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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 씨는 참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요즘은 전과 달리 한 끼도 굶지 않고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느라 전과 비교적 일찍 일어나 사샤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 사샤가 입을 열었다. 노아의 식기가 잠시 멈칫했다. 방금 사샤가 이안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한 게 맞나?
“어… 이안이요?”
솔직히 말해서 노아는 이안이 그렇게 싫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이안은 빈말로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아마 하이든도 차마 이안이 착하다고는 못 하겠지. 그런데 사샤가 이안이 좋은 분이라고 하니 노아는 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가 무례하게 아무런 말도 없이 찾아와 머무르기까지 했는데 너그럽게도 더 지내라 하시고 이것 저것 신경까지 써주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별 말을요, 사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아도 사실 좀 의아했다. 그 동안 이안이 주위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이안은 결코 친절하다거나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샤를 대하는 태도가 뭔가 다른 사람과 다르긴 했다. 적어도 사샤에게는 대놓고 성질을 부리거나 독설을 하는 일 없이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부터가…
사샤는 여전히 알파인 이안에게 위압감을 가지고 두려워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신을 도와준 이안과 노아에게 무한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사샤는 노아의 성품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했던 온갖 칭찬을 얼굴이 간지러운 느낌일 들 정도로 한 다음 이안에 대한 칭찬도 하였다.
자신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는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하였지만 이안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는 분명 제 배우자를 칭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이상하였다. 아직 내가 이안이 제대로 배우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노아가 사샤를 몰래 데려온 걸 들킨 이후로 이안은 비행기표 값을 구하는 것도 자신이 맡기로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표를 구하는 것이 늦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개인 비행기를 띄우면 될 일 아닌가? 궁금했지만 사샤가 있는 곳에서 꺼낼 말은 아니라 노아가 마음 속으로 의문을 묻어 두었다.
그래도 확실히 저택에 사샤가 있으니 노아는 전과 달리 그다지 심심하지는 않았다. 의사가 이안에게 얼마나 임신 초기에 주의해야 하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노아가 조금이라도 산책을 할라 치면 금새 고용인이 따라 붙었고 외출은 절대 금물이었다. 그럴 때 사샤와 대화라도 하고 있으면 그래도 하루가 빨리 지나갔던 것이다.
“참, 외가에서 연락이 왔어요. 얼마든지 와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잘 된 일이네요, 사샤.”
이 저택에서 평생 머무를 수는 없으니 사샤는 사방으로 갈만한 곳을 찾았다. 러시아에 있는 아버지는 드미트리처럼 심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어린 제 딸을 아무런 가책 없이 20살이나 더 많은 자에게 팔아 넘길 정도로 매정한 이였으니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에게서 도망간 사샤의 어머니가 지내던 외가와 연락이 닿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샤 하나 몸을 의탁할 정도는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자 사샤는 전과는 달리 파릇파릇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드미트리와 결혼하고 있을 때 드리웠던 불행의 그림자도 잠시 거두어지자 제 나이보다도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출국만 하면 사샤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며 좀 불안해 하는 사샤를 달래고 둘이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때, 오늘 유독 일찍 끝난 이안이 점심 때에 맞추어 돌아왔다. 마침 사샤는 다시 심한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도져 주치의의 처방을 받아 진정제를 먹고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은 자연스럽게 노아를 끌어 당겨 입을 맞춘 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지분거렸다. 다분히 제 알파 페로몬을 잔뜩 묻히려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점심 먹었어?”
“아직이요.”
그럼 가서 먹지, 하고 말한 뒤에도 한참을 아쉬운 손길로 노아를 더듬거리다가 이안이 떨어져 나갔다. 노아는 이안이 이럴 때마다 묘하게 뿌듯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이런 것이었다. 나만 욕구불만은 아니구나. 물론 노아는 왜 이안이 욕구불만이라는데 자신이 만족스러워 하는지 까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샤가 자리에 없는 걸 본 이안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진정제를 맞고 자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노아는 이안이 이상하게도 사샤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고 여겼다. 예전에 결혼 초기, 이안이 굉장히 못된 알파처럼 굴며 노아를 (만족스럽게) 괴롭히곤 했을 때, 종종 노아 보란 듯이 다른 사람의 오메가 페로몬을 묻히고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그 때와는 퍽 다른 감정이었다.
의사가 감정 기복이 좀 심할 수도 있을 거라곤 했지만 요즘에는 정말로 하루에 몇 번이고 심하게 바뀌었는데 노아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임신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안, 비행기 표는 아직도 못 구한 거에요?”
“아, 그거 말이지. 뭐… 구하기는 쉽지만 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안돼. 메르데프 양과 이야기를 좀 나눠 보고 나서 결정해야겠어.”
무슨 이야기를… 사샤가 한시라도 빨리 드미트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기를 갈망하는 걸 잘 알고 있는 노아는 이안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무슨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에 사샤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걸까? 눈을 깜박이며 노아가 오늘도 요리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차려 놓은 테이블 위 음식에 손을 뻗었다.
달콤한 소스를 잔뜩 친 상큼한 샐러드를 아작아작 먹고 다음으로는 멋드러지게 꾸민 생선 요리에 손을 뻗은 노아는 살을 씹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약간 비린 것 같아서요.”
다시 포크로 조금 찍어 살을 씹으니 충분히 조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린 맛이 감돌았다. 노아는 딱히 입덧이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고생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이따금 평소에는 잘만 먹던 게 갑자기 별로 좋지 않은 풍미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생선 요리를 좋아했건만 노아는 서너 번 정도만 먹고 손을 거두어야 했다. 아깝다… 지난 번에는 되게 맛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이안은 노아를 거의 옆에 끼다시피 하며 상당히 귀찮게 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을 핥고 빠는 것이다. 이안이 이러면 이럴수록 노아는 욕구 불만이 심해져만 갔기에 조금 밀어 냈지만 이내 꽉 끌어 안겨 여지없이 몸을 내주어야 했다.
“어머…”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온 사샤가 얼룩덜룩한 노아의 목덜미를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두 분 굉장히 금슬이 좋으시네요, 하고 입을 열었다. 이안은 약간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게 분명할 소리를 하며 저녁 식사를 했다. 이안은 다른 사람 앞에서 관계를 갖는 모습을 가지고도 뻔뻔하게 뭘 보냐며 할 사람이었으니 전혀 부끄러울 리가 없었다.
뭔가 자꾸만 거슬리는데 정확히 원인이 뭔지 알 수 없어 좀 불만스러운 채로 식사를 하던 노아는 테이블 위에 요리사가 아예 커다란 연어를 사다가 파피요트 (*고기나 생선을 기름종이에 싸서 굽는 방법의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놓은 걸 보았다. 연어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맛깔스럽게 재료를 함께 구워낸 요리였다.
어머니가 프랑스 출신이라 종종 파피요트를 먹어 본 적 있는 사샤가 맛있겠다며 감탄했고, 노아도 입맛을 다실 때였다. 이안은 연어 파피요트를 저와 사샤의 접시에만 덜고는 요리사에게 도로 내가도록 시켰고, 대신 노아의 접시에는 샐러드와 평소 먹던 스테이크 요리가 놓였다.
“정말 맛있어요.”
“맛있다니 다행입니다.”
노아는 포크로 쿡 샐러드를 찔러 입에 밀어 넣으면서 이안과 사샤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저들끼리만 파피요트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나도 잘 먹을 수 있는데…? 나도 입이 있는데?? 그러나 어째선지 이안이나 사샤나 둘 다 노아에게는 단 한 번도 파피요트를 권하질 않는 것이다.
아니 나도 잘 먹을 수 있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노아는 왜 자신이 파피요트를 달라 청하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억울한 것도 같고… 이안이 지나치게 사샤에게 잘 대해주는 것도 이유를 모르겠고… 그리고 또, 사샤에게 말할 일이 있다는 것도 뭔지 궁금하고.
겉으로야 평소와 다름 없이 즐겁게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노아의 속은 잔뜩 엉킨 실타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이안은 마저 업무를 보러 서재로 사라지고 자신은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웅크려 누우면서 노아가 그제서야 곰곰이 이안의 수상쩍은 태도를 본격적으로 따져보기 시작했다. 왜 사샤에게만 이안이 그토록 친절히 구는 걸까?
혹시 사샤에게 관심이 있나?
처음으로 떠오른 건 바로 그 생각이었다. 사샤는 굉장히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다가 오메가였다. 이안이 사샤에게 관심을 보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게… 요즘 노아는 거의 오메가 페로몬을 풍겨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임신을 하게 되면 알파의 체취를 역겹게 여기는 것과 동시에 오메가도 마찬가지로 알파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페로몬이 베타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될 정도로 거의 사라지고 만다. 혹시라도 관계를 가져 뱃속의 아기를 위험하게 만들 일을 최대한 줄이려는 인체의 신비로운 작용이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이안의 페로몬이 역겹게 느껴지진 않았고, 또 자신도 제 페로몬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안이 저러니까 갑자기 몹시 신경이 쓰였다. 하긴 뭐, 결혼 초기에 이안이 다른 오메가 안 만난 것도 아니고, 사샤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까지 생각하다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냐고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사샤에게 실례되는 생각 아닌가.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잊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헤더를 데려왔을 때 조차 이안의 그런 태도가 이렇게 신경 쓰인 적은 없었다. 결국 노아는 소파에서 바람이 일도록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안이 사샤와 나눈다는 대화가 퍽 궁금했던 탓이다.
저녁만 마치면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에 노아는 잠옷 바람에 가운만을 걸치고 살곰살곰 이안의 서재로 향했다. 벌써 대화를 다 끝마쳤을까 생각하며 서재로 다가가 문에 귀를 기울여 보니 안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안에게 대놓고 뭔지 물어 보면 되는데…”
나 이렇게 남의 대화 몰래 듣는 그런 사람 아닌데… 하면서도 노아가 귀를 쫑긋 기울였지만 얼마나 방음이 잘 되어 있던지 아주 조금 들리는 정도였다. 결국 노아가 어떻게 들을 방법은 없을까 복도를 종종거리다가 복도 3층 테라스를 발견했다. 옳거니 하고 테라스를 열고 나오자 이안의 서재 창문을 통해 사샤와 이안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다.
다행히도 테라스 가장자리 가까이 다가가자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겨우 들렸다. 세찬 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노아는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긴 한데 안 들려… 추위와 맞서 싸우며 벽돌 벽에 찰싹 달라 붙어서야 겨우 노아의 귀에 대화가 제대로 들렸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 3시에 그 곳에서 만나면 되나요?”
“네,……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 노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카페에서 만난다는 이야기지, 이거… 설마 설마 하는데 사샤가 몸을 움츠리면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눈망울이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들키지는 않을까 무서워요…”
“불안해 하지 마세요. 아무에게도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사샤의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거리는데, 거기까지 보고 들은 노아가 마치 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것 같아 얼른 이안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만한 방향으로 물러났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