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화 (1/123)

<1부>

01

정면으로 보이는 데스크에 앉은 여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스 무 층을 훌쩍 뛰어넘는 공간을 무기력하게 끌어올려지는 동안 멍하니 서있던 희완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문이 열린 층수를 확인했다. 34층. 제대로 도착했고, 굳이 숫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낯익은 여비서의 얼굴만으로도 목적지의 확인유무는 불필요한 것인데, 습관이었다.

또 우두커니 서 있다 시간제한에 걸려 닫히려는 문 사이로 손을 뻗은 희완이 겨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그런 희완을 아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던 여비서가 그 속내를 짐짓 모른 체 하며 인터폰을 눌러 희완의 방문을 알렸다.

그 렇게 눈인사 한 번으로 출입을 승낙 받은 희완이 익숙한 걸음으로 데스크 왼쪽을 꺾어 돌아 빈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모퉁이에서 희완의 걸음으로 서른 걸음. 꽉 닫힌 사무실 앞에 서서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어 비행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과 함께 가방에 챙겨 넣었다.

괜 히 목이 타서 손끝으로 목울대를 천천히 쓸어내리던 희완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했다. 복도 양 옆을 벽 대신 채운 넓은 창으로 정오 무렵의 뜨거운 햇빛이 고스란히 들이치고 있었다. 1월의 추운 날씨와는 거리가 먼 계절감이 물씬 풍겨지는 장면에 눈썹을 올리던 희완이 목울대를 쓸던 손으로 제 배를 꾹 눌렀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거른 참이 되었다. 방문을 마치고 다음 일정까지 잠시라도 끼니를 때울 시간이 될까를 가늠하던 희완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닫힌 문 위로 손등을 내려놓았다.

똑. 똑. 울림이 낮고 묵직한 문은 목재로 높은 경도 값과 비례하게 그 방음 또한 훌륭했다. 웬만해선 안의 소리가 바로 밖에까지도 새지 않는 문의 고리를 잡아 돌린 희완이 안으로 들어섰다.

메마른 사무실 공기가 익숙하게 코끝으로 떠밀려들어 왔다.

문 을 닫음과 동시에 몸을 바로 세워 꾸벅 고개를 숙인 희완은 서른 평 남짓한 사무실의 주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출입문 정면에 비치된 데스크 안쪽을 비우고 밖으로 돌아 나온 그는 명패를 가리고 앉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었군.」 그의 행동에서 그 한 마디를 유추해낸 희완도 절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의 머리 꼭대기 벽면에 걸린 디지털시계가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이럴 때면 희완은 늘 곤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의 비서에게 미리 연락을 하면 되돌아오는 답변은 「시간 변경은 어렵습니다.」 였다. 어투도 어조도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요는 네 사정이야 알 바 아니니 약속된 시간 내에 필히 오라는 통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꼭 좀 부탁드립사, 했고, 그쪽에서도 드물게 알겠다, 했다.

제 요청이 그에게까지 닿지 않은 것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저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여비서의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사정 봐주겠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는데.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만큼 변죽이 좋지 못한 희완은 어렵게 꺼낸 말이 그렇게 무시되는 걸 겪으며 그런 식으로나마 지각을 알린 것에 만족해야하는 것인지, 이유 있는 지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억울해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꾸벅 다시 고개를 숙였다.

늦은 건, 늦은 거니까.

“죄송합니다.”

“10분, 남았습니다.”

값 비싼 천에 휘감겨 있는 그의 긴 다리를 따라 시선을 든 희완은 다시 목구멍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난처한 심정으로 데스크에 걸터앉은 그의 상체를 좇아 완전히 눈을 바로 세운 희완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다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중간에 메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가서는 것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와 약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만 남겨 놓고 가까이 다가선 희완이 힐끔 머리 위의 시계를 올려보았다. 이제 막 22분으로 바뀐 시계 초가 멈춤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메탈 느낌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시간… 안 될 것 같은데. 하면서도 무릎을 굽히는 희완의 키가 차츰 낮아졌다.

추 운 곳을 맴돌다 훈풍이 도는 실내로 옮겨져 붉게 상기된 손끝이 섬세한 문양으로 촘촘히 장식된 벨트의 걸쇠를 풀었다. 처음도 아닌데 손짓은 꽤 서툴렀다. 이어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지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선명하게 울렸다.

검 은색 천에 묵직하게 도드라진 윤곽을 빤히 보던 희완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냉기가 남은 손끝을 허벅지에 문질러 억지로 열을 내고 탄탄한 근육이 미끄러지는 골반에 손을 댔다. 이윽고 마지막 한 장까지 끌어내려 드러난 살덩이를 간신히 온기가 도는 양 손바닥으로 감싸 쥐는 희완의 눈꺼풀이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메탈스런 향과 그의 체취가 섞인 습한 향이 코끝을 엄습했다. 억세지만 결이 좋은 음모가 매만져지는 살덩이를 가득 잡은 희완이 머뭇머뭇 혀를 꺼내어 바싹 마른 제 입술을 꼼꼼히 핥아 적셨다. 그리고 한껏 벌린 입에 그의 것을 담으려던 찰나였다.

조 용해서 더 크게 들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희완의 뒷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전에도 몇 번 들어본 기본음이었다. 놀라 마른 장작으로 변해버린 희완의 정수리 위에서 굵직한 그의 음성이 울렸다. 동시에 멎었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입을 벌린 그대로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희완이 겨우 눈동자만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바로 위에서 그가 하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들리는 건 터질듯이 뛰는 제 심장소리 뿐이었다.

무 어라 두어 마디를 덧붙인 그가 다른 손으로 희완의 머리를 툭 밀어낸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희완이 벌렸던 입술을 꾹 깨물고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이유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꺼내들었던 그의 것을 도로 제자리로 물리고 허리 벨트까지 잠그고 나서야 겨우 숨소리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사이 짧은 통화를 마친 그가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들어올 것 없이 차를 대기시켜 놓으라는 지시에 알았다 답하는 여비서의 목소리에 퍼뜩 이성을 찾은 희완이 무릎을 꿇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히 서 있던 희완이 주춤주춤 뒤로 떠밀렸다. 걸터앉았던 데스크에서 일어선 그의 키가 껑충했다. 메탈향을 풍기며 데스크를 돌아 붙박이장에서 슈트 재킷을 꺼내 입은 그가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 아직 입니까?”

갑자기 이 상황이 못 견디게 머쓱해져 연신 등 뒤로 돌린 손끝만 꼬집고 있던 희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 박자 늦게 아차 했다. 그냥, 먹었다 할 걸.

“이런 식으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건 달갑지 않습니다.”

시 간 못 맞출 것 같다고, 비서에게 연락했던 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지갑을 꺼내 든 그가 지폐를 헤아려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그것을 점심값과 화대, 둘 중 무엇으로 받아들여야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희완의 귓가로 다시 그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질량감과 존재감이 뚜렷한 소리였다.

“손해 본 시간을 제한 값입니다.”

아, 그는 시간을 돈으로 셈하는 사람이었다.

희완의 주변에는 아주 드문 부류였고 이런 식으로 엮인 것은 그가 최초였다.

비 스듬히 숙인 희완의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솟아 나온 붉은 귓등이 무심한 그의 눈동자를 차지했지만 아주 잠시였다.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끄러미 보고 있던 희완이 데스크 위에 올려 진 지폐를 주워들었다. 십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

“…….”

정 말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십분 만에 제 손에 굴러들어온 큰 액수에 희완은 당혹스러움과 묘한 좌절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말하자면 비참함이라는 것이 꾸역꾸역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밀어내며 수표 다섯 장을 재킷 안쪽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오래 입어서 미세하게 닳은 소매 끝을 허벅지에 한번 문지르고, 광택이 나는 검은 명패를 무심코 한번 내려다보고, 가방을 찾아 어깨에 메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12시 32분.

지금 출발하면 어디서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뭐라도 간단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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