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7화 (17/123)

17

도둑이 들어 돈 될 만한 것은 죄다 쓸어 갔다.

오 랜만에 들른 희완을 반기던 석주는 휑한 연습실을 둘러보는 눈길에 난감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횡설수설만 해댔다. 희완이 눈치 보여 못 오는가 하고 매일 밤 극단 문을 열어 놓고 갔는데 어떤 씨부럴 놈이 기어 들어와 쓸 만 한 것은 죄다 쓸어 갔다. 남은 것이라곤 돈도 안 되는 역대 단원들 사진하고 어디 내 보이기도 쪽팔린 악필로 휘갈겨 쓴 단훈 뿐이었다.

이 일로 단수 높은 단원 몇과 단장 간에 설전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 낀 부단장이 누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을 한 대 맞고 바닥을 굴렀다. 운 좋게도 다른 데 부러진 곳 없이 코피만 펑펑 났는데 엄살이 심한 부단장 업고 병원으로 뛰느라 그 싸움은 싱겁게 쫑이 났다.

다 른 극단처럼 대놓고 희완을 못 살게 굴지는 않아도 대다수, 특히 단수 높은 단원들은 희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랫놈들은 당연히 윗 분위기 따라가기 마련이고 학정의 눈치를 보느라 다들 데면데면 하는 사이 하준우 사건이 불거지면서 쌓였던 불만이 위에서부터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중간에 낀 석주와 주경도 편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일방적으로 희완에게 그러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 단원도 아니었고 직접 그 일을 겪지 않았기에 느끼는 체감온도가 선배들과는 다를 게 분명하고 주제넘은 참견이었지만 뭘 잘 모르는 그들이 보기에 희완은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 리고 석주는, 국밥집 앞에서의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새 이어진 술자리에 늦어진 귀가를 포기하고 연습실에서 대충 궁둥이 부비고 갈 생각으로 들렀던 석주는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발발발 떨던 희완을 뚜렷이 기억했다. 제정신이 아니었고 당황해서 책상 밑을 들여다보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석주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희게 뜬 얼굴은 온통 겁에 질려 있기만 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희완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던 석주는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면 되었지 않았나, 저 정도로 망가진 사람한테 잘못을 묻는 건 더 못할 짓이 아닌가.

쪽팔리게 뒤통수 쳐 맞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다 갖다 바칠 생각이냐 윽박지르는 선배들과 대립하는 학정을 보았다.

그 러게 누가 돌아 오랬느냐고, 그런 대가는 거저 줘도 안 먹는다고,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데 뻔뻔스럽게 돌아와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걸 보면 속이 뒤집힌다고, 무얼 증명하고 싶고 무어가 아쉬워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이쪽으로는 발도 대지 않는 게 정상인 거라고. 씨발, 그것만으로도 복장이 터지는데 딴 놈들한테 까이고 다니는 것까지 보고 있자니 눈이 뒤집히는 것 같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동기들에게,

학 정은 눈과 귀가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놈들이라고, 그렇게 아니꼬우면 니 놈들 중 단 한 놈들이라도 그 자식 멱살 붙잡고 왜 돌아왔느냐고 니 자식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긴 아느냐고 직접 따지기라도 한 놈들 있었느냐고, 치대고 까이고 손가락질 당하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나서서 질질 끌고 가 대학로 밖으로 내동댕이치면서 꺼지라고, 다신 발도 붙이지 말라 소리칠 생각이라도 한 놈이 여기 있느냐고, 괴롭힘 당하고 모욕당하고 조롱당하는 걸 뒤에서 보면서 고소해하고 통쾌해하며 즐기던 놈들이 왜 이제와 꼴도 보기 싫은 척 하느냐고. 잘못을 폭력으로 묻는 놈들만도 못한 놈들이 바로 니 놈 새끼들이라는 학정에게 주먹이 날라 갔다.

그리고 그 주먹은 불행히도 타이밍 좋게 그 사이에 낀 부단장이 얻어맞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것이다.

“네? 형 뭐라고 하셨어요?”

“…도둑 든 날이 언제였냐고.”

“아, 며칠 전이었어요. 수요일.”

열쇠를 건네주기 전 날이었다.

제가 달리 덧붙인 말도 없는데 그것만으로도 일련의 사정을 눈치 챈 듯한 희완을 본 석주가 당황해했다.

“혀, 형?”

“어, 미안. 이거 돌려주려고 왔는데, 그럼 지금 아무도 안 계시는 거냐.”

“네. 다들 병원 갔다가 아마 소줏집….”

병 원이란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희완을 보고 또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석주가 뭍 만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손에 든 열쇠를 불안하게 쥐다 펴던 희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좁히다 곧 석주의 손에 열쇠를 안겨 주었다.

“단장님께 전해 드려. 아니,”

또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다 석주에게서 도로 열쇠를 받아간다.

“내가 직접 전해드리는 게 맞는 것 같다. 미안하다.”

“형, 잠은 좀 잤어요?”

“응? 어, 당연하지. 그런 건 왜 물어.”

“아뇨, 좀 정신이 없어 보여서요. 지금 시간이 열한시 좀 못 됐으니까, 소줏집 가면 선배님들이랑 단장 형 같이 계실 거예요. 저는 남극에 들렀다 가야해서요. 형 먼저 가 계세요.”

“어, 아니. 나중에 다시 올게. 단장님께는 말씀 드리지 말고.”

“네? 왜- 아, 네. 알겠어요. 형, 그럼-,”

또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선 희완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석주가 뒤늦게 제 이마를 쳤다. 단장 형이 돌려준 치료비를 아직도 못 돌려줬다. 맨날 줘야지, 줘야지, 벼르고 있던 주제에 희완을 보고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제 머리를 쿵쿵 쥐어박으며 뒤늦게 쫓아 내려가보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희완을 못 찾은 석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빛도 안 좋고, 내내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영 희완이 이상했던 탓이었다.

소줏집에 들어선 성희는 학정 단원들을 보자마자 낭패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먼저 안으로 들어선 차라 그제라도 장소를 바꿀 생각으로 돌아서 나가려던 성희의 등을 떠밀고 하준우가 들어섰다.

“여어, 여전하구만, 여긴. 이십년간 똑같은 인테리어 하고는,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아무리 능력 없는 놈들 떠안고 자선사업 하느라 허리가 휜다지만 테이블 한 번 안 갈아치운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쥐뿔, 내놓은 거 하나 없는 놈이 입만 나불거리긴, 불만이면 딴 데로 꺼지든가.”

“하하, 뭐 여기 맛 보고 즐기러 오는 겁니까, 오랜만에 옛날 향수나 느끼러 오는 거지. 안 그러냐, 김학정? 오랜만이다?”

자리에 앉으라고도 안 했는데 의자를 끌어다 학정의 맞은편에 앉은 하준우가 콧등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경성을 보고 피식 웃었다.

“쌈꾼 나셨고만, 깡패집단으로 전향이라도 한 거냐?”

“술 마시러 왔으면 얌전히 술만 처먹고 꺼져라 하준우.”

학정 대신 대꾸를 한 건 경성의 코피를 터트린 필영이었다.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에 뒤집혀 있는 술잔을 바로 세우던 하준우가 힐긋 시선을 들었다. 극단 꽃을 두 번이나 꺾어 훔쳐간 놈한테 감정이 좋을 리 없는 단원들을 가만 둘러보고는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좀 생이 같은 놈들, 아직도 옛날 일 가지고 꽁해 있는 거냐? 하긴 나 같아도 쪽 팔려서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었을 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애지중지 키운 놈들한테 돈 없다고 뻥 까인 놈들이니. 허, 이제 보니 면상 두꺼운 게 그 집안 내력인 건 확실하고만.”

“옛 날 일 못 잊어서 똘마니들 시켜 애 죽어라 좆 깐 것으로도 모자라 손수 몽둥이찜질까지 하신 분이 할 소린 아니지 않냐, 하, 기획이사님? 여어, 박성희, 공연은 잘 돼 가냐? 동문이 좋긴 좋아,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씨바, 소줏집 남은 자리가 여기뿐이냐?”

인사는 대충 됐으니 일 커지기 전에 저 잘난 놈 데리고 제발 좀 꺼져주라는 경성의 간절한 시선에 좆 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성희가 줄줄이 딸려온 해우와 남극 단원들을 앉혀 놓은 곳으로 하준우를 끌고 가려 했을 때였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하준우가 싱긋 웃으며 학정을 노려보았다.

“암, 동문 참 좋지. 덕분에 도우진이 금덩이 얼싸 안고 우리 극단으로 행차하신단다. 참으로 눈물겨운 형제애지 않냐? 연희완이 새끼가 까먹은 걸 만회하겠다고 도우진이 그 잘난 기획사 걷어차고 우리 극단으로 몸소 행차하신단 게. 하자 있는 물건이지만 도우진이 들고 오는 건 다르지. 몇 년 품에 끼고 싸면 뭐해, 알 까고 나오는 건 다른 놈 품속인데. 하여간, 잘 먹겠다. 김학정. 알이고, 도우진이고, 아주 잘 먹고 잘 까서 잘 싸지르마.”

병신.

낮게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필영이 발끈하여 튀어 나가려는 걸 경성이 붙잡았다.

학 정에서 들고 간 작품을 하준우가 운영하는 제작사와 해우를 통해 재공연 하기로 한 사실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소식이었다. 여기서 발끈 해봐야 우스워지는 건 학정뿐이었다. 씨부럴, 저주 받았다니까. 니미, 학정이고, 김학정이고. 걸쭉하게 욕을 뱉는 경성이 꿀떡꿀떡 병나발을 불었다.

학 정 이 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꾹 붙이고 뭐하나 봤더니 잠이라도 자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술잔만 붙들고 있었다. 에라이, 웬수 같은 놈. 하준우 저 새끼 말도 하나 틀린 게 없지. 등신도 이 상등신.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다.

“도 우진이 과연 쓸 만할까요? 얼마 전에 보니까 완전 폐인이 따로 없다던데. 명배우도 옛말이지, 저번에 엎어진 영화는 도우진 때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촬영장에 술인지 마약인지에 쩔어 갖고 와서는 상대 배우한테 시비 걸고 감독한테 시비 걸고, 하다못해 여주한테까지 추태 부려 거기 스폰이 열 받아서 엎은 거라잖아요. 끈 떨어진 도우진이 별 수 있나, 여주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는 데도 결국 영화 엎어지고, 도우진만 쏙 빼고 다른 타이틀로 같은 시나리오 찍고 있다잖아요. 도우진이 우리 무대에서도 깽판 치면 어떡합니까?”

“씨 바, 말 안 듣는 개새끼한텐 매가 약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하준우 선배님? 연희완이 아주 무릎 꿇고 난리도 아니었다면서요? 크크큭, 쌍판데기 하나 믿고 까불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 놈 싹수 노랬던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잖습니까, 술자리에서 그렇게 기깔 나게 놀았다면서요? 아주 그놈 재롱에 눈이 멀어가지고 저놈이고 쌍놈이고 죄다 뒷구멍에 금덩이 꽂아 주고 싶어 안달났다던데, 하긴, 깡패 새끼 깔은 아무나 합니까? 그 새끼 무대 위에서 허리 돌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씨바, 그 새끼 때문에 쳐 맞은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 아니랍니까! 그 때마다 무대 위에서 미친년처럼 쥐어 터지던 걸 떠올려야 속이 풀린다 이 말입니다. 그 치들도 잘못했어요. 그 정도 쌍짓을 했으면 아주 홀딱 벗겨 놓고 팼어야 했는데, 애꿎은 우리 같은 놈들한테 화풀이 할 게 아니라 그 새끼 잡아다가 갈짓자로 찢어 놨어야,”

“연희완이 갈짓자는 룸에서 여러 번 찢어 졌었지.”

“에? 정말입니까, 하 선배님?”

“그 럼 뻥이겠냐, 돈 준다니까 입이 헤 벌어져선, 아주 걸레도 그런 상 걸레가 따로 없었지. 그런 걸 그 돈 주고 데려왔다는 걸 그 때 처음 후회했다니까. 하긴 연희완이 데려 왔을 땐 힘 하나 안 들었지. 돈 준다니까 두 번 생각 않고 쫄래쫄래 따라왔었지. 돈에 환장한 건 도우진이나 연희완이나 도진개진이었고, 몸 더러운 건 막상막하였을 걸? 새끼들아 생각을 해봐라, 연희완이 저렇게 멀쩡히 돌아온 게 요행이었겠냐? 깡패 새끼 훔친 돈을 뭘로 갚고 있겠어, 그 새끼 가진 게 그 잘난 몸뚱이 말고 또 뭐가 있어서, 천직이지. 새끼, 연극판으로 올게 아니라 처음부터 화류계로 나갔어야 여러 사람 피안 보고-,”

“씹새끼, 입에 걸레 물었냐.”

듣 다 못한 필영이 하준우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르려 했을 때였다. 테이블을 타고 뛰어 뜬 학정이 먼저 하준우의 턱을 갈기고 엎어져 또 주먹을 날렸다. 부릅뜬 눈으로 입을 굳게 닫고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해 경황이 없는 하준우를 죽어라 갈기던 학정에게로 해우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거기로 또 학정 놈들이 달려들고, 남극은 말리겠다고 뛰어 들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끝까지 하준우를 붙잡고 주먹질을 하던 학정의 몸이 뒤로 떠밀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학정의 배를 걷어 찬 하준우가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며 엎치락뒤치락 했다. 다시 우위를 선점한 학정이 두 손으로 하준우의 멱살을 틀어쥐며 포효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씨부럴 새끼야, 더럽게 데려 갔으면 적어도 바람막이 정도는 해줬어야 할 거 아니야. 니 새끼들이 하나였냐, 둘이었냐, 애가 무대 위에서 깡패새끼들한테 기절할 정도로 얻어터지고 있으면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씨발, 너 같으면 무서워서 도망 안 갔겠냐? 그 사람 많은 데서도 그 지경으로 곤죽이 됐는데 너 같으면,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래도 다시 도망 안 가고 돌아온 놈이야. 머리가 그렇게 안돌아 가냐, 이 씨벌눔아. 그래, 니 말대로 깡패 새끼 돈 틀고 튀었다고 치자. 빈 쭉정이인 저 놈이 뭔 재주로 그 돈을 다 갚겠어. 제기랄, 그 놈한테 가진 게 뭐 있어서 그 회쳐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얌전히 풀어 두고 놔뒀겠냐고, 왜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씨발, 반기는 놈 하나 없는데, 저 놈 때문에 씨발 새끼들만 늘어가는 꼴을 보면서도, 질기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깨달아가는 학정의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병 신 같은 새끼, 다 지껄였냐? 지랄 그 꼴이니 새끼들이 다 뒤통수 까고 튀는 거다 이 씨발아. 그게 뭐 이 새끼야, 누가 목줄 쥐고 그 새끼더러 깡패 새끼 깔 짓 하라더냐, 깔 짓만 할 것이지 그 새끼 돈 들고 튀라더냐, 그 새끼 때문에 손해 본 돈이 수천이다. 그 새끼 때문에 문 닫은 극단이 한 둘이냐? 그 새끼 때문에 얻어터진 새끼들이, 씨발, 연극판 걱정 돼서 그 욕 쳐들어가면서도 여기 붙어 있는 거라고? 하아, 열녀 나셨구만 열녀 나셨어! 그 새끼들이 돈만 받자고 연희완이 새낄 여기 붙여 놨겠냐, 더 받아 갈 게 있으니까 여기 붙여 놨을 거 아냐! 그렇게 애닮게 연극판 생각하는 거면 씨발아, 원하는 거 줘 버리고 여기 뜨면 될 거 아니야! 그럴 배짱이 없어서 기생충처럼 붙어 있는 주제에, 뭐가 어쩌고 저째? 그 새끼 무대에서 메쳐 진 건 지 잘못이고, 거기에 우리 잘못이 털끝이라도 있었다면 애저녁에 다 치르고도 남았다 새꺄! 걸레짝만도 못한 새끼 때문에 왜 애먼 우리가!”

“깡 패 깔 아니다 새끼야, 돈 들고 튄 거 아니다 새끼야, 그래도 반 년 간 그 새끼들 밑에서 샌드백 노릇하면서 할 만큼 했다 새끼야, 지 누부도 놓고 도망갈 때 그게 제정신이었겠냐, 그 놈이라고 그 새끼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깽판 칠 줄 알았겠냐, 원하는 걸 다 줘 버리면 될 거 아니냐고? 이 인두껍을 뒤집어 쓴 새끼야, 멀쩡한 집안 하나 풍비박산 낸 새끼들이 저 놈이 끝까지 움켜쥐고 있는 거 하나까지 다 가져가 버리면 무슨 짓을 벌이겠냐. 여기 있으면 아무도 안 건드린다잖냐, 그 새끼 여기에만 붙여 놓으면 너도 나도 연극판이고 개지랄이고 하나 안 건드린다잖냐. 그 놈 꼴 그렇게 보기 싫어서 그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한테 그 놈 물려줘야 되겠냐, 씨발. 단 한 번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제대로 한 번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그 때 왜 그랬냐고, 왜 돌아 왔느냐고, 왜 못 꺼지냐고, 그 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냐, 지 놈이라면 지랄발광을 하는 놈들을 앞에 두고, 찢어진 입으로 뭔 말을 할 수 있었겠어, 씨발, 니 새끼한테 갈 때 폼 잡지 말고 한 번이라도 물어볼 걸. 두들겨 패서라도 붙잡아 놓고,”

그런다고 학정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었겠나.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하준우를 갈기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피범벅이 된 손을 펼쳐 후두둑 뜨거운 것이 떨어지는 얼굴을 감싸 쥔 학정이 소리를 지르며 맨바닥을 갈겨 댔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소줏집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이 난장에 질려 멀찌감치 서 있던 성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무심코 돌아본 서리 낀 낡은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번졌다 사라졌다. 아수라장이 된 소줏집을 내팽개치고 유리문을 열고 뛰쳐나간 성희가 복잡하고 비좁은 골목을 휘돌아 달렸다.

“희완아.”

어디로 갔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쭉정이.

그 빈 쭉정이.

“희완아,”

희완이었는데,

“연희완!!”

희완을 찾을 수 없어 헤매던 골목에 멈춰선 성희가 악 소리를 지르듯이 희완을 불렀다.

빌어먹을, 어딜 간 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연희완.

이렇게 또 남은 사람들한테만 떠넘기고,

빌어먹을.

“희완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는 성희가 다시 희완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반대쪽에서 긴 쭉정이 하나가 타박타박 다가왔다.

“성희야.”

도망간 줄 알았던 희완이었다. 또 달아난 줄 알았던 희완이었다.

희게 뜬 얼굴로 다가온 희완이 도망갈 새라 그 팔뚝을 붙잡은 성희가 선뜩한 얼굴을 하였다.

빌어먹게도 잠바 안 팔목이 성희의 손에 다 잡힐 정도였다. 삐쩍 꼴아 뼈만 남아 있었다.

“그게,”

“응?”

“그게,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얼굴로 희완을 보던 성희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못 들은, 설마 못 들은 거, 희완아 너.

“그게 사실….”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한 성희가 손을 뻗어 희완의 모자를 벗겼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한 가로등 빛 아래 창백하게 드러났다.

“무슨 일 있었어?”

소줏집 밖에 서 있던 건 분명 희완이었는데,

막상 입 밖에 꺼내어 물으려니 한 마디도 뱉어낼 수가 없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말이라는 게,

그런 게,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희완을 올려보던 성희가 시큰해진 눈알에 힘을 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희야.”

“왜 돌아왔니.”

의아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기울이던 희완이 마른 입술을 문지르며 아주 늦게 목소리를 내었다.

“갈 곳이… 없어서.”

“왜 그랬어?”

고개를 갸웃한다. 매우 곤혹스러운 얼굴이다.

그러다 아주 미안하다는 얼굴로 눈가를 문지르며 겨우 답한다.

“빚… 때문에.”

“왜, 못 가는 거야.”

한참 말이 없다. 그렇게 또 한참을 말이 없다.

“미안, 미안하다, 성희야. 내가 잘못했어.”

“그것뿐이야?”

“…….”

“할 말이 그것뿐이냐고.”

얼굴을 문지르며 또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너무 많이 잘못했는데.”

“그런데?”

“갚을, 길이 없어서.”

고통이 스치는 얼굴은 곧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동안 너무 죄송했다고,”

“어디 가는데?”

“……아니.”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건 성희였는데,

“들어가, 춥다. 왜 이렇게 뛰어 왔냐, 감기 걸리게.”

금세 스스럼없이 웃으며 소름이 돋은 성희의 손목을 가볍게 문질렀다 금방 떼어내는 희완이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어제 세탁한 거라, 냄새는 많이 안 날 거다.”

“집도 절도 없는 놈이, 너는- 필요 없어, 가져- 아니다. 일단 내가 입고 있을게. 너도 같이 들어가서,”

“약속 있어, 가 봐야 돼. 학정 형한테 잠깐 할 말 있어서 들른 건데, 안이 그래, 그래서….”

갑자기 멍하게 뜬 눈으로 성희를 응시하던 희완이 말을 더듬었다.

“학정 형한테,”

결국 말을 멈추고 희게 굳은 희완을 올려보던 성희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 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금세 무어라도 쏟아낼 듯한 얼굴이었다.

아아, 다 들었구나.

너,

다 들었어.

“어디 가는데.”

어딘지 모를 곳을 멍하니 응시하던 희완이 드문드문 입을 열었다.

“아무데도.”

“잠바 가지러 와. 학정 선배한테도 할 말 있다며.”

“응? 어, 으응. 알았어.”

멍청하게 답하는 희완의 팔뚝을 문질러 열을 내주던 성희가 다짐이라도 받듯 같은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희완아.”

성 희는 뭐라고 더 덧붙이거나 이대로 희완을 소줏집으로 끌고 가 학정 앞에 세워 놓고 싶었지만 당장이라도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은 희완의 얼굴에 아무 것도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긴 손가락으로 얼굴 께를 문지르다 한참 성희를 응시하다 갈게, 들어가. 하는 희완이 돌아섰다.

갈 데도 없다면서, 어딜 가는데 이 개 자식아.

성희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소리를 애써 붙잡았다.

희완이 걷는 골목골목이 낭떠러지를 밑에 둔 외길 같았다. 그냥 걷는데 위태위태했다.

단지 한 발 잘못 내딛었을 뿐인데 거기가 낭떠러지고 끝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깨달았다.

너는 그저 걸었을 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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