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피가 주룩 흐르는 게 여간 쉽게 볼 상처가 아니었다. 옆에서 훌쩍대는 여자 후배를 달래 비품실에서 구급상자를 가져오게 하고 석주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형, 아파요.”
“응, 생각보다 상처가 심하다. 피가 콸콸….”
“으, 더 말하지 마요. 현기증 날 것 같아요.”
“피하지, 둔하게 거기 서서 뭐했어.”
“누가 그럴 줄 알았나. 아차 하는 사이 와장창, 피슝- 날아오는 거 피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음 여기에 박혔을 거라구요. 여기.”
하며 멀쩡한 손으로 제 옆구리를 가리키는 석주의 얼굴이 기분 탓인지 더 하얗게 뜬 것 같았다.
꾸 물꾸물 쉼 없이 기어 나오는 피를 닦고 보니 유리컵 파편이 스치고 간 자리가 꽤나 깊었다. 이 마당에도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제 잘난 얼굴과 늘씬한 옆구리를 사수했다며 떠벌거리는 석주에게 2%로 모자란 운동신경이라며 타박을 한 희완이 마침 돌아온 여자 후배에게서 구급상자를 넘겨받았다.
“정말 미친 거 같아요.”
“목소리 낮춰.”
“아무도 없어요. 선배님들도 아까 단장님 찾으러 나가셔서 아직이에요.”
“우리만 쏙 빼놓고 사발 붓는 모양인데요? 아야야, 형 쫌!”
벌 어진 상처로 소독약을 들이부으니 나오는 악 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 후배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걸 보고 순식간에 얼굴이 더 핼쓱해진 석주가 안절부절하며 여자 후배를 달래기 시작했다. 사귀는 거 비밀이라더니 이렇게 대놓고 티내는 놈들도 오랜만이라 희완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 좀 그만 울어, 병원 갈 정도도 아니구만, 왜 그래애.”
“그치만, 요즘 들어 부쩍 더 심해진 것 같단 말야. 안 그래요? 희완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정말 아까는 뭔 일 나는 줄 알고….”
새 로 섭외 되어 이번에 합류한 음악 감독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 성격 만만찮은 단장과 흔하게 트러블이 있었는데 오늘은 작가까지 합류하여 제대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정식 단원이 아닌 희완은 그들의 연습 전에 미리 연습실 정리하는 등 잡다한 걸 준비해 놓고 다른 팀 공연 스텝으로 동원되는 중이었다. 무대 뒷정리까지 마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것이 약 10시 경이었다. 세 명의 충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연습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유리컵이 깨진 파편과 구겨진 대본 등으로 엉망이 된 연습실 한쪽으로 다가간 희완은 아무렇게 나동그라진 책상과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 때 연습실 작은 구석을 차지한 좁은 사무실에 웅크려 있던 여자 후배가 문을 열고 나와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었다.
“상처가 너무 크게 벌어졌다. 일어나, 옷 입어. 그리고….”
“주경이에요.”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칫밥으로 단련 될 수밖에 없는 녀석이 갑자기 짠하게 느껴져 퉁퉁 부은 눈을 물끄러미 보던 희완이 찬 손끝으로 그 주변을 꾹꾹 눌러 주었다.
“그래, 주경이는 가방 챙겨서 와. 병원 가자.”
석주가 옷을 입는 걸 도와주며 제 수중에 남은 돈을 헤아리던 희완이 응? 하고 시선을 들었다.
“미안, 못 들었어.”
“형, 그거 반칙이라구요. 내 여친인데 그렇게 다정하게 굴면 이 속 좁은 남자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고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 상처가 보기보다 심각한가 보다.”
“아프긴 되게 아프네요.”
“네 말대로 여기 안 박히길 다행이네.”
하며 석주의 옆구리를 쿡 찌른 희완이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을 소매 끝으로 훔쳐 주었다.
분 을 못 이기고 유리컵을 던져 이 사단을 낸 음악감독이 먼저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고 그 다음이 서 작가, 그리고 단장 순이었다. 남아있던 단원들도 그들 달래준다고 세 갈래로 찢겨 허둥지둥 쫓아가느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석주를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비밀연애라고 단 하루 만에 들킨 줄도 모르고 이래저래 눈칫밥만 먹던 녀석 그나마라도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형, 근데 응급실은 좀… 비싸지 않아요?”
“너 그거 제대로 치료 안하고 놔뒀다간 더 큰 돈 들어 갈 걸.”
“그러니까요, 그게-”
“선배 서울대병원으로 가요?”
마 침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친 주경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희완이 석주의 가방까지 제 어깨에 메고 먼저 연습실을 나섰다. 혹시나 하고 남겨 둔 수표 한 장이 크게 위로가 되었다. 40만원을 부치고 점심 값으로 오천원을 쓰고, 선배들 담뱃값으로 만원을 쓰고 수중에 남은 돈이 8만 5천원.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응급실로 가면 배는 들 터였다. 이 안에서 해결 봤음 좋겠는데.
“형, 이게 전부에요.”
가 는 내내 둘이 붙어 뭘 그렇게 속닥거리나 했더니, 석주가 멋쩍게 내민 것은 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천 원짜리 네 장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완이 그만 너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긴 이 녀석이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바보가 아닌 바에야 그렇게 살이 갈라지고 피가 철철 쏟아지는데 안 아프고 겁이 안 났을 리 없다. 빈털터리 주머니가 조장한 쓸데없는 의연함이었다.
“돈 있어.”
왕년의 기대주 희완이 이 바닥에서도 유별나게 돈에 쪼들리고 있는 것은 곁다리 걸친 사람 치고 모르는 이가 없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대신 얼굴로 말하는 석주의 볼을 가볍게 툭 친 희완이 덧붙였다.
“부족하면 보태.”
항 생제를 맞고 봉합수술을 하고 5일치 약을 처방 받고 나니 가진 돈에서 만원이 부족해서 커플의 돈을 보태 치료비를 지불하고 나오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취를 하는 주경의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다는 석주를 같이 보내고 연습실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희완의 귓등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춥 고, 피곤했다. 말이 스텝이지 공연 뒤치다꺼리는 막노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참 러닝 중인 연극 공연은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랐고 평도 괜찮았다. 초연임에도 공연 두 달 째에 스폰서가 붙었고 박봉이나마 알바를 돌릴 여유가 생겨 희완에게도 할당량이 떨어진 것이었다. 소개 시켜 준 선배는 고생스런 자리 밖에 줄 게 없어 미안해했지만 감지덕지였다. 힘들어도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희완에게 그런 자리는 좋은 기회였다. 오히려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생각난 김에 선배에게 문자를 보낸 희완이 근처 보이는 벤치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앉 으니 전신으로 본격적인 피로감이 몰려왔다. 차게 부는 바람에 점퍼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고 턱을 깊숙이 묻은 희완의 짧은 머리칼이 찰랑였다. 전역 후 일년 여간 제대로 만진 적이 없는 머리는 심심풀이로 동료들 머리 만져주는 경서의 손길이 없었다면 지저분하게 귀와 목덜미를 뒤덮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 깐 앉아 있다 간다는 게 깜빡 존 모양이었다. 문자음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희완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도 수고했다는 성민 선배의 답문이었다. 카톡 프로필에 뜬 성민과 그의 여친 사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액정에 불이 꺼졌다. 그 까만 화면 위로 광택이 나던 명패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걸 사준 것도 그였다. 전역 후 핸드폰을 살릴 여유도 없이 바삐 쫓기던 희완은 그 짧은 시간 잃은 게 많았다. 학업과 극단 생활을 병행하면서 충실히 쌓아왔던 얄팍한 커리어와 대인관계도 그에 속했다. 대학로로 복귀하게 된 희완에게 지폐 다음 두 번째로 최신형 스마트폰을 안겨준 그는 아무 때고 그의 시간에 맞춰 희완을 불러내곤 했다.
삭 신이 나른하게 잠기는 몸을 추위에 웅크리며 까만 액정에 이마를 꾹 누르는 희완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다. 때마침 술 먹고 붙은 패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환자들이 들이닥친 응급실은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그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공간에서 의사를 기다리는 잠시간에도 감은 붕대를 흠뻑 적실 정도로 끊임없이 새어나오던 빨간 핏물이 뒤늦게 희완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깨진 유리파편 하나로도 쉬이 피를 내놓는 게 사람 몸이라는 게 새삼 충격이었다.
잠 을 자야 할 텐데. 오늘은 찜질방에라도 들어갈 여유가 될 것 같아 단장에게 연습실 열쇠를 받아 놓지 않았다. 아무도 남지 않은 곳을 열어두고 갈 수도 없어 나오는 길에 문을 잠갔고 말단인 석주와 주경에게 여분의 키는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로 하나하나 신세질 곳을 제해 나가던 희완이 결국 점퍼 후드를 뒤집어쓰고 벤치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백팩은 앞으로 돌려 배를 덮었고 두 팔은 꽉 팔짱을 껴 체온을 보호하고 두 눈을 꾹 감았다.
낮 에 시간이 안 맞았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그와 시간을 보내고 노숙까지 했다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을 터였다. 차라리 낮이 아닌 밤에 불렀다면 잠자리도 해결되고 더 수월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다 눈살을 찌푸리는 희완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갈 데 까지 가더라도 추접스러워지지는 말자, 연희완.
까무룩 잠든 희완이 꾸물꾸물하다 꼬아 올렸던 다리를 펴 내리고 벤치에서 일어나 앉았다. 코를 가볍게 훌쩍이고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가 안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찾아 꺼냈다.
부단장이었다. 강원극장 근처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고 있으니 오라는 문자였다.
그걸 확인하고도 깜빡 든 잠이 깰 때까지 오도카니 앉아 있던 희완이 재채기를 한번 하고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2시의 대학로는 여전히 번잡하고 바람이 불고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