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1화 (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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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을 가득 부은 컵라면 하나와 전자레인지로 돌린 삼각 김밥 두 개, 햇반 하나를 가운데 놓고 희완과 가객은 젓가락을 나누어 가졌다.

“얼굴이 스케치북입니다?”

“수묵화 정도로 빠진 것 같습니다만.”

“수채화 흔적이 조금 남은 것도 같습니다만, 여기.”

하며 검지로 희완의 왼쪽 턱 아래를 툭 찍은 가객이 흘긋 올라오는 시선에 머쓱한 듯 다시 젓가락질에 열중했다.

튜 닝을 하고 있는데 불쑥 먹을 걸 들고 온 희완에게 기꺼이 기타 케이스를 식탁으로 내어준 승일은 무턱대고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 희완을 희안하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갖고 노숙은 예사요, 비 맞은 똥강아지처럼 동네를 발발거리며 배회하고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뿐인가, 매일 입고 다니는 옷은 세탁을 하도 많이 해서 눈에 띄는 곳곳이 닳거나 헤어졌고 낡은 운동화도 다른 걸 본 기억이 없다.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하며 이것저것 막일을 해서 음악을 하는 승일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집 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피붙이 하나 없는 천애 고안가 싶다가도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매 맞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또 어디 머리 한 군데가 고장 났나 싶기도 했다. 사정이야 알 바 없어도 모처럼 저렇게 태어난 김에 작정하고 돈 많은 여자 하나 후려 등쳐먹고 다녀도 이 꼴보다는 나을 텐데, 보는 쪽이 다 안타깝다. 아마도 요령이 없거나, 결벽증이거나, 정말 머리가 좀 이상하거나. 셋 중 하나일 터였다.

그 러고 보니 한 몸처럼 메고 다니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어라, 운동화도 입은 옷도 죄다 못 보던 거다. 언뜻 보니 싸구려도 아닌 메이커다. 며칠 안 보이던 사이에 뭔 일이라도 났던 건가. 아님 이제라도 생각 고쳐먹고 그쪽으로 노선을 바꿨던가. 저 인사 찾는다고 나흘 내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예까지 와서 우는 소리 하던 극단 똘마니들을 떠올리던 승일은 참 희안도 하지, 했다.

이쪽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이쪽에서는 못 챙겨줘서 안달이고.

대 학로가 텃밭도 아니었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독고다이로 기타 줄 튕기고 다니는 입장이라 풍문에 문외한인 승일은 그나저나 뒤늦게 통성명한 이름 참 놀려먹고 싶게 생겼네 했다. 희안한 희완이, 수완 나쁜 희완이, 좌완 희완, 우완 희완……. 줄줄줄 랩이라도 하듯이 라임까지 붙여가며 중얼거리던 승일이 하나 남은 삼각 김밥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거 내가 해치웁니다.”

사 실 식사 내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희완 덕에 케이스 위에 깔아 놓은 것들을 다 먹어 치운 것도 승일이었다. 젓가락을 손에 쥔 채 딴 생각에 빠져 있던 희완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람 앞에 두고 저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걸 보니 영 몰염치한 인간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거나 밥 거하게 얻어먹은 처지에 입 싹 닦기도 그래서 승일이 등에 맨 기타를 앞으로 넘기며 퉁퉁, 가볍게 줄을 튕겼다.

“신청곡이라도?”

“…아무거나, 며칠째 음악을 못 들었습니다.”

하며 웃는 얼굴이 아닌 게 아니라 반쪽이었다.

이 달 치 채무가 모두 변제 되어 있었다. 확인해 보니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절 로 제 위에서 흔들리던 남자의 어둔 얼굴이 떠올랐다. 나흘 치를 한 번에 지불해 준 것인가. 그렇지만 나흘에 이틀은 계속 잠들어 있었는데, 나머지 이틀도 특별히 잘 하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아직 반이 넘게 남은 한 달 채무를 모조리 죄 갚아 주었다. 혼몽 중에도 만족시켜 주지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선뜩해지기도 여러 번이었는데 착각이었던가. 그래도 지나치게 많다.

목덜미를 스치는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희완이 한적한 골목길을 꺾어 돌았다.

깊 은 잠에 깨어 있을 때 희완은 혼자였다. 머리맡에 누군가 준비해 놓은 옷 한 벌과 핸드폰이 가지런히 포개어 놓여 있었다. 모두 새 것이었고 메모 한 장 남겨 있지 않았다. 섹스 외에는 용무가 없다는 남자의 분명한 태도가 희완은 오히려 편했다. 그가 저를 찾지 않을까 매 순간을 걱정하면서도, 참 이중적인 감정이었다.

“어이! 똥개 새끼!”

노천카페에 나와 있던 성희가 커피를 들이 부으며 희완을 불렀다.

“또 예전처럼 줄행랑이라도 친 줄 알았더니 멀쩡하게 살아 있네.”

“아아, …밤샘?”

“주연 갈아치웠거든.”

공연 중에 그런 일이 흔치 않은데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내색 않는 희완이 여 와서 앉으라는 성희의 손짓에 얌전히 난간을 타고 넘어 의자에 앉았다.

“몸 날렵하네.”

“뭐,”

“한바탕 했었다며?”

그제야 커피 잔을 붙든 성희의 빨간 손등을 발견한 희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기다린 거야?”

“미쳤냐, 뭐가 예쁘다고.”

인상을 팍 쓰는 성희를 빤히 보던 희완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 껴, 안으로 들어가든지. 춥다, 감기 걸려. 몸 생각해야지.”

한번 의심도 않고 순순히 납득하며 오히려 제가 할 소릴 연달아 잘도 뱉어내는 희완을 기가 차다는 눈길로 쳐다보던 성희가 손을 들어 희완의 어깨를 퍽 쳤다.

“이 등신아.”

“왜에,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혹 또 제가 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나 싶어 잠시 걱정스런 얼굴을 하던 희완이 또 한 대 호되게 얻어맞았다.

“미안하게 됐다. 내 책임이야, 그날 소영이 년 부른 것도 나고, 너 다구리 당하는 현장에 있던 놈들 죄다 내 후배들이다.”

아, 성희가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희완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분명한 건 성희가 결코 이럴 일이 아니라는 거다.

“날 때린 건 두경이 하나였어. 두경이는 그럴 만 했고.”

“그래, 그럴 만 했겠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닌데.”

갑자기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희완을 보던 성희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빌어먹을 자식이다.

“때린 놈보다 더 드러운 놈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구경만 하던 새끼들이야. 내 새끼들이 바로 그런 새끼들이었다고. 고맙다 연희완, 덕분에 애들 교육 잘못 시킨 거 아주 잘 알게 됐거든.”

“그러지 마, 성희야. 황 단장, 미안하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어. 너도 그렇고. 잘 알잖아. 아니, 미안, 미안. 할 말이 없다.”

“내 가 제일 열 받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네 그런 태도야.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척 바로 그 이중적인 태도. 너 때문에 줄줄이 병원 실려 간 놈이 몇이고, 문 닫은 극단이 몇이야. 소문 더럽게 돌아서 한동안 투자도 제대로 못 받고 찬바람 쌩쌩 불던 게 10년이야, 20년이야. 고작 5년이야.

왜 돌아 왔냐 이 새끼야. 너 오면 사람들이 두 팔 벌려 환영이라도 해 줄줄 알았어? 너 이 새끼 만나기만 하면 갈아 버리겠다고 벼르던 사람이 한둘이었는 줄 알아? 왜- 뒤늦게 사죄라도 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렇게 등신 같이 맞고 다니기라도 하면 다 용서 받고 예전처럼 너 떠받들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냐고! 이기적인 새끼. 그 딴 식으로 굴어 너 하나 속편해지면 다야? 영문도 모르고 니 새끼 때문에 밥줄 끊기고 명줄 끊기고 등신 된 우린 또 뭔 죄를 지어서 너 새끼 다구리 먹이는 씨발놈들이 되어야 하는데!

이 등신아, 그냥 서로 잊고 살았으면 다 좋았잖아. 이제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차라리 변명을 해. 아니라고, 오해라고 비굴하게 매달리기라도 하면 최소한 널 불쌍하게 여기거나 그 개 같았던 일 납득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냐.”

모르니까 더 악에 받치고 분통 터트리고 치를 떨게 되는 것이다.

어디 이 바닥에 그 개 같은 소문을 찰떡같이 믿는 사람들만 있었을까.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이쪽에서 백 마디를 해도, 단 한 번 입을 여는 적이 없는 희완을 염증 섞인 눈으로 노려보던 성희가 커피 뚜껑을 열고 꿀꺽꿀꺽 통째로 들이마셨다.

“학정 단장이 너 찾더라.”

제일 크게 당하고서도 끝까지 미련 떠느라 벼랑 끝까지 떠밀렸던 학정은 그대로였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너 그 인간한테 더 잘못하면 안 된다.”

무대 위에서 개처럼 끌어내려진 희완이 사라지고 얼마 후 소문이 돌았다.

깡 패 깔 노릇하다 등 쳐 먹고 튀었다는 내용이 소문의 골자였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스러운 소문은 평소라면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었겠지만, 무대에서 개처럼 얻어 막고 끌어내려지던 희완을 모두가 목격한 참이었다. 소문은 날개를 달았고 그 의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대학로를 제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업자들의 출현이었다.

희 완과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곳이라면 무작정 쳐 들어가 간판을 때려 부수고 극렬하게 저항하는 단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때때로 무대 위에 난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행패를 부렸다. 신고가 들어가면 다음날 더 큰 보복으로 본보기를 보이기 때문에 후에는 누구도 공권력에 문제 해결을 호소하지 않았다. 때리면 맞고 윽박지르면 빌고 위협하면 개처럼 기기도 했다. 굴욕적이었다. 바리케이트 없는 폭력에 굴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간판을 꺾고 대학로를 떠나거나 병원 신세 지기를 반복했다. 그나마도 투자가 끊겨 그 시기에 살아남은 극단이 얼마 되지 않았다.

희 완은 개새끼였 다.

희 완을 향한 악의적인 소문의 출처는 업자들의 가벼운 입이었지만 누구도 두둔하지 않았다. 비상식적인 폭력 앞에 노출된 사람들의 사고는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기 마련이고 희완의 평판은 똥통에 처박힌지 오래였다. 진짜 사정 따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비겁하게 도망쳐 버렸고 결과적으로 그 책임을 동료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폭력의 굴레를 씌웠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지독한 패배감에 빠져들게 했다. 사람 취급 못 받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희완은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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