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손님용 테이블에 기대앉은 남자의 긴 다리가 눈에 들었다. 질 좋은 옷감을 따라 오래 시선을 올리니 곧바로 남자의 검은 눈과 맞닿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온도가 낮은 남자의 눈을 보고 있자니 누워 있기가 여간 무안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피를 대량으로 흘려 얼얼한 코끝을 누르는 희완이 팔꿈치를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손등에 꼽힌 링거 바늘을 한번 보고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관을 올려보던 희완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가벼운 현기증이 인 탓이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남자를 돌아보는 희완의 얼굴로 잠시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변함없이 저를 향한 남자의 시선이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그를 빤히 들여다보는데 모르겠다. 이 짧은 순간에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으로 입술을 덮던 희완이 그 거칠함에 놀라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보풀이 오르고 살갗이 갈라진 입술을 가만히 매만져본다. 쓸데없이 예민한 몸이라는 생각이다.
그새 갈라진 곳에서 배인 피가 묻어나온 손끝을 문대다 시선을 드는 희완의 눈가로 이번엔 당혹스런 기색이 스쳤다. 이젠 거의 저를 쏘아보는 듯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는 희완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백한 뺨으로 저 시선이 고스란히 읽히는데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 무슨 이상한 잠꼬대라도 했던 건가. 아니, ……아, 그래. 뒤늦게 코피를 쏟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희완이 화륵 귓불을 붉혔다. 먼저 유혹해 놓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남자가 충분히 불쾌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 같아도.
뒤늦게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이유를 찾아낸 희완이 난감한 기색으로 한참 딴 곳만 쳐다보다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채 시종일관 같은 자세로 희완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가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어- 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남자가 티슈 몇 장을 뽑아 희완의 콧등을 꽉 눌러주었다. 뭔가 흐르는 듯한 느낌에 또 코피라는 걸 깨닫는다. 이상하다. 눈으로 금세 젖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새로 티슈를 뽑아 다시 코를 눌러주는 남자가 다른 손으로 어루만지듯이 뒷덜미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순간 심각한 증세인 건가 싶어진 희완이 새삼스런 기분으로 이불 위에 새겨진 병원 로고를 내려다보는데 위에서 굵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별 거 아닙니다.”
“…….”
“밥 많이 못 먹고, 잠 많이 못 자고, 푹 쉬어 주지 못해 생긴 병입니다. 이것도 습관성 출혈이라는 건데.”
다시 티슈를 갈아 적당한 압력으로 콧등을 눌러주는 남자가 손가락 마디로 뒷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러주며 계속 묵직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놀랐던가, 크게 뛰었던 심장이 위에서 바로 떨어지는 남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차츰 가라앉아가는 걸 느낀 희완이 제 피가 번진 남자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병이랄 것도 없습니다.”
피로 누적으로 인한 가벼운 빈혈에 저혈압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증상의 원인을 말해주는 남자의 사무적인 음성에서 어쩐지 위안을 얻은 듯한 기분에 희완이 두 눈을 깜빡였다. 꼭, 그러니 걱정 할 것 없다는 소리 같다.
“그리고 관장은, 당분간 않는 게 좋겠습니다.”
피가 멎는 듯한 기분에 고개를 들려니 순순히 뒷덜미를 놓아주는 남자가 새로 티슈를 갈아주며 한마디 덧붙이는 말에 가만 그를 올려보던 희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화르륵 도로 붉어지는 귓불을 무심히 쳐다보는 남자가 어질러진 것들을 치워 쓰레기통에 한데 쓸어 넣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또 다시 지난일이 떠올라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술만 다물고 있던 희완이 집요한 시선에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작정하고 안길 생각이어서 남자가 귀가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공복이었어도 실로 오랜만에 시도하는 일이라 나름 긴장도 하고 준비도 한 거였는데, 외려 역효과였던 건가. 손끝으로 뺨을 문지르는 희완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진짜 얼굴 볼 낯이 없었다.
“고개 듭시다. 혈압 떨어집니다.”
동시에 턱을 붙들려 강제로 고개를 들게 된 희완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던 걸 멈췄다.
가만 저를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이 진중했다. 괜찮은 걸 가늠하려는 듯 신중히 살피는 시선에서 알지 못하는 무언갈 감지한 희완이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더디게 반응했다.
“온 김에 건강진단 받고 갑시다.”
잡았던 턱을 놓아주고 점점 멀어져가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희완이 곧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제 신색 면면을 살피던 남자의 시선이 거뭇한 눈 밑이나 출혈 흔적이 남은 코끝이나 갈라진 입술 등에 닿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기분 탓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뚜껑을 돌리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희완이 제게로 내밀어지는 것을 잠자코 받아들었다. 물이 닿으니 갑자기 느껴지는 격렬한 갈증에 급하게 생수를 넘기는데 뻗어온 손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생수병을 빼앗아가는 남자가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급할 거 없습니다.”
천천히 마시라는 소리다. 입술에 주둥이를 대주는 남자가 물병을 기울여주었다. 벌린 입으로 느리게 흘려드는 물을 얌전히 받아 마시는 희완의 입가로 물이 새었다. 병 주둥이를 치우고 그걸 손끝으로 닦아주는 남자가 찬 것을 급하게 들이켜 이는 둔통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희완의 관자놀이를 문질러 주었다. 묵묵한 손길이었다. 제법 시원하기도 하였다.
한결 가라앉은 둔통에 눈을 깜박이던 희완이 남자를 올려보았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따로 세팅을 하지 않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남자의 이마를 자연스레 덮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도 평소 남자가 집에서 즐겨 입던 옷이다. 창밖을 보니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고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는 병원에 옮겨온지 이제 예닐곱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올 때도 멍하지만 정신이 있었다. 단지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하고 잠시 침대에 누운 동안 깜박 잠이 들었는데 남자는 그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고 계속 곁을 지켰던가 보다.
반쯤 남은 물병을 본인이 마저 비우고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남자의 목울대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멀거니 올려보던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는데 어느새 뻗어온 손이 희완이 뺨을 감싸 쥐었다. 절로 들리게 된 시선으로 약간 화난 듯한 눈빛이 쏘아들었다.
“…….”
현기증이 개이도록 손끝으로 미간을 문질러주면서도 무어가 못마땅한 듯 구긴 눈썹을 펴지 않는 남자를 빤히 올려보던 희완은 뒤늦게 차오르는 제 생각이 틀린 것 같아 다시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했다.
“흔들지 맙시다. 아직 약 놓는 중입니다.”
나무라는 어투에 또 멍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보던 희완이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목울대가 지척이었다. 빗장뼈로 이어지는 우묵한 천골을 훑어 내린다. 항상 목 끝까지 채우던 셔츠가 아닌 헐렁한 면 티 아래로 미세하게 갈라진 근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육감적으로 변화했다. 일순 제가 형용한 단어를 새삼 자각하는 희완이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뒷덜미를 붙든 남자에 의해 그 몸짓은 무산되었다. 의아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가만히 두 눈을 깜박인다.
그러니까,
화가 난 게 아니라….
“무슨,”
붉게 달아오른 희완의 귓불을 내려다보는 승도가 말문을 닫았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솟은 그것은 거의 만지면 핏물이 배어나올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는데 승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희완은 좀처럼 떼어 나질 않았다. 츄읍, 어설프게 살을 당기는 소리가 귓전으로 울렸다. 기껏 억눌렀던 욕구가 기승을 부리며 치솟는 기분이다. 목덜미를 빨아올리던 살덩이가 목울대를 훑어 승도의 턱을 핥고 그대로 입술로 겹쳐졌다. 촉,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닿은 숨은 충분히 뜨거웠다.
일그러진 눈으로 시선만 내려 희완을 노려보는 승도의 눈길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나운 눈길에도 겁먹지 않고 물끄러미 응시하던 희완이 다시 입술을 겹쳐온다. 동시에 상체가 눌려 침대 위로 풀썩 눕혀지는 희완의 눈동자가 검게 불거졌다. 미처 닿지 못한 입술 위로 뜨거운 숨이 데일 것처럼 쏟아졌다. 거의 성을 내듯 무섭게 인상을 쓰며 희완을 노려보는 승도는 실제 걷잡을 수 없이 충동하기 직전이었다.
이런 도발은 좋지 않다. 질 나쁜 장난을 부릴 주제도 못되는 녀석이, 시종일관 승도를 자극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파리하게 질리고 검게 물이 든 눈으로도 그윽하게 자신을 매혹할 수 있는 희완을 극도의 인내심으로 쏘아보는 승도가 결국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게 정말,
“잡아먹히고 싶습니까.”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알량한 녀석이,
“물어뜯기고 싶어, 환장했나.”
낮게 윽박지르는 승도의 뺨으로 차갑게 식은 손이 올라왔다. 단편적으로 드러낸 야수성을 잠재우듯이 승도의 뺨을 가만히 덮은 희완은 그러나 스스로 자각도 못한 채 승도를 구슬렸다. 입맞춤이면 되었다. 어색하게나마 뺨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승도의 목을 감싸 안고 상체를 들어 올리는 희완이 입술을 겹쳤다. 짧게 두어 번 입술을 부딪치고 무뚝뚝하게 열리는 입술을 가르고 말랑한 혀를 밀어 넣는다.
윽. 머릿속을 파고드는 억센 손가락으로 당겨지는 머리칼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입술을 떼어내지 않는 희완이 이번엔 아예 두 손으로 승도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조심스레 승도의 눈을 살핀다. 여전히 거칠게 일어서 있는 눈이다. 어쩌면 몇 도는 더 낮아져 있는 온도가 차갑다 느껴지는 순간 입술을 물어 뜯겼다.
“아, 읏.”
희완의 몸이 완전히 승도의 몸으로 뒤덮여졌다. 커다란 손에 눌린 머리통이 베갯속으로 파묻혀졌고 짓눌리듯이 맞물린 입술은 거의 뭉개지며 크게 벌어졌다. 츄읍, 쩌업. 어설프게 승도를 자극하던 혀가 빨리고 당겨지는 소리였다. 깨물려졌고 짓씹겨졌으며 닿는 곳곳이 얼얼할 정도로 뿌리 끝까지 혹사당하는 소리였다. 하극. 입술이 깨물려 소리가 새었다. 바르르 떨리는 눈으로 승도를 올려보는 희완이 멍울이 진 입술을 열어 승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빨았다. 사탕을 녹여 빨듯이, 부드럽고 간지러우며 조심스런 행위였다. 그것을 가만히 놔두는 승도의 눈동자에서 차츰 사나운 기세가 사그라져갔다. 한참 희완을 탐색하는 듯하던 시선이 곧 평소의 것으로 치환되어졌다. 떨어지는 입술에서 발간 핏물이 보인다. 그것을 가만 노려보던 승도가 혀를 내어 핥아준다. 살짝 찡그려지는 눈가를 연이어 핥으니 축축한 것이 묻어 나온다.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정말,”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나와 축축이 젖은 희완의 앞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는 승도가 낮게 속삭였다.
“안기고 싶습니까.”
“…….”
“다리를 벌리고 나를 받아들일 마음이, 든 겁니까.”
깜박여지는 눈엔 두려움도, 불안함도, 자괴감도 없었다. 그러나 승도는 그 안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이렇게 나를 열 받게 만들어서,”
반듯하고 흠결 하나 없는 이마를 가만 문질러준다.
“어쩔 셈입니까.”
눈을 마주치는데 피하지 않는가 하였던 희완이 시선을 내린다. 그것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승도가 다시 입술을 핥았다. 금세 맺혔던 핏방울이 씻겨졌다.
“지금 내게 안긴다면, 며칠은 일어서지도 못할 겁니다.”
사실이었다. 현재 승도의 욕망은 최고치였고, 머릿속은 극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혼자서는 오줌도 못 눌 정도로 혹사시키겠습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희완의 이마 한쪽을 뒤덮어 미간을 문질러주었다. 길쭉하고 늘씬한 손이었지만 굳은살이 박여 딱딱하고 억센 손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원한다면,”
지척에서 입술을 핥고 숨결을 내려주던 승도가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벌려.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헐도록 쑤셔줄 테니까.”
무덤덤한 음색이었다. 다시금 저를 내려다보는 승도를 마냥 올려보는 희완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왜, 화를 내는 건지 알기가 어려웠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
희완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승도를 보았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 그것은 몸이었다. 쾌락, 정욕의 해소, 그뿐이었다. 그런데,
“입, 맞추고 싶습니다.”
승도의 사나운 성정이 일부 드러나는 입매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나는, 당신과 혀를 섞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은,
“아직은, 그뿐입니다.”
그러니 화를 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도 희완은 할 말이 없지만, 모르겠다. 정말 남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데, 희완은 스스로가 이러는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원해서, 줬는데. 이제는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 남자를 희완은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아마도…, 맞을 것이다. 사실이라면 믿기 힘든 일이긴 하였지만, 희완의 짐작이 맞다면, 그게 사실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많은 일들을 이 남자가 희완에게 해 주어야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희완은,
“더한 것도, 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남자는 원한다면 희완을 손쉽게 가질 수 있었다.
남자가 가진 권력을 변함없이 필요로 하는 희완은 그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좋아할 수 있을지는,”
만지면 흥분하고, 쑤셔지면서 사정을 할 때도 있다. 아니, 그와 하면 거의 매번 그렇다.
쾌락과 고통을 구분할 수 없이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면 울면서 매달리는 쪽은 오히려 희완이다.
그런데 그걸 좋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키스를 하면, 가끔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가슴이 뭉근해지고 뱃속 깊은 곳이 저릿저릿해져 온다. 그렇지만,
“좋다고, 할 수는.”
몸을 섞는 건 다른 일이었다. 첫날을 기억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산 채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고, 실제로도 희완은 너무 힘들어서 딱 죽고만 싶었다. 입술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터지는 비명을 참으며 고통을 견뎠고, 그 고통을 넘어서는 쾌락에 직면해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로 인해 희완의 정신은 산 채로 조각이 나버렸다.
그럼에도 희완에게 남자는 여전히 은인이었다. 그가 해준 일은 고맙고, 너무 과분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을 바라면 희완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놔준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내준 거라고. 그렇지만 희완은 원망스러웠다. 오히려 그래서 더 남자를 잠시나마 미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옆에 두었더라면, 그 상실감을, 그 허탈감을, 그 허망함을, 몰랐어도 되었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곁에서 살았을 텐데. 아니, 이건 틀린 말이다.
“미안합니다.”
희완은 여전히 남자가 필요했다. 남자 역시 희완을 원했다.
그러나 희완은 줄 수 없는 것을, 남자는 가지길 바랐다.
몸이라면, 몸 만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줄 수 있었을 텐데.
줄 수 없는 걸 두고, 희완은 남자의 호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노력…하겠습니다.”
염치없다는 생각이다. 정말, 귀 밑이 뜨거워질 정도로 볼 낯이 없다는, 생각이다.
남자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면서 화를 내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이라니.
몸을 빌미로 어물쩍 넘어가려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
아직은, 이라고 내세운 단서조차 교활하기만 하다.
“난, 너를 원해.”
떨어지는 음성에 시선을 드는 희완이 눈썹을 떨었다.
“연희완, 난 너를 원하고 있어.”
헛껍데기라도 상관없다는 의지가 깃든 눈이,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너를 집어 삼키고서라도 가지겠다는 열망이 깃든 눈이, 어느 과거를 뒤적여 끊임없이 불태우고 깨끗이 지우고 또 묽게 희석시켜 돌이키길 바라는 회한이 깃든 눈이, 희완은 뜨겁게 다정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키스,”
두근,
“합시다.”
심장이 뛰었다.
맞붙은 입술로 달싹여지는 남자의 숨결이 부드러웠다. 물끄러미, 녹녹하게 젖었다가도 바싹 메마르고 또 그러다가도 하염없이 풀리기도 하는 희완의 눈을 응시하며 들여다보던 남자가 가만히 입술을 부딪쳐왔다.
“좋아하는 게 있어,”
어쩌면 그 말조차 사실이 아닐 거라 짐작을 하는듯한 남자의 눈빛에 희완은 두근 하였던 심장이 덜그락거리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닫았다. 그러나 곧, 다행입니다. 하며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남자의 혀를 깊숙이 받아들여야 했다.
혀가 섞이고 입술이 맞부딪쳤다. 희완은 떨리는 속눈썹을 애써 내리감아야했다. 짙은 그늘이 진 남자의 뚜렷한 윤곽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더 그러지 못했다. 눈물 나도록 다정한 키스였다. 정말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남자가 알아주었으면 하였지만, 결국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여 희완은 두 손으로 남자를 끌어안았다. 살이 섞이고 숨이 섞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의 전부였다.
* * *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아래는 지난 30편에서 언급했던 용어(?) 정립니다.
모두 인종차별 발언으로
크래커 -> 백인
니거 -> 흑인
이드 -> 유대인
스픽 -> 히스패닉
국 -> 동양인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