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기타 줄에 실린 담담한 목소리에 벤치 구석에 몸을 파고 있던 희완의 눈썹이 들렸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제법 맛을 살리는 목소리를 잠자코 듣는 희완에게서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한 곡을 다 부르고 퉁퉁, 기타 줄을 튕겨보고 또 다른 곡을 떠올리듯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길거리 가객의 드러난 목덜미가 유난히 추워 보였다. 벤치 위에 세워 올린 양 무릎에 코를 박고 물끄러미 기타 줄을 쓰다듬는 가객의 빨간 손끝을 담아내던 눈으로 부는 바람이 스쳤다.
문 이 열려 있는 학정 연습실 책상에 대본을 내려놓고 왔다. 사무실에 대충 뭉개져 자고 있는 단원들 깨우기 싫어 청소는 관두고 바람 들지 않게 문만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나왔다. 대타를 구하는 문자도 없었고 도움을 구하는 고함 소리도 없어 눈에 띄는 벤치에 앉아 하릴 없이 오전 시간대를 보냈다.
증명하고 싶은 것 따위 없다. 용서를 바라고, 이해를 바라며 주변을 맴도는 것이 아니다.
다 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육체의 적막감이 싫어 쉼 없이 과거를 서성이는 희완은 이미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사방에서 좁혀 들어오는 골방에 갇혀 질식해가는 사람처럼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니 코틴 냄새가 진해 옆을 돌아보니 기타를 맨 가객이 옆에 앉아 오만상을 찌푸리며 불을 당기고 있었다. 말없이 담배를 권하기에 입에 물고 붙여 주는 불을 당긴 희완이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활동하기 이른 오전 시간대, 특히 눈이 온 다음 한풍이 몰아치는 날 공원에 한가로이 서서 노래를 듣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도 꼭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이 시간에만 나와 기타 줄을 튕기는 가객이 추운지 옆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 올렸다.
빨 갛게 변한 양 손을 잠바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은 채로 입으로만 담배를 빨고 연기를 뱉어내는 가객의 곁에서 길게 한번 당겨 빤 희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가까운 자판기로 가서 따뜻한 커피 두 캔을 뽑아 하나는 그 손에 쥐어 주고 하나는 그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다.
“내일은 비 온다던데요.”
흰 얼굴에 주근깨가 도드라져 보이는 얼굴로 콧물을 훌쩍이는 가객의 잠바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려주고 저처럼 후드까지 뒤집어 씌워 준 희완이 그러시냐고, 대꾸했다.
“신청곡 불러드릴게요.”
담 배 한 가치 적선한 것 치고 돌아온 대가가 두둑한 게 멋쩍은지 열심히 손을 녹여가며 씨익 웃는 가객이 묻는다. 여기저기 긁히고 뜯어지고 묵은 상처가 많은 기타는 한눈에 보기에도 낡고 세월의 흔적이 깊어 이제 막 스물을 넘긴 가객과는 묘한 어울림이 있었다.
“좀 전에 그거.”
극단 입단 후 연기보다 먼저 배운 노래였다.
“그거 듣고 싶습니다.”
오 케이. 흔쾌히 신청곡을 접수한 가객이 후루룩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잠시 세워뒀던 기타를 둘러메고 호호 손을 불어 냉기를 물리치고 퉁퉁, 기타 줄을 두어 번 튕겨 음색을 맞췄다. 곧 익숙한 선율이 그 줄을 타고 실려 나왔고 금세 추위를 잊은 듯 소리에 몰입하는 가객의 음성이 허공에 둥둥 실렸다.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무대 뒷정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성민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뒤 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미안하다며, 하준우를 향한 걸쭉한 욕지거리도 빼놓지 않는 그는 그렇다고 하준우을 이해하라는 말도, 네가 잘못했다는 말도 않고 그저 담에 보면 줄행랑을 치라는 말만 해주었다. 그래서 희완은 죄송하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희완이 그리 간 뒤 성민도 몹쓸 짓을 당했다는 이야길 전해 듣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챙기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묻고 싶어도 목구멍에 턱 막힌 그 한 마디는 도무지 뱉어낼 수가 없어서 가슴에 쌓여만 갔다. 그런 것들은 너무 많았다.
회 식 이후의 첫 공연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저를 따로 두고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예 감추지도 않아 일일 대타로 들어온 알바들도 눈치 챌 정도였다. 이번 주까지 봐주기로 했던 거고, 여기서 관둔다면 무리해서 일을 주선해준 성민에게도 누를 끼치는 일이었기에 희완은 묵묵히 제 일에만 충실했다. 그러나 무대감독조차 껄끄러워하는 분위기에 결국 희완이 먼저 내일부턴 그만 나오겠다, 고개를 숙였다. 딱히 아쉬운 기색도 없이, 그럼 그렇게 하라는 무대감독은 분위기 흐리는 놈이 제 발로 나가주는 게 속편한 눈치였다. 어쩌면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미는 희완을 보고 눈치도 없는 놈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늘 하루 만에 성민의 이름이 몇 번씩 오르내리는 걸 듣고 희완이 더 못 버틴 것이다.
일 한 값은 정산한 뒤 나중에 계좌로 보내겠다는 말에 괜찮다고,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웃음을 읽으며 소품실을 돌아 나와 막 건물을 나서는데 뒤에서 허겁지겁 뛰어온 누군가 희완을 붙잡았다. 부연출이었다.
“연출 선생님이 계속 나오라십니다. 또 이번 주로 끝내지 말고 막 내릴 때까지 계속 나오라십니다. 물론, 별일 없으면.”
네 놈이 별일이야 있겠냐, 라는 속뜻이 깔린 말을 면전에서 듣고 있던 희완은 술자리에서 하준우의 잔을 받던 연출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학파 출신으로 영화판에서 단편영화로 해외 시상식까지 다녀왔다가 작년 연극판으로 진출해 첫 작으로 평단과 관객의 환심을 사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이쪽에서도 화제의 인물이었다. 몇 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라는 성민을 봐서 사정을 봐주려는 것 같은데 덥석 그 호의를 받아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계속 나오는 걸로 알겠습니다.”
행 여 딴말이라도 할까봐 제 말만하고 홱 돌아서는 부연출을 놓친 희완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저녁 내내 제 주변을 맴돌던 불편한 공기들을 떠올리다 이내 돌아서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성민과 길지 않은 통화를 하면서도 그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비좁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골목들을 지나쳐 돌아 나오는 내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던 희완의 걸음이 탁 걸렸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노천카페에서 성희와 함께 봤던 그 아가씨였다.
“이런 걸 꽂고 있으니 사람이 불러도 못 듣죠.”
옆에서 불쑥 팔짱을 끼고 들어와 다른 손으로 희완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당겨 빼는 소영이 그것을 제 귀에 갖다 대고는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구닥다리.”
노래 선곡이 별로였는지 한 마디 툭 던지고는 그대로 희완을 왔던 길로 다시 잡아끌었다. 악력이 별로 세지도 않은 그녀의 팔을 정중하게 물리치고 나머지 이어폰도 빼내는 희완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쪽에서 뒤풀이중이거든요. 우연히 보고 불렀는데 쳐다도 안 보기에 막 뒤쫓아 왔죠.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그랬습니까, 미안합니다.”
아휴, 발 아파. 우는 시늉을 하는 소영의 굽 높은 힐을 내려다보던 희완이 제 쪽으로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잡아 세워주었다.
“음악 그렇게 크게 들으면 청각 다 버려요.”
기다렸다는 듯이 살갑게 말을 붙이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시냐는 눈길에 어휴, 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쉰 소영이 곧 생긋 눈을 곱게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같이 한 잔 하자구요.”
“괜찮습니다.”
“성 희 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연극도 안 보러 오셨다면서요? 말은 안 해도 엄청 서운해 하는 눈치더라구요. 가뜩이나 성적도 안 좋은데 오늘은 무대에서 대박 사고도 났거든요. 성희 언니 엄청 저기압이에요.”
말 이 이상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성희가 부득불 저를 잡아오라 할 리도 없고 엄청 저기압인 상태에서 저를 본다고 기분이 나아질 리는 더더욱 없을 터인데, 생글생글 웃는 소영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희완이 그녀를 붙잡고 벽 쪽으로 붙었다. 술주정뱅이 두엇이 덜렁덜렁 희완의 등 뒤를 스쳐 지나갔다. 안 그래도 좁은 골목, 북적북적 오가는 사람들이 한둘도 아닌데 여기서 괜히 실랑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한 발 떨어진 희완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안 가는 게 나을 겁니다.”
“살인이라도 저지른 거예요? 뭐 얼마나 죽을죄를 지었다고 다들 그러는지 몰라들, 암튼 성희 언니 술 먹고 개 되기 직전이에요. 희완 오빠 안 가시면 챙길 사람 없고, 나도 언니 감당 못해요. 버리고 갈 거라구요.”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지.
다소 기가 찬 심정이 되어 붙인 속눈썹이 도드라지는 소영의 아기자기한 눈망울을 내려다보던 희완이 쓰고 있던 모자챙을 잡아 아래로 눌렀다.
말 술인 성희가 그리 쉽게 개가 되진 않을뿐더러 단장인 성희를 놓고 갈 만큼 간 큰 단원도 없을 테니 크게 걱정은 안 됐지만 공연 중에 큰 사고가 있었다니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술이 됐을 수도 있고. 생각을 멈춘 희완이 물끄러미 소영을 쳐다보았다. 이 아가씨가 괜히 부풀려 말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소영이 이러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희완이 이내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희 얼굴만 잠깐 확인하고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저에게 장소를 묻고 앞장서는 희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영이 생긋 웃음을 지었다.
“씨발, 술맛 떨어지게.”
들 으라 내뱉은 소리를 못 들은 사람이 없었다. 고깃집에 들어서는 순간 욕설과 함께 터진 소리에 여섯 개의 테이블을 모조리 차지하고 앉았던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희완에게로 향했다. 남극 단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소속 사람들도 모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준우 직속 후배들도 종종 눈에 띄어 내심 당황한 희완이 꾸벅 인사를 하고 성희를 찾는데 뒤따라 들어온 소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 성희 언니 어디 갔어요? 좀 전까지 있었잖아요!”
“황 단장, 고래 편에 보냈다, 저건 왜 끌고 왔어?”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저거래요? 성희 언니 건사할 사람 없을까 걱정돼서 제가 특별히 모셔온 건데!”
“지랄하고, 황단이 얼씨구나 좋다 하겠다.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병풍이냐?”
“어머! 두경 오빠 지금 나한테 욕한 거예요? 아, 충격이야- 다들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서 술자리 마련한 게 누군데 이러시기예요? 저 정말 서운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이, 씨발.”
호 들갑을 떠는 소영을 난처한 얼굴로 쳐다보던 두경이 결국 소주를 나발로 불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틈을 타서 얼른 희완을 잡아 자리에 앉히려던 소영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자신의 팔을 붙은 소영을 가만 밀어낸 희완이 한 발 물러서고 있었다.
“미안하다. 성희 보러 온 거였어.”
“하긴, 단장 깔 노릇하던 놈이 우리 같은 게 눈에 들기나 하겠어?”
이번엔 저쪽에서 터져 나온 빈정거림에 미간을 좁히던 소영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정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나노 마인드에요? 지난 일 가지고 언제까지 그렇게 꽁해 있을 거냐구요, 술자리에서 한번 풀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될 걸 가지고, 안 그래요? 수연 언니?”
술이 올라 있던 수연 대신 답을 한 건 두경의 맞은편에서 오이를 씹고 있던 세준이었다.
“그래, 소영이 말 틀린 거 없다. 앉지 그래? 연희완. 왜- 거기 서서 옛날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토낄 궁리나 하고 있는 거냐? 아님 진짜 우리 같은 것들과는 상종도 못하겠다는 거냐.”
그 뿐 아니라 자리한 대부분의 노골적인 적개심을 맞닥뜨리고 있던 희완이 결국 소영이 비워준 자리에 앉으며 모자를 벗었다. 눌린 머리를 대충 흩뜨리고 세준이 털어 건넨 술잔을 받는데 옆에서 소영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머리가 산발이어도 미남이네요? 어쩜 그렇게 잘생겼어요? 희완 오빠는? 진짜 여럿 울렸겠어요.”
“크 크큭. 존나, 소영이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저 새끼가 저 얼굴로 사람 여럿 울리고 다니기는 했지. 멀쩡하게 생겨갖고 사람 뒤통수나 치고 다니고, 눈물을 뽑아도 저 새끼는 스케일이 남달라서 피눈물 뽑아가며 문 닫은 극단이 한 둘이 아니었지. 쌍놈의 새끼.”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극단이 문을 닫아요? 희완 오빠 때문에요?”
깜 짝 놀란 소영의 질문에도 이번엔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희완은 받은 잔을 물끄러미 쏘아 보고 있을 뿐이고 세준은 술을 따라 주겠다는 희완을 거절한 채 자작을 하고 있었다. 희완이 등장하면서부터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를 한번 돌아보던 소영이 눈동자를 굴리다 희완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말 해 봐요, 오빠. 정말 그런 짓을 한 거예요? 학정 단장님이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말 둘이, 에- 그런 건 아니죠? 이렇게 멀쩡하게 생겨갖고, 왜 소문이란 게 다 부풀려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희완 오빠도 여기서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요. 오해가 있으면 오해도 풀고, 그러는 게 서로들 편하지 않겠어요?”
“오 해? 씹할! 그 딴 게 있었으면 저 잘난 새끼가 잘도 여기서 이러고 있겠다! 학정 단장이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저 새끼 동네 깔창 취급당하는 걸 잘도 보고만 있었겠어! 지은 죄가 있으니 하준우한테 엉덩이 터지게 두들겨 맞고도 입도 뻥긋 못하고 빌빌거리는 거 아냐! 개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니 새끼 아수라장 만들어 놓은 꼴 구경이라도 할 심산 아니고서야! 여기가 어디라고 이 씹 좆같은 새끼 같은 게 기어 들어와서!”
술 자리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테이블을 넘어 희완에게 달려든 두경이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렀다. 저항 한번 않는 희완이 얻어맞고 있는 걸 말릴 생각도 않고 그 주변만 우르르 에워싸고 있는 구경꾼들의 눈길에 묘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희완이 맞는 걸 즐기고 있었고 한편으론 두경의 주먹질에 환호하며 희열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동정하는 이가 없었고, 두경의 일방적인 폭력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그들에게 희완은 맞아도 싼 놈이었고, 그를 향한 폭력은 완벽하게 정당한 것이었다.
그 기묘한 열기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던 소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희완 형!!”
사람들 틈을 비집고 뛰어 든 석주가 거의 눈이 돌아가 있는 두경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떼어 내었다.
“형! 형! 희완 형! 철민아! 승원아! 형! 형! 희완 형! 정신 차려요!!”
동 기들끼리 술 마시러 왔다 희완을 발견하고 식겁하여 뛰어든 석주가 두경을 떨쳐내며 애타게 동기를 이름을 불렀다. 뭣도 모르고 뛰어 들어왔다가 주변에 하늘같은 선배들만 즐비해 있는 걸 보고 쭈뼛쭈뼛 하던 철민과 승완이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희완 형 다 죽어가잖아! 하는 석주의 외침에 얼결에 달려들어 희완을 부축했다. 그제야 하나 둘 싸움을 말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게 두경을 던져주고 희완에게 냅다 달려간 석주가 거의 발광을 하듯이 희완을 불러 제쳤다.
“아, 씨발! 형! 형! 정신 들어요?! 형!”
“이 존만한 새끼들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 개지랄이야! 썩 안 꺼져? 새끼야, 안 비켜??”
“아, 그게- 선배님, 그러니까 석주가, 그게.”
“너 이 새끼들 소속이 어디야! 존나 만만해서 까고 있지? 씨발, 관등성명 안 대?!!”
딱 봐도 학정 소속인 게 분명한 놈들이 까마득한 선배들 판에 끼어들어서 파토를 내놓는 꼴을 보고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던 세준이 흘깃 두경을 돌아보았다.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괘씸한 건 사실이었으나, 학정이 끼어든 이상 뒷일을 생각해서라도 이쯤 해두는 게 이쪽으로써도 좋을 터였다. 그 때 마침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희완이 소매 끝으로 핏물을 닦아내며 석주들을 챙겼다. 그 꼴이 가관이었다.
“미안하다, 소란 피웠다. 너희들도 사죄드려.”
“하지만 형!”
“어서.”
척 봐도 다구리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외려 큰소리 치고 있는 세준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석주가 이를 부드득 갈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술 먹으러 왔다가 졸지에 봉변당한 철민과 승원도 넙죽넙죽 절을 올리면서 흉흉한 분위기의 고깃집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오히려 제가 더 분통을 터트리는 석주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희완이 잠자코 손수건을 받았다. 색이 곱고 무늬가 아기자기 한 것이 본인 것이 아니고 여친이 살뜰하게 챙겨준 모양이었다.
“주경이는 어디 두고.”
“여자들끼리 클럽 간다고 해서 오랜만에…”
머리 식히라고 던진 말에 순순히 답하던 석주가 곧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 렇다고 선배 체면 구겨질까봐 더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는 석주의 머리 위로 오래된 골목길의 전선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절대 풀릴 것 같지 않고 어떻게 꼬여든 건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처럼 편견 없는 석주의 호의가 더 난해하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국밥집 좁은 평상에 앉아 저를 걱정하고 있는 석주와 골목 입구에서 이쪽을 힐금힐금 훔쳐보며 서성이고 있는 철민과 승원을 차례로 본 희완이 곧 손을 내저었다.
“동기들 기다린다, 얼른 가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병원 가봐야죠!”
“그럴 정돈 아니야.”
“거울 봤어요? 그런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요! 형 지금 얼굴이 얼마나….”
막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던 석주가 저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희완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가, 연락할게.”
“형.”
“단장님한테는,”
“말 안 해요.”
“그래, 고맙….”
“그래도 단장님 귀에는 들어갈 거지만요.”
그게 무슨 말인가 하여 올려다봤더니 석주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엄청 화내셨어요. 대본 그렇게 놓고 갔다고. 말은 안하시는데, …하준우 선배 이야기도 들으신 것 같아요. 사무실 문 부숴 놓고 여태 소식이 없으세요. 그래서 오늘도 연습 일찍 끝난… 아, 씨바- 이게 아니라.”
또 다른 데로 새는 제 입을 욕하며 무심코 희완을 보던 석주의 입술이 굳었다.
놀란 것도, 화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희완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긴 것들은 으레 그렇기도 하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놈 마냥 희완을 뒤에 두고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가는 석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멍하니 앉았던 희완의 시선이 들렸다. 언제 쫓아온 건지 소영이 예쁜 얼굴을 기울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피가 많이 나오네요.”
“…….”
“죄송해요, 그렇게까지들 희완 오빠를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희완의 손에 꽉 쥐어만 있는 손수건을 가져가 피를 닦아주는 소영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맡아진다.
“불쌍하게도,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못됐는지 몰라.”
하며 생긋 웃는 그녀의 눈에서 기묘한 열기를 읽어낸 희완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윽고 하하하 소리 내어 웃는 그를 아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면서도 조용히 따라 웃는 소영의 손에서 피 묻은 손수건이 툭 떨어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