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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달빛-14화 (1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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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 지하철 입구를 서성이다 계단을 올랐다. 평일 오전 시간대라 유동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끌벅적하고 부푼 듯한 공기는 여전했다. 폐 속 깊이 빨려드는 차가운 공기에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도 같았다. 야구 모자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방향을 가늠하다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서는 희완이 허전한 어깨를 매만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일시에 밀려 들어와 가볍게 머리를 뒤흔든 희완이 입술을 모았다. 휘파람을 불었다. 입술이 얼어 잘 나오지 않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나오는 대로 불었다. 그러다 얼얼한 입술을 눌러본다.

깨 물어, 열면, 애무하듯 혀로 핥아오던 남자의 뜨거운 살덩이가 기습적으로 되살아나 어안이 벙벙해졌다. 빨개진 귓불을 의식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희완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 너무 오래 했던 거다. 아니야, 뜨거워서 그랬어. 그 감촉이 너무,

그 자리에 주저앉듯 웅크린 희완이 머리를 쥐어뜯듯이 후드를 뜯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밝 은 대낮에 지난밤의 정사 장면 따위나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가 음란하고 뻔뻔스럽게 여겨져 당황스러웠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남자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몸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결론을 내린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문지르고는 무릎을 폈다. 흘긋, 길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는 희완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을 피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귀는 아직도 뜨거웠다.

“…….”

모퉁이를 돌아서던 희완이 뒷걸음질을 쳤다. 버스정류장 중앙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포스터를 바라보는 눈빛이 기이했다. 놀라움과 반가움, 열기와 갈망, 그리고 충격과 의문이 차례대로 희완의 검은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연 도우진 / 각본 도우진

우두커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참 포스터에 박힌 유명 배우의 옆얼굴과 흰색 정자체를 쳐다보던 희완의 몸이 뒤로 잡아 당겨졌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희완의 후드를 벗기듯이 잡아당긴 학정이 서 있었다.

“학정 형… 다, 단장님.”

“이런 거 뒤집어쓰고 다니지 말랬잖냐.”

시 야가 좁아져 사고 나기 십상이라고 떡 진 머리 가리개를 한 때 유행 물타기 용으로 변질시켜 폼생폼사를 외치던 단원들에게 당장 벗지 못하겠느냐고 잔소리를 하고 다니던 학정이었다. 후드 뒤집어쓰고 죽은 귀신 붙었냐고, 놀림 당하기도 했었는데 여전한 모양이었다.

“밥 먹었냐.”

“…네, 단장님은요?”

“커피나 한 잔 하자.”

포스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장 선 학정이 향한 곳은 근처 편의점이었다.

천 원짜리 커피 두 개를 사다 뜨거운 물까지 손수 부어 휘휘 저어준 학정이 황망한 기색으로 선 희완에게 내밀었다. 일회용 커피 치고 그윽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게 제일 낫더라.”

커피 취향이 까다롭지 않은 학정은 100원짜리 커피도 맛있게 먹었지만 이 말은 사실이었다. 주머니 가벼운 희완도 가끔씩 커피가 당길 때 끼니 대신으로 한 두 번씩 즐길 만큼 가격대비 맛이 훌륭했다.

“춥냐?”

훈기가 도는 실내에서도 잠바 지퍼를 내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지 묻는 말에 고개를 저으려던 희완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를 생각하자 절로 귀가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볼 면목이 없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대 수롭잖게 한마디 하며 커피를 홀짝이는 학정이 간이 테이블 너머 유리벽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추위에 움츠린 사람들이 옷깃에 바람들 새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차갑게 식었던 손을 녹이는 커피 컵을 쥐고 물끄러미 유리 밖을 응시하는 희완의 속눈썹 아래로 긴 음영이 졌다.

달 이 기운 늦은 새벽, 긴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면서 희완에겐 다른 주전부리나 커피를 안기곤 했었다. 모처럼 그런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선 함부로 홀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목 관리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흡연가인 걸 알면서도 그 무렵엔 그랬었다. 그럼 우진은 유난하다며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곤 희완의 입에 제가 피던 담배를 물려주곤 했었다. 희완은 숨 넘어 가듯이 웃고.

“다음 주부터 심심찮게 눈에 보일 거다.”

포스터를 보고 있던 것을 본 것이다. 거기서 희완을 발견하고, 우진의 그림자를 보고, 학정은 사소한 것을 걱정했다.

“작품이….”

“우진의 것이지.”

동의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우진의 것이었지만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국 내 창작극으로썬 이례적으로 그 해 모든 상을 휩쓸며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이루었고 그 중심에 선 도우진은 연기파 배우로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스크린에 데뷔했다. 대스타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극단 학정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올려 졌고 각본가 역시 도우진 단독으로만 올려졌다. 그 작품이 재공연 되는 것이었다.

“극단에 들러.”

여러 가지 이유로 학정에 들른 지도 오래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드나들어도 희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짜식들이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선 뜻 답을 않는 희완의 눈치를 슬쩍 살피던 학정이 성가시다는 듯 한마디 덧붙인다. 학정이 있어 눈에 띄게 배척하지 않을 뿐 극단에서도 희완을 반기는 사람은 석주와 주경이 전부였다. 가끔 부단장이 학정 대신 열쇠꾸러미를 던져주거나 먹다 남은 주전부리를 던져주기도 했지만 학정에서도 희완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학 정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희완은 추측하려 하지 않았다. 새삼스레 저를 전처럼 대하려는 그의 마음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국밥집에서의 애걸은 구차하고 이기적이었다. 결국 학정에게조차 아무 것도 털어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라서 더 털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들러.”

한 참 주머니에서 뭉기적 대던 것을 꺼내 놓는 학정이 후르륵 물마시듯 커피를 마셨다. 극단 열쇠였다. 표면이 반질반질 한 것이 새로 맞춘 티가 났다. 희완의 몫으로 여분의 열쇠를 만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학정이었다. 한번 불이 당겨지면 결코 꺼지지 않을 미련과 정을 쏟아 붓는 것이다.

“저 아무 말씀도 못 드립니다.”

“됐다.”

“단장님한테 좋은 소리 못 드립니다.”

본격적으로 희완이 드나들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학정이 듣게 될 소리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아니라고 했었지.”

“…….”

“나한텐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희완은 그가 내민 열쇠를 받아 들었다. 어차피 학정의 묵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나마 희완이 이곳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조차 없을 터였다.

“잘못했습니다.”

희완이 극단 학정을 나와 하준우에게로 가겠노라 하였을 때도 학정은 같은 얼굴을 했었다.

결심한 거냐, 마음 바뀔 일 없는 거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그 만이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은 단 하나도 던지지 않고 아무 원망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알겠다, 했다. 도우진을 보냈을 때도 그리 했으리라.

“여기 계속 붙어 있을 생각이라면.”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희완의 얼굴을 빤히 보다 툭 건드려 모자를 뒤로 넘긴다.

“터지지 마라, 우습게 보이지도 말고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다니지도 마.”

변명을 할 생각도 없다면 차라리 뻔뻔스럽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게 다른 녀석들에게도 죄를 덜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희완이 그럴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하지 않는 학정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한 녀석을 떠올렸다.

닮 은 게 많은 놈들이었다. 재능이 있었고 재주가 많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도 위험할 정도로 넘치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그 빛깔은 현재 그 둘의 현실만큼이나 극명하게 명과 암이 갈렸다. 치명적인 스캔들에 타격을 받고도 재기할 역량을 갖춘 도우진과 시작도 제대로 못 해보고 진창으로 끌어내려져 익사 중인 연희완은 학정의 영적 자산이었다. 페르소나였고 불길 같은 열정의 산물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담배 한 갑을 산 학정이 초콜릿 바 하나를 희완의 입에 물려주곤 먼저 편의점을 나섰다. 습관처럼 후드를 뒤집어쓰려다 관둔 희완도 곧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입 안이 무척 달았다.

하 준우는 영입 비용과 10회 출연료로 기꺼이 7천만원을 지불했다. 당시 학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력이 뛰어났던 해우는 한참 인맥과 금맥으로 배우와 각본가들을 끌어들이는 참이었고 희완 역시 그가 주는 돈을 받고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업 자들이 벌였던 무대 위에서의 난장은 공교롭게도 해우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고 성공적인 개막을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트렸던 하준우는 연이은 투자 중단과 손해배상 청구에 한차례 곤욕을 치렀었다. 그 사건을 시발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재들을 끌고 가 인식이 좋지 않았던 해우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배우를 지키지 못한 해우에 대한 비난은 차츰 소문이 돌면서 희완 개인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고 결국 다른 공연에서 소위 대박이 터짐과 동시에 해우는 기사회생했고 희완은 매장되었다.

그 무렵 희완은 학정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가며 얻어낸 돈마저 매형의 하룻밤 도박 빚으로 날린 걸 알고 절망할 새도 없이 업자들에게 끌려가 무섭게 얻어터지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져 개똥만도 못하게 되기까지는 단 열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랜 만에 뵙는 것 같네요? 또 토낀 거라고 이번엔 누구 뒤통수에 불난 건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구 난리던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학 정 근처 벤치에 앉아 낡은 건물을 올려보던 희완이 시선을 내렸다. 늘 그렇듯 귀여운 외모를 더욱 예쁘게 꾸민 소영이 따뜻한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내밀고 있었다. 살짝 들었던 모자챙을 내리고 눈인사를 대신한 희완이 사양했다. 무엇이든 넣고 싶지 않았다. 입 안은 아직도 달았다.

“안마시면 버려요.”

생 긋 웃으며 하는 말에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보던 희완이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럴 거 왜 튕기냐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소영이 그 옆에 살포시 앉았다. 날이 많이 추운지 코끝이 빨간데도 짧은 치마에 높은 하이힐을 신은 소영은 얇은 코트 한 장 뿐이었다.

“저는 저번 그 일로 많이 화나셨나 해서, 걱정했었어요. 얘기 들어보니 몇 바늘 꿰맸다던데 괜찮으세요?”

하며 커피 컵을 들지 않은 손으로 희완의 모자를 확 잡아채려 하기에 훌쩍 몸을 뺀 희완이 간결하게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

“갈 데도 없잖아요.”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는 여자였다.

“참 염치도 없어요, 오빠는- 나 같으면 정말 미안해서라도 학정 단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텐데. 어쩜 그렇게 뻔뻔해요? 얼굴 잘 생겼다고 대우만 받고 살아와서 사실 그런 건 잘 모르는 거죠? 원래 떠받들어지기만 한 사람들은 남 사정 같은 거 잘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잖아요.”

“소영 씨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어 머, 오해하지 말아요. 전 그런 사람 좋아해요. 알아보니까 오빤 정말 얼굴 밖에 가진 게 없던데, 보통 그런 사람들은 엄청 비굴하거나 비열하거나 멍청하거나 그런데 오빤 아니잖아요. 그리고 관여할 일이 아니라니요. 내가 여기 돌아다니면서 그쪽 사람들한테 쓰고 다닌 게 얼만데요. 그런 말 하면 안되죠.”

꿈과 열정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금전관계에 있어선 항상 을인 사람들이다. 그런 약점을 이용해 돈다발 뿌리면서 대접 받고 행세깨나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좀 더 발전하면 스폰서가 되는 것이다.

“대관비 없는 극장이라도 한 채 지어주셨습니까. 배곯지 않을 극단이라도 하나 꾸려주셨습니까. 아니면 돈 없어 사장될 좋은 작품 하나라도 구하신 겁니까.”

“와 우, 그 정도는 해줘야 듣기 좋은 꽃노래라도 한 곡 들을 수 있는 건가 보죠? 아니던데, 밥 한 끼, 술 한 잔, 립 서비스 한 마디에도 샐샐 거리며 스스로 꺾어 넘어오는 꽃들이 한 둘이 아니던데요. 그건 다 내 착각이었나 봐요?”

“그만하십시오. 여긴 소영 씨가 우습게 볼 곳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희롱하며 놀 곳도 못 됩니다.”

“희완 오빨 조롱하는 건 상관 없나보죠? 왜 변호를 안 해요?”

말이 없는 희완을 유심히 살펴보던 소영이 피식 웃었다.

“정말 더럽게 순정적이네요. 그 마음을 여기 사람들이 알아줘야 말인데요. 제가 다 안타깝네요.”

마시던 커피를 벤치 옆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소영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성큼 희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단 한 번 입도 대지 않은 희완의 커피도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남의 호의를 호의로 잘 못 받아들이는 건 피해의식, 맞죠?”

불 쾌하기라도 한 건지 한 번 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놓지 못하게 되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소영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얼굴이 굉장히 맘에 들었었다. 주제에 꽤나 신사적이어서 이 정도까지 모욕을 당하고서도 몇 번 안면이 없는 여자에겐 섣불리 험한 소리도 못하는 성격도, 제법 이상적이었다.

가 슴이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까이 붙은 소영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였다. 소영의 경험으로 사회, 특히 이 바닥에서 이 정도 외모는 거의 천부적인 재능에 가까웠다. 허나 희완은 동네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적대적인 성희의 평론이 흥미를 끌었고 계획적으로 마련한 술자리에서 보여준 그들의 엄청난 추태는 정말 깔깔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유쾌했다. 희완이 정말 여기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비굴했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정말 영악한 것 같다가도 바보처럼 순진하다니까 이 바닥 사람들은.”

희 완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로 물러서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입술이 거의 지척에 닿으려는 찰나 걸음을 물린 희완의 잠바 지퍼를 잡아챈 소영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확 끌어내렸다. 지익- 옷이 거의 찢어지는 소리에 희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어 머, 조폭 깔이라는 소문 따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스폰서가 있긴 있나 봐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멀쩡한 구석은 한 군데도 없구, 누가 보면 짐승이 물어 놓은 줄 알겠어요. 설마, 조폭은 아니죠? 그거, 고정이에요?”

얼 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쓰레기 같은 말들을 신이 나 늘어놓는 소영을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희완이 허리까지 내려간 지퍼를 다시 올렸다. 남자의 흔적으로 뒤덮인 목덜미가 가려졌다. 예상과는 달리 멀쩡한 지퍼를 올리는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화 낼 거 없어요. 그 지경에 스폰서 없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조폭 깔이니 돈 들고 튀었다느니, 죄다 헛소리고. 사채 맞죠? 업자들이 그 난리를 피웠을 정도면 한두 푼도 아니었을 테고, 지금도 갚고 있을 건데 변변한 일자리 하나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무슨 재주로 돈을 벌겠어요? 이해해요. 나도 많이 해줬는데, 뭐. 희완 오빤 뒤가 좋아요, 앞이 좋아요? 뒤, 맞죠?”

동 그랗게 뜬 눈에 붙은 인조 속눈썹이 의아하다는 듯이 깜박여졌다. 마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눈을 노려보던 희완은 그만 탁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더는 저 자그마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줄 수가 없어 손바닥으로 소영의 입을 꽉 틀어막았던 희완이 멀찌감치 떨어졌다.

화 장이 번지는 걸 걱정이라도 하는지 호들갑스럽게 짓눌렸던 입가를 매만지는 그녀를 멍청하게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뒷골이 뜨끈해질 정도로 경박하고 상스러운 소리는 사실 적나라할 뿐, 희완의 처지와 틀린 게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뜨끔한 거다. 찔리니까 화가 나고 듣기 싫은 거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모욕적이지도 않았으리라.

“오빠 진짜 잘 생긴 거 알아요?”

자조적으로 웃는 희완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던 소영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꿈을 꾸듯 몽롱했고 갈증 내듯 욕망에 젖어 있었다.

“돈 줄게요. 나랑 놀아요.”

벌써부터 희락에 젖은 듯 기이한 빛을 내는 소영의 눈을 본 희완은 그 자조적인 웃음마저 거뒀다.

“한 달 화대가 천육백입니다. 십년 동안 꾸준히 지불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놀아드리죠.”

이채를 띠며 빠르게 떨리는 소영의 눈을 보고 그녀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희완은 더 놀랄 여력도 없었다.

야 구 모자에 후드를 푹 눌러쓰고 돌아섰다. 소영의 말 대로 갈 데가 마땅치 않았지만 지금 이 기분으로 학정에 들를 수는 없었다. 이 기분이 어떤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몇 번 본 적 없는 저 아가씨까지 저를 일개 남창 취급하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모욕적이라 곤혹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어설프게 망가진 게 문제인 것 같다. 놔 버려야 할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이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이만큼 버리는 데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어디까지 더 버려야 진정 바닥인지, 희완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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