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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 어디 몸이 안 좋은 건가요?”
사샤가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노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고, 사샤는 노아를 염려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따라 노아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걸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아… 오늘 좀 나른하긴 하네요.”
사샤는 노아의 대답을 임신 증상 중 한 가지라고 생각했는지 수긍하면서 몸이 좋지 않거들랑 바로 쉬라고 권유를 했다. 그러나 노아는 딱히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며칠 전 날 밤 이안과 사샤가 나누던 대화가 자꾸만 머리 속에서 맴돌았던 탓이었다. 사샤를 보자 생각이 더 복잡해져 결국 노아가 낮잠 좀 자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겉으로 보이기엔 평소 다를 바 없어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망치듯이 침실로 향한 노아가 자신이 이 저택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푹신하고 피부에 감기는 감촉이 좋은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좀 과장해서 구름 속에 파묻힌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분 좋게 만드는 이불과 시트에 파묻혀 있어도 울적한 기분은 딱히 좋아지질 않았다.
그 날 밤 이안과 사샤의 대화를 엿들은 후, 처음에 노아는 자신이 대화를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만나는데 얼마든지 카페에서 만나자고 할 수 있고, 또… 불안하다고 하면 위로도 해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토요일, 둘이 정한 약속시간에 점점 가까워지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 마디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냐고?
그리고 나도 연어 파피요트 잘 먹을 수 있는데!
마침내 토요일인 오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자 노아는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전에는 이안이 다른 오메가들이랑 자고 와도 아무렇지 않았잖아. 그리고 이안이 사샤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확실한 증거도 거의 없으니 드미트리에게서 도망쳐온 가여운 사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노아가 아무리 애써 그리 생각하려고 해도 결론은 이안과 사샤가 다정한 분위기로 함께 있는 상상으로 끝났다.
영 컨트롤이 안 되는 기분과 제 상상력에 짜증이 난 노아가 베개를 못 살게 굴었다.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니 이안이 결혼 초기에 오메가들과 소위 바람을 핀 것도 거슬렸다. 아니… 사샤랑 그럴 거면 애초에 그런 계약서를 작성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계약서에는 분명 바람을 피웠을 경우의 조항이 있었을 터… 그런데 그 조항이 어땠는지 생각이 안 나네. 하기사 지금은 세이프 워드도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니 그런 조항이 생각날 리가 만무했다.
이상하게 몸이 축축 늘어져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가기도 귀찮아 노아가 베개를 끌어 안고 이안과 계약하던 당시 그저 훑어 보기만 했던 계약서의 내용을 기억을 더듬어 보는 동안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아? 들어가도 괜찮아요?”
사샤의 목소리에 노아는 얼른 푹 고개를 파묻고 새근새근 자는 시늉을 했다. 사샤는 두 세 번 정도 더 노아를 불렀다가 노아가 잔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이내 문 밖에서 사샤가 하이든과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자는 것 같네요. 그럼 제가 나중에 노아 님께 이야기를… 점차 둘이 나누는 소리가 멀어지자 노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조금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였다.
3시에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아무래도 사샤는 외출에 앞서 주인인 자신에게 알리려고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노아는 아주 잠시 동안 자신도 사샤를 따라 나가 보는 걸 떠올려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몰래 기웃거리는 짓은 대화를 엿든는 것으로도 차고 넘쳤다.
에이, 몰라. 난 그런 거 신경 안 쓸 거야! …글쎄 신경 안 쓸 거라니까?! 둘이 만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는 괜히 자존심이 상해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노아는 깊이 잠에 빠져 들었다.
***
“노아? 노아, 일어나 봐.”
몹시 깊이 잠들었던 노아가 가볍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서늘한 손길에 눈을 뜨자 이안이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라, 이안이 왜 여기에 있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저도 모르게 시계를 바라보자 벌써 7시 반이었다. 저녁을 먹기엔 좀 지난 시간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저도 모르게 노아가 몸을 일으켜 보니 옆에 저녁으로 보이는 음식이 가득 담긴 트레이가 와 있었다.
“왜 저녁 식사 때 깨우지 않고요…”
그렇게 말한 노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자 이안이 트레이 쟁반 위에 담겨 있던 식사를 침대 위에 올리며 노아를 나무랐다.
“몸이 그렇게 안 좋으면 의사를 불렀어야지. 아니면 나한테 연락을 하던가.”
“의사요?”
아직도 잠이 덜 깨 노아가 비몽사몽 한 가운데 눈을 비비려고 팔을 들어 올리려다가 움찔했다. 왼팔에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노아가 잠시 뒤에 이안이 한 말을 이해하고는 좀 얼빠진 질문을 했다.
“제가 아팠어요?”
“… 자기가 아픈 것도 모르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안이 어이 없어 하면서도 그냥 아직도 멍한 노아의 손에 식기를 쥐어 주었다. 음… 아무래도 오늘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았던 건 몸이 안 좋은 탓도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안과 사샤의 대화를 듣던 날 테라스가 좀 많이 춥긴 했어. 이안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픈 것도 같았다.
“열도 좀 있길래 의사가 그냥 푹 자고 나서 식사하고 약 먹으라고 하던데.”
“그렇게 아픈 건 아닌데.”
“뭐든 조심해야 할 때야.”
아까부터 계속 나무라면서 이안이 이제는 노아의 식기에 직접 음식을 찍어 주기까지 했다. 노아가 영 손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노아가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영 입맛이 없었다. 잠시 뒤에 노아가 물었다.
“사샤 양은요?”
“지금 네가 메르데프 양이나 걱정할 때야?”
빨리 먹지 못하냐고 이안이 눈을 부라렸는데, 몸이 나빠서인지 아니면 평소에는 그냥 그러려니 지나가려는 것도 거슬려 노아가 탁 소리를 내어 식기를 내려 놓았다. 어딜 보나 불만이 가득한 몸짓이라 이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래?”
“나도 연어 파피요프 잘 먹을 수 있는데.”
“…뭐라고?”
이안이 얼떨떨하게 물었으나 노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빵이나 주워 스프에 적셔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대뜸 노아가 왠 요리 이름을 말해 인상을 찌푸린 이안은 잠시 뒤에서야 며칠 전 연어 요리를 먹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는 약간 어이가 없어 설마 하며 되물었다.
“혹시 그 날 연어 요리 안 먹어서 이러는 거야?”
“아닌데요.”
“생선 요리 비리다면서. 그래서 안 준건데…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아니라니까요?”
약간 언성을 높이고는 노아가 소리를 내어 달그락거렸다. 그러나 그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는 아까보다는 좀 힘이 빠져 있었다. 이안은 제가 보기엔 노아가 이유 없이 성질을 내는 걸 이해할 수 없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몸이 안 좋아서 짜증을 내는 건가, 아니면 의사가 줄곧 말하곤 했던 임신한 사람 특유의 변덕인가…
“그럼 지금 내오라고 할까?”
“싫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럼 먹지 말던가! 했을 텐데, 이안은 노아가 침대 위에서 이렇게 땡깡을 부리고 있는 걸 보니 신선하고 좀 귀엽기도 했다. 연어 요리 좀 안 줬다고 이렇게 삐지다니, 대체 나이가 몇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나 노아가 결국 음식을 반쯤 먹다 말고 잔뜩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자 이안은 이게 단순히 요리를 주고 안 주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동안 노아가 먼저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 기다리던 이안은 한참을 기다려도 노아가 입을 열지 않자 흘깃 노아가 남긴 식사를 바라 보았다. 일단 기분 좀 풀어 주고 음식을 조금 더 먹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이 살살 노아를 구슬렸다.
“왜 그래? 대체 뭐가 문제야?”
“별 문제 없는데…”
“이렇게 하고 있는 데 뭐가 문제가 없어?”
자신이 이렇게 짜증을 부려도 이안이 별로 화가 난 기색도 없이 부드럽게 타이르며 묻자 노아가 한참을 꿈지럭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뜸 돌직구를 던졌다.
“우리 결혼한 뒤로 이안, 다른 사람 몇 명이나 만났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안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이게 무슨 의도에서 한 질문인가 생각하며 노아를 바라봤지만 노아는 여전히 좀 풀도 죽고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애꿎은 이불만 못살게 쥐어 뜯고 있었다. 노아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이안은 아무리 노아가 별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신이 내도록 초반에 노아를 괴롭힌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찌르고 들어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노아, 그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궁리를 하면서 점차 이안이 시무룩해졌다. 그 동안 노아가 별 말을 안 해서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많이 불쾌했나? 그래도 정말 결혼 초반에만 조금 그랬고, 그 후에는 절대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걸 무슨 수로 그나마 듣기 좋게 돌려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이안이 입을 막 열려던 참이었다.
“초반에 만난 건 그렇다 쳐도 그... 계약서를 쓴 후에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안은 잠시 얼이 빠졌다.
“노아,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뭐… 데이트 같은 거 한 거 아니에요?”
“데이트?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난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만 있었는데.”
하늘에 맹세코 이안은 절대 오늘 데이트 같은 걸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내도록 회사에만 틀어 박혀 업무만 처리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하루 종일 제 곁에 붙어 있긴 했지만 그걸 데이트라고 한다면 지금쯤 이안이 결혼한 사람은 다니엘이 되었을 터였다. 그건 생각만 해도 매우 끔찍한 결혼이었다.
아까부터 서로 질문만 오가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노아나 이안이나 각자 상황을 정리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노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거의 동시에 이안도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만약 느낌표를 표정으로 묘사할 수 있다면 딱 그 자체인 얼굴을 했다.
“혹시 어제… 내가 메르데프와 하는 대화를 들었어?”
“아, 아닌데!”
“방음이 철저히 되어 있어서 듣지는 못했을 텐데… 가만, 어째 그 날 밤에 몸이 차더라니…”
메르데프와 대화를 나눴던 밤, 곧 침실로 돌아와 끌어 안았더니 노아의 몸이 평소보다 차기에 이안은 내심 깜짝 놀랬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 밤에 테라스에 나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이안이 막 노아를 야단치려던 차였다.
노아에게 앞으로는 테라스에 그렇게 나가있지 말라며 말하기 전 이안이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노아가 아까부터 취한 태도와 전혀 이해할 수 없던 말들을 곱씹어 보고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안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지자 노아는 이상하게도 얼굴이 더욱 붉어져 침대 위에 있던 트레이를 밀어 내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지만 이안이 도로 끄집어 냈다.
“나, …졸린데요, 자고 싶은데…”
“아니야, 난 네가 이렇게 오해하게 둘 수는 없거든. 오늘 사샤 메르데프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노아가 밀어 냈던 트레이를 도로 무릎 위에 얹어 두면서, 지금 표정만 보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기뻐 보이는 이안이 살살 노아를 구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