아는 너무 좋았다. 패들에 맞을 때 플러그가 쿡 밀려 들어와 느껴지는 욱신거림도, 그리고 몹시 아픈 엉덩이나… 제 허리를 느긋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이안의 손도…
“아, 아! 흐읏…”
도중에 돌연 이안이 때리는 것을 멈추더니 테이프에 고정된 플러그를 일부러 꾸물꾸물 움직였다. 느릿하게 돌려가며 무언가 찾는 것 같더니 교묘하게 각도를 틀어 놓은 이안이 다시 패들을 내리치자 등골까지 오싹하니 번지는 쾌감이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몸을 떨고 있으려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노아가 아! 하고 높은 신음 소리를 냈다.
고통 가운데 찡 하니 울리는 것은 분명한 쾌감이었다. 노아의 반응에 이안이 꾹 플러그를 누르자 다리 사이가 저리는 것도 같은 묘한 느낌과 함께 허리가 떨렸다. 흐으아… 노아가 나지막이 신음함과 동시에 다시 큰 마찰음과 함께 패들이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이, 이안… 아…으흣, 읏, 윽!”
엉덩이를 맞을 때마다 못 견디게 욱신거리는 고통과 허벅지가 절로 움츠려 드는 지극한 쾌감이 잇따랐다. 노아는 마치 저가, 무슨 고양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한 때 노아는 저택에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대체 누가 어떻게 버릇을 들인 건지 발정기만 오면 고양이가 에옹거리며 제 엉덩이를 두드려 달라고 아양을 부렸다.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아응, 읏… 하, 아…!”
스무 대 쯤인가 맞았을 때 아, 아… 하고 길게 울면서 노아가 허리를 비틀었다. 간신히 자세를 무너트리지는 않았지만 지극한 쾌락에 시야가 희게 번졌다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뚝 하고 느리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도 패들이 내리쳐 노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젠 엉덩이에 뜨끈거리는 감각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고, 사탕이니 플러그 따위로 꽉 들어찬 뒤도 달콤하게 욱신거렸다.
아직 진하게 남은 여운에 노아가 우는 소리를 내거나 말거나 이안이 몇 번 더 패들로 두드려 주자 노아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동시에 이안이 뚝 패들을 멈추자 귀고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아가 애가 달은 소리를 냈다.
“이안, 이안…”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만 하겠다고 했잖아.”
몹시 벌겋게 부은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 이안이 (노아에게는 몹시 잔인하게도) 패들을 내려 놓고는 엉덩이를 손끝으로 살살 긁자 노아가 아흐, 하고 진저리를 쳤다. 혹시나 하고 더 때려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던 노아는 이안이 테이프를 뜯어내자 시무룩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좋을텐데…
테이프를 뜯어낸 이안이 플러그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 밀어 넣다가 이내 좀 버겁게 플러그를 물고 있는 뒤에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자 노아가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낮게 낮추었다.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 더 밀어 넣으며 이안이 어느 한 곳을 쑤석거리자 노아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꽉 물고 있던 플러그를 밀어 내고 말았다.
언제 그 상당한 크기의 물건을 담고 있었냐는 듯 이내 다물린 뒤는 조금 부어 있었지만 이안은 느긋하게 손가락을 하나 더 늘리며 뒤를 헤집을 뿐이었다. 안에서 찌걱거리고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사탕을 뒤섞자 노아의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노아가 아흑,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혔다.
“아, 아….아…! 그만,... 흐아,”
이안이 사탕을 어느 부위 위에서 꾹 눌러 둥글리자 노아가 몸부림을 쳤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다가 이내 이안이 아프도록 엉덩이를 쥐어 잡자 우는 소리를 내며 노아가 얌전히 몸을 낮추었지만 손가락은 계속 애타게 카펫 위를 긁었다. 노아가 몸을 바들바들 떨도록 한참을 희롱한 이안이 마침내 굴리던 사탕을 꺼냈다. 끈적하고 진득하게 녹아 있는 상태의 사탕을 아무렇게나 쇼핑백 안에 던져 넣은 이안이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일부러 그 부분을 짓누르며 꺼내기도 했다가 나올 듯 아슬아슬하게 꺼냈다 밀어 넣기도 하는 내내 노아는 숨을 헐떡였다. 다음부터는 사탕은 넣지 말아야겠군, 하고 찐득한 손을 보며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뒤에 꾸욱 제 것을 문질렀다. 미끌거리는 체액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을 진입시키자 노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아직 안에 사탕이 남아 있는, 앗, 아…!”
“걱정 마.”
퍽 제 것을 깊게 밀어 넣고는 눈썹을 한번 찌푸린 이안이 살짝 인상을 쓰면서도 다시 세차게 허리를 움직여 깊게 박아 넣었다. 노아가 소리도 못 내고 몸을 퍼득거리자 몸을 숙여 단 내가 풀풀 나는 뒷덜미를 악 소리가 나도록 깨문 이안이 뒤가 심하게 조이는 통에 잠시 멈추었다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관장 플레이도 한 번 해보자고.”
***
“으으…”
아직도 제 뒤가 찐득거리는 것 같아 노아가 괜시리 뒤를 만져 보았다. 조금 손가락을 꾹 밀어 넣어 보니 전혀 그런 느낌은 없었지만 아직도 단 내가 나는 것 같았다. 다시는 사탕을 넣지 말자는 이안의 말에는 노아도 동감이었다. 한계에 다다라서 노아가 동동 발을 구르는데도 배출하게 하기는커녕 제대로 사탕을 모두 꺼내야 한다며 되려 물을 더 주입하는 이안의 잔인함이란……
뭐, 나름대로 매우 좋긴 했지만…
오랜만에 제 취향대로 플레이를 하고 난 뒤 물 먹은 솜사탕 마냥 모든 의욕이 사라져 침대 위에 푹 퍼진 노아를, 이안은 제 마음대로 껴 안고 물고 빨고 핥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그랬다. 덕분에 노아는 이제는 목덜미에 있는 피부는 죄다 얼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물스물 잠이 밀려오는 가운데 조금 하품을 하던 노아가 이제는 조금 목이 쓰라리기까지 한 걸 느끼며 물었다.
“그런데, 내일 저녁에는 뭘 할 건데요?”
디저트를 먹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저녁 시간을 잡아 놓은 이안의 의도가 궁금해 묻자 이안이 노아의 어깨 위에 탁 제 턱을 얹어 놓고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뭘 하고 싶은데? 하고 물었다. 잔뜩 배부르고 나른한 목소리가 스치자 저도 모르게 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조금 등골이 오싹했다.
“우리 집 주방장 동기가 이번에 새로 레스토랑을 열었다는데 가서 먹어 볼까?”
앗… 주방장 동기라면, 혹시 주방장 만큼이나 만든 음식이 맛있는 게 아닐까 싶어 노아가 눈을 반짝였다. 이안이 가만히 조금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뒷덜미 쪽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감각을 느끼며 노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에 아무리 봐도 즐거운 미소를 지은 이안이 더 제안했다.
“그럼 저녁 먹고 잠시 카페 들렸다가 영화관이나 갈래?”
“좋아요!”
보통은 저택에 있는 작은 영화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지만, 아무래도 시내에 있는 영화 상영관에서 사람들과 보는 것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노아의 대답에 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이안이 다시 목덜미를 질겅거리는 동안 마냥 즐겁고 행복한 노아가 방싯 웃으며 해맑게 말했다.
“꼭 데이트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노아의 말에 돌연 벌떡 일어나 앉은 이안이 몹시 심기가 상한 얼굴로 노아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노아는 이안이 갑자기 왜 이러나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뭐지?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데이트 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데이트 맞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퍽 만족스러워 거의 고롱고롱하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하던 이안의 분위기가 돌연 사나워지자 노아가 조금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뭔진 몰라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아서 노아가 조금 쪼그라들었다. 뒤늦게서야 노아가 이안의 심기가 상한 포인트를 깨달았다. 그게, …이미 우리는 결혼했으니까 데이트 같은 건 안 하는 줄 알고… 노아가 애써 변명해 보았으나 이안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아무리 내가 혼자서 널 좋아하는 거라고 해도, 좀 심하게 무관심하다고 생각 안 해? 응?”
이안이 다그치면서 노아를 매우 몰아붙였다.
“게다가 네 말처럼 결혼한 사이면은 너도 마땅히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결혼했으면 데이트도 안 한다 이거야? 이미 다 낚은 고기라 이거지?”
이미 심기가 상할 대로 상한 이안은 모든 게 아니꼽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게, 저어… 저도 이안 좋아 하는데요… 절대 싫어하거나 그런 거 아닌데…”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노아가 그 말을 하고 좀 후회했다. 되려 그 말을 들은 이안의 눈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았으니까. 이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기에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던 노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안이 심술을 부릴 때는 좀 얄밉긴 해도 대체적으로 노아는 이안에게 퍽 호감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싫어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안…”
우물쭈물하며 노아가 이름을 부르자 이안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됐어. 내일 연락하는 시간에 제대로 나오기나 해.”
네에, 하고 얌전히 대답하자 좀 누그러진 기색이 된 이안이 이만 자자며 불을 껐다. 노아가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 들어가자 이안이 아까 맞아서 아픈 엉덩이를 심술궂게 일부러 움켜쥐고는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아프게 어깨를 콱 깨물었다. 그에 노아가 몸을 움찔거리자 얌전히 자라며 숨이 막히도록 끌어 안았다. 조금 불편하게 뒤척거리던 노아도 조금 찜찜한 마음으로 이내 푹 깊은 잠에 들었다.
***
초반에 거대한 사탕 더미에 깔려 숨이 막혀 죽어가는 꿈을 좀 꾸기는 하였으나 그 외에는 그럭저럭 잠을 잘 잔 노아가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물론, 아침만 상쾌했고 노아의 몸은 반쯤 꿈 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이안이 회사를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반쯤 눈을 뜬 노아가 멍하니 넥타이를 매고 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 소매에서 반짝거리는 저 커프스 링크, 내가 생일 선물로 준 거 아닌가? 되게 자주 하고 다니네… 아니다, 내가 준 거니까 하고 다니는 건가… 비몽사몽중에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며 늘어진 노아가 협탁 위에서 조금씩 불빛을 반짝거리는 제 핸드폰을 발견했다.
문자 메시지가 온 것 같긴 한데, 아침부터 누가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담? 노아의 지인은 대부분이 노아가 아침 형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안과 결혼 한 후 요즘은 조금씩 본의 아니게 아침 형 인간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이안이 출근을 할 때마다 깨는 바람에…
노아가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의미하게 협탁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절인 야채 마냥 축 늘어져 조금씩 잠에 빠져드는 게 안 되어 보였던지 아니면 웃겨 보였던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이안이 친절을 발휘하여 핸드폰을 집겠다는 의지가 유일하게 남아 조금씩 움틀거리는 노아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 주었다. 핸드폰이 쥐이자 조금 정신을 차린 노아가 꾸물거리며 반쯤 뜬 눈으로 눈부신 액정을 바라보았다.
[나 귀국했다 언제 만나자]
“뭐야, 이건?”
누가 뭘 귀국해? 노아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안 언제부터였는지 유심히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잔인하게도 아침 잠이 유독 많아서 여즉 헤롱거리고 있는 노아를 짤짤 흔들었다.
“누구야? 누구냐니까. 노아, 누구냐고.”
어제 심기가 상했던 여파 때문인지 조금 집요하게 이안이 묻자 노아가 어쩔 수 없이 눈을 비비며 제대로 액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고 다시 봐도 발신자 미상이다. 크게 하품한 노아가 모오르겠는데요으으… 하고 대답하자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몰라? 전화 번호가 떠 있잖아.”
“전 전화 번호 같은 거... 안 외워요…”
제발 자신을 다시 자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아가 애달프게 저 멀리 벗겨져 나간 두툼하고 푹신하며 따뜻한 이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안이 어제의 연장선인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너 내 전화 번호도 몰라?”
심기가 좀 불편한 듯한 이안의 목소리를 듣자 노아는 정신이 조금 번쩍 살아났다. 어젯밤 자신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이안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이안 전화번호… 난 가족 전화번호도 이따금 헷갈리는데… 꾸물거리며 노아가 077? 하고 묻자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인상을 팍 썼다.
“개나 소나 다 077로 시작하잖아.”
“그럼, 이안은… 제 번호 외우고 다녀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전화 번호를 외우고 다니냐 싶어서 노아가 조금 억울한 마음에 항의하자 이안이 잠자코 노아의 핸드폰에 직접 찍어 보여준 것은 노아의 전화 번호였다. 노아는 할 말이 없어져서 그저 얌전히 핸드폰을 받아들 뿐이었다.
“오늘 저녁 만날 때까지 외우고 있어. 난 개인 연락 번호가 네 개니까… 네 개 전부 다.”
한 개도 아니고 네 개나?! 하기야 테너도 사업 때문에 핸드폰 번호를 여러 개 가지고 있긴 하지만… 노아의 핸드폰에 자신의 나머지 핸드폰 번호 세 개도 꾹꾹 찍어 저장시킨 이안이 빤히 액정을 바라보고 있는 노아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다 외우면… 오늘 영화관에서 좋은 걸 해줄 수도 있어.”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슬그머니 내려와 턱을 톡톡 두드리자 노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좋은 거, 뭐? 그러나 이안은 더 이상 말을 해주지는 않고 저녁에 보자며 침실을 나갈 뿐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잠이 다 깬 노아가 이안이 저장해 놓았던 전화 번호를 다시 화면에 띄워 올렸다. 이안의 솔깃한 제안 덕에 발신자 미상의 문자는 어느새 노아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버린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