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32화 (32/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아프다고 찡그리면 혀로 핥아주었다. 알알해서 멍하니 놓고 있으면 그것을 더할 수 없이 부드럽게 품어주기도 하고 빨기도 하고 슬쩍 깨물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작게 신음을 흘리면 다시 어르듯이 당겨온다. 근래 들어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입술이 부은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마디로 입가를 누르는 희완이 대사를 읊조렸다.

[이보오, 이보오, 여기가 어데요. 내 가는 길이 허 어지러워 이리 뱅글뱅글 도니, 이보오, 이보오, 내 여기가 어덴지 알아야하지 않겠소오. 이보오, 이보오, 거기 아무도 없는 거요. 이보오, 이보오…….]

오전 연습을 마치고 소도구를 정리하는데 마른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아내던 학정이 눈짓으로 희완을 불렀다. 정리하던 걸 마저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들어간 희완이 앉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카탈로그 하나가 툭 던져졌다.

“거 가봐라.”

“…여기가 어딥니까?”

“사진 찍는 데, 거기 사람 필요하다더라.”

“그렇습니까.”

가끔 연극 외의 일을 물어오긴 하였지만 학정이 직접적으로 희완에게 일을 던져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명 남성 기성복 브랜드 로고가 박힌 카탈로그를 주워 든 희완이 선 채로 대충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벌컥 문을 열고 경성들 들이닥쳤다.

“야! 이, 썩어죽일 노무 자식!! 이 김치에 말아 먹어도 시원찮을 놈아! 너 이 자식! 너 대체-! 어, 어어- 희완이 있었냐.”

뒤늦게 희완을 발견하고 걸쭉하게 뱉던 욕 대신 생글 웃으며 가볍게 손 인사를 하는 경성이 원래 하려던 대로 학정을 쥐 잡듯이 잡기 시작했다.

“이 빌어 쳐 먹을 자식! 너가 이거 거절했어? 굴러들어온 호박을?? 이 미친놈아! 이 미친놈아! 뇌가 있어? 생각이 있냐? 가출시키려면 니 놈 성질이나 가출시키지 왜 멀쩡한 개념은 빼놓고 다녀서 사람 울화통이 터지게 해?? 야, 이 귓구멍을 안테나로 뚫어도 말이 안 통할 자식아! 당장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아, 얼른 가서 우리가 하겠다고 하라고오!!”

목청도 좋은 경성의 바락바락 하는 소리에 대체 뭔 일인가 하여 사무실 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단원들이 문을 열고 나오는 희완에게 떠밀렸다 곧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냐?”

“왜 저래?”

“단장님 또 어디 집 창문 깨셨어요?”

“부단장님 저러다 입에서 불 나오시겠습니다!”

“우왁! 저걸로 저리 패시면-!”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들에 정신없어 눈썹을 들던 희완이 마지막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문에 붙은 책 만한 창으로 경성이 배드민턴 채를 들고 학정을 복날 개패듯이 패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몇 대 맞아주다가 아, 쫌! 하며 경성에게서 배드민턴 채를 빼앗은 학정이 성큼성큼 걸어와 문 창에 걸린 커튼을 탁 쳤다.

“헉! 저러다 경성 선배님 죽는 거 아니에요?”

“야, 경성 선배님이 어디 그러실 분이시냐? 단장님 얼굴 걱정하는 게 맞는 말이지.”

“아니, 두 분 한번 붙으면 난리 나는데, 올해만 문 갈아 치운 게 벌써 세 번째라고요!”

“그보다 이제와 내외하시는 것도 아니고 보는 사람 김 새게 창은 왜 걷어? 걷길?”

자고로 구경은 싸움구경이 최고라고 그도 최상급에 속하는 학정과 경성의 격돌을 관람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못마땅한지 좋다 말았다는 속내를 감추지도 않고 툴툴 거리는 은성의 곁에 선 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필영 선배까지 있었으면 완전 대박이었을 텐데.”

말리는 것보다 말려드는 데 더 소질이 많은 필영은 현재 영화판 연기 고문으로 불려가 있는 중이었다. 거기 감독이 학교 동문인데 사극을 입봉작으로 밀면서 골치를 꽤 썩는 모양이더라, 하는 은성이 불쑥 희완의 손에 들린 카탈로그를 가로채 갔다.

“옴므? 와, 때깔 죽이는데- 이거 촬영하러 가냐?”

“어, 사람이 부족하다던데.”

“이런 건 보통 원탑이나 투탑 정도 쓰지 않나? 단체 컷이 있대?”

“자세한 건 나도 아직,”

“뭐, 단장님이 까라면 까는 거지, 나도 저번에 사극 지원 나갔다가 감기 걸려서 죽는 줄 알았잖아! 이 추운 날씨에 선녀가 뭐냐? 선녀가!”

하며 은성의 뒤통수를 가볍게 까는 도연이 카탈로그를 빼앗아 다시 희완에게 건네주었다.

“화보 나가는 건 첨이지?”

“어.”

새파란 놈 허파에 바람만 든다고 스무살 초기엔 꽤 엄격하게 굴었더랬다.

“철민이 모델 출신이잖아, 걔한테 한번 가봐, 이것저것 노하우 많을 걸?”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이거 주여욱이 메인 같은데, 보면 사인 하나 받아와라, 내 동생이 걔한테 껌뻑 죽거든.”

“너 아니고?”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부탁에 가볍게 웃는 희완이 넌지시 물으니 정곡을 찔렸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민망한 기색은 전혀 없는 도연이 잘 생겼잖아! 하고 답한다. 아하하, 웃는 희완이 알았다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형!!”

복도 난간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던 희완이 바로 밑에서 붕붕 손을 흔들고 있는 석주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또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를 점심 도시락을 한 트럭 싸들고 온 배달 업체 직원에게 급하게 사인을 해준 석주가 손을 나팔처럼 모으고 추운데 왜 그러고 계십니까! 외치는 걸 듣고 있던 희완이 빙긋 웃으며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가고 안 보이나 했더니 트럭 뒤로 직원을 도와 도시락을 꺼내고 있는 철민을 발견한 희완이 난간에서 떨어져 복도 계단으로 향했다.

“여까지 안 오셔도 됐는데요!”

“어, 운동하는 거야.”

“아하하하, 오늘 메뉴는 한정식이래요, 떡갈비에다 사골국물에다가 무려 개당 단가만 2만원짜리라는데요?”

“고기 기꺼워하는 필영 선배 없어 아쉬워하시겠다.”

“그쪽으로도 배달 갔다는데요?”

의외의 답변에 석주를 쳐다보니 배달업체 직원을 가리키며 말한다.

“단원들 나가는 곳으로는 다 간식이고 도시락이고 안 가는 데가 없다고. 애초 계약을 그렇게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누군지 참 대단한 후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양손에 도시락 열 묶음씩 든 철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유감없는 얼굴로 그리 말한다.

“단장님은 누군지 알고 계시는 것도 같은데, 왜 그 분 성격이라면 이런 거 일절 안 받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래, 팬들한테 뭐 좀 거창한 거만 받아도 못 마땅한 표정 지으시면서 도로 갖다 놓을래, 니가 나갈래, 하는 분이시니까. 그렇잖습니까, 희완 형?”

“넌 뭐 그런 걸 희완 선배님한테 묻냐, 부단장님도 모르신다는 걸. 암튼 보내주시면 감사히 잘 먹고, 열심히 연습하고, 더 좋은 모습 보여주면 되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 희완 선배님?”

하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철민의 질문에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 남은 것들을 손에 끼워 넣으며 묻는다.

“모델 했었다고?”

“아, 네- 고딩 때 잠깐 했었습니다.”

“잠암깐? 허이구, 형! 얘가 고딩 때 얼마나 날렸는 줄 아십니까? 제 주변에만도 얘 팬이 몇이었는데요!”

“그래, 복근이 남다르긴 하더라.”

“아마 얘가 우리 극단에서 희완 형 다음으로 비율이 갑일 걸요?”

“아니, 몸매는 제가 좀 더 나을 겁니다. 희완 선배님은 길쭉하니 길기만 해서.”

“얼씨구, 근육이 단 줄 아는 놈이 여기 있네. 너 여기서 조금만 더 있었으면 훈남이 아니라 헌남 됐을 거라고 주경이가 누누이 그러디, 안 그러디?”

근육질이라면 기겁을 하는 주경이에게 안 그래도 나날이 잔소리를 듣고 있던 철민이 쌍으로 돌아다니는 것들이 또 미주알고주알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희완에게 구원요청을 한다. 도와줄 줄 알았던 희완은 그저 어깨만 으슥일뿐이었다.

“근육 너무 많으면 복식 호흡하는데 방해된다.”

일순 철민의 얼굴로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스친다.

“라고, 단장님께서 말씀하셨었지.”

하며 싱긋 웃는 희완이 앞장서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와아- 밥이다! 안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듣고 있던 철민이 거참, 산뜻하게 생기셔선 뒤끝 좀 있으시네, 하며 석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안 그래도 요즘 또 근육이 증식하고 있다며 학정에게 한소리 들은 직후였다. 그런데 근육 이야기 하면서 귓불은 왜 빨개지시지? 고개를 갸웃하는 철민에게도 우르르 환영인파가 몰려들었다.

카메라랑 밀당하는 마음으로 찍으시면 됩니다.

식사 내내 옆에서 아깽이처럼 떠들어대던 석주의 말 끝에 저 한마디만 덧붙이던 철민의 훈수는 아리송한 것이었다. 연애라니, 고딩 때 짧게 사귀었던 풋사랑을 제외하고는 경험이 없던 희완에겐 밀당도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좋아하면, 그냥 다 주고 싶어질 것 같은데. 그런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면 된다는 건, 아니겠지. 심란한 얼굴로 볼을 문지르는 희완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으며 테이블 어딘가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귀엽고 연약한 느낌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희완의 첫 사귐의 상대는 산뜻한 단발머리가 꽤나 잘 어울리고 쾌활한 성격의 소탈한 아이였다. 사귄지 일주일이 접어들었을 때, 서로 장난을 치다가 우연히 입술을 부딪쳤고 서툰 입맞춤을 나눴다. 그저 입만 대는 것으로도 귓불이 뜨거워졌던 풋풋한 입맞춤이었다.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쑥스러워하던 그녀의 붉어진 볼이 처음으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어 달 후 그녀의 이사로 헤어지기 전까지 그럭저럭 잘 지냈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입을 맞추긴 했었지만 희완이 남자와 나누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 때는 너무 쑥스러워서 혀를 내어 볼 생각도 못했었다. 그저 입술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완은 좋았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연극반 생활을 하느라 자유 시간이 별로 없었던 희완이 겨우 시간을 내면 간신히 영화 한 편을 보고 공원을 돌며 이야기를 나누다 까르르 웃고 아이를 바래다주던 길에 어색하게 쪽, 입술을 부딪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걸 연애라고 해도 좋은 건지.

그 한 번의 만남 이후로는 연극과 생활고에 부딪혀 그런 것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마, 제대로 된 키스는 남자가 처음이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는 희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훑었다. 마른 침이 넘어가는 목울대를 무의식적으로 건드리는데 혀를 내밀라던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괜히 속이 화득해졌다.

눈을 마주치면,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겹쳐오는 남자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밀어내면 쉽게 밀어지는 남자임에도 희완은 어느덧 그의 어딘갈 붙잡고 그가 주는 뜨거움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한참 나른한 열기에 빠져 감았던 눈을 뜨면 검은 눈동자가 지척에서 희완을 깊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얼한 입술을 보듬듯이 적셔주는 혀의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드는 것이다. 다시 입술을 겹치고 숨이 모자르다 싶을 때쯤 떼어내어지고 아마도 붉어져 있을 귓불을 문지르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관자놀이를 문질러주는 남자의 손길은 희완이 느끼기에도 다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밀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다.

목울대를 건드리던 손으로 귓불을 문지르던 희완이 물끄러미 테이블을 내려쏘던 시선을 들었다. 이런 것 역시 연애라고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다. 어딘가 망가져 있어야. 거칠게 메마른 손을 희완의 손에 겹쳐 희완의 가슴을 짓누르던 우진의 음성을 떠올린다. 비로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누군가 그랬었는데, 개소리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하며 흰 웃음을 짓던 우진의 혈색은 비교적 좋아져 있었다.

“연희완 씨.”

대기실 겸 휴게실로 쓰는 공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늦었습니다. 좀 전에 통화 했었죠. 캐스팅 디렉터를 맡고 있는 강영희 대립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희완이 내밀어진 손을 정중히 맞잡았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위에서 떨어진 오더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이번 컬렉션 모델로 따로 생각해둔 인물이 있고 넌지시 던진 물밑 접촉 결과도 나쁘지 않아 그쪽으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이 뒤집힌 셈이었다. 이 바닥에서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하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이번 컬렉션은 특별히 외국 본사의 수석 디자이너를 단기 영입해 아시아 한정으로 야심차게 내놓은 새 브랜드 론칭과 다름없었다. 주여욱과의 계약이 완료 된 후 좀 더 넓은 시장에서 통하면서도 신선한 모델을 찾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정한 모델이었는데, 아쉽게 된 일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허 팀장의 오더를 들었을 때 영희는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더니 드디어 이 사람이 미쳤나, 싶었다. 실제로 입 밖에 내기도 했다.

마케팅 2팀이 거의 팀 사활을 걸다시피 해서 매달린 프로젝튼데 저렇게 자포자기식으로 나오니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인지도 높은 모델을 기용해도 모자를 판국에 저렇게 자충수를 두다니, 어지간히 시달렸나 싶으면서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무명 배우를 모델이랍시고 내밀었을 때 영희는 진짜 이 노무 직장 때려 치고 나가버릴까, 고심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고민은 허 팀장이 트레이드 조건을 말했을 때 저 오존층 밖으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후였다.

개발 2팀 단독 브랜드 론칭에, 손익분기점을 넘을 때까지 5년간의 무조건적인 후원이 그 조건이었다. 단, 모델은 이 무명 배우만 기용할 것. 간부급에서 직통으로 내려온 지시라니 썩어도 준치 정도는 되는 뒷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도통 쥐어짜봐야 아무 정보도 나오지 않는 로비라 선뜻 입장을 정하지 못한 허 팀장이 가서 분위기 좀 살피고 오라는 뜻으로 이제 1년 차 대리를 맡고 있는 영희를 떠민 것이었다.

한 끗에 떨어져 나갈 것 같다면 내내 이 무명 배우 뒤치다꺼리는 영희 차지고 그 반대라면 부서 전체가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어야 할 상전일 것이었다. 그리고 영희는 인사를 제외한 단 세 마디 만에 오늘 이 자리엔 저 같이 하찮은 대리급이 나올 게 아니라 그나마 급 달고 있는 개발 2부장이 나와 뫼셔야 할 인물이란 걸 깨닫고 무신론자 주제에 오, 지저스를 외쳤다.

또각. 또각.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디자인 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허 팀장이 벌컥 열리는 문을 뒤늦게 쳐다보았다. 한 발 한 발 장인 정신을 깃들여 꾹꾹 밟아주시는 스탭 덕에 벌써 복도 모퉁이를 돌아 나올 때부터 영희의 구두소리를 알아챈 허 팀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뭐야, 누가 또 너에게 지저스를 외치게 했어?”

“바로 너 님이요. 허 팀장, 허 선배, 허철수, 이 아둔한 인사야, 이 우유에 부단을 말아 먹을 한심한 인사야, 너 님 왜 그러고 사세요, 응? 떨어지려면 혼자 떨어지시라고요, 왜 애꿎은 나는 붙잡고 목을 짤짤짤 흔들어대는데? 응? 물귀신이야? 잡귀야 물러가라, 훠이- 아니면 내가 니 마누라야? 당장 이혼 도장 찍자고. 이 허당아, 허당아.”

“어허, 왜 이러시나, 우리 아리따운 후배님. 너와 나의 공동체 운명은 너와 나의 이름이 철수와 영희로 호적에 찍힌 순간부터 정해진- 쩝, 왜에, 얼마나 거물급이기에?”

“모르더라.”

“뭘,”

“모르더라고, 지가 후원 받는지도!”

“…….”

오, 지저스. 이번엔 독실한 불교신자인 허 팀장의 얼굴에 쓰인 말이었다.

대번에 사태를 파악한 철수가 폼으로 들고 있던 디자인 북은 저만치 내던지고 곱게 펴 두었던 두 다리를 접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는 해봤어?”

“찌라시로는 나온 거 없고, 기자들은 물론 캐스팅 디렉터들도 모르는 애라더라.”

“뭐야, 그럼. 진짜 키다리 노릇하겠다는 거냐?”

지금이 어느 땐데? 라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철수의 둥그런 얼굴을 빤히 쏘아보던 영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눈치로 영업, 아니 마켓팀장은 어찌 건사하고 있나 몰라. 재주라고는 술 마시는 것 밖에 없는 낙하산 인사.

“너 님, 개발 타고 올라갈 생각이면 이 끈 꼭 붙잡아라, 안 그럼 미끄러지는 거 순간이다.”

“뭐 그렇게 대단해?”

“똥구멍도 핥아야 한다면 핥으라고.”

“어디 출신인데?”

“어디 극단이라는데, 아, 학정.”

“학정?”

“그래, 그냥 기초적인 조사만 한 건데- 본격적으로 사람 붙일까 하, 왜 그러냐, 허 팀장, 허 선배?”

테이블에 기대 앉아 팔짱을 낀 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철수가 갑자기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한참 무언갈 생각하는 듯하다 곧 무릎을 탁 치듯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또 지 혼자만 아는 사실 가지고 너는 왜 모르니? 이 딴 표정이나 지으려고 저 개수작을,

“도우진 알지?”

“마약으로 훅 갔잖아.”

먼저 선수 친 게 분한 듯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철수를 쏘아보던 영희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Y그룹 총수 총애가 아주 대단했었잖아, 한주아한테 떼밀리기 전까지는 주식에, 건물에, 증권에, 회사까지 갖다 바치는 줄 알고 거기 로열패밀리들께서 한낱 딴따라 한 놈 때문에 똥줄 꽤나 탔었잖아. 한번은 둘째 따님께서 도우진 아파트까지 찾아가 불꽃 싸다구를 날리기도 했었고, 그런데 도우진 그 놈이 난 놈이긴 했던 게 그때 같이 따라갔던 둘째 따님 세컨드를 지가 맞은 만큼 때려줬단 거 아니야. 아줌마도 여자는 여자라 차마 때리진 못하겠었나 보지, 드라마 인어 아가씨 알지? 친부가 뺨 때리니까 고대로 친부 바람녀 뺨 때려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뺨 때리는 걸 반복, 반복- 아무튼 둘째 따님하고 그 세컨드하고 셋이서 인어 왕자 한 편 찍은 걸로도 유명했었지. 근데 그걸 총수가 나중에 알고 도우진 보는 데서 둘째 따님 종아리 걷고 회초리를 때렸다잖아. 그 40 먹은 아줌마를, 새파란 어린 것 앞에서 말이야. 것도 다리나 벌리는 남창이라고 깔보던 놈 앞에서 말이야, 그 원한이 얼마나 깊었겠냐?”

여기서 왜 갑자기 도우진 이야기가 나오는 줄을 모르겠지만 풍문으로만 듣던 야사를 소식통이 분명한 허 팀장에게서 들으니 재밌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귀를 쫑긋 세우는 영희가 어느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 굶주린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필래? 하고 권하니 썩은 표정을 짓는 철수가 고개를 젓는다. 금연 중인 거 뻔히 알면서, 하여간 성질 나쁜 영희 씨.

“공공의 적은 어제의 적도 친구로 만든다는 진리가 있듯이, 덕분에 평소 앙숙이었던 차남을 둘째 따님께서 찾아가게 된 거지. 그 차남이 워낙 인류애가 남다르셔서 큰돈도 덥석덥석 날리시고 세종대왕 못지않은 자식농사도 훌륭했던 나머지 스캔들 끝에 총수님 눈 밖에 나서 저기 한직으로 밀려난 것에 미주알고주알로 한 몫 크게 한 여동생이 예뻤겠나, 그래도 끈 떨어진 두 분 합심해서 타도 딴따라를 외치게 된 건 제 밥그릇 지키고자 하는 개님들의 본능이지. 여기서 차남이 무슨 짓을 저질렀냐면, 도우진 약 먹여서 윤간 당하는 장면을 녹화해서 협박했단 말이지. 악수 중에서도 최악수를 뒀는데, 도우진이 좀 난 인물이야? 그걸 본인이 들고 가서 직접 총수에게 보여주는 영악함을 드러낸 거라고. 덕분에 차남도 도우진 앞에서 남자들한테 윤간 당할 뻔한 걸 그 손주들이 울고불고해서 겨우 필리핀으로 추방시키는 걸로 일단락 지어졌다는 말씀.”

“차남도, 차녀도 아니면 도우진 끈 떨어지게 한 인물이 대체 누구란 거야?”

“누구긴 누구야, 바로 총수 본인이지. 그 너구리같은 늙은이가 아무렴, 지 새끼들 농간에 빠져서 애첩을 내쳤겠어? 질렸든가, 뭐 밉보인 짓을 했든 간에 본인 마음 밖에 났으니까 그리 철저하게 내돌렸겠지.”

철저하다는 수사를 크게 부인하지 않는 영희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마약사범 무혐의로 풀리고 나서 도우진이 그 바닥 깔개가 됐다는 소문은 이미 증권가 찌라시가 아니라도 파다한 소식이었다. 일부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질 나쁘고 의도적인 굴림이었고, 몰래 약을 놓아서 억지로 붙잡아 놓았다는 둥, 섹스 비디오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둥, 한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도우진의 추락은 흥밋거리로도 제법이어서 연예계와 밀접한 이 바닥 술자리 안줏거리로 단골 소재이기도 했었다.

“그런 도우진이 어느 날 갑자기 팍- 하고 자취를 감췄단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아무 흔적도 없이. 지금 아무도 도우진 소재를 몰라.”

“그래서?”

“그 도우진이 학정 출신 배우란 말이지.”

“…….”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신가, 예쁜 후배님?”

“아, 지랄. 너무 큰 억측 아니야?”

“원래 현실이 더 구라 같은 거야. 봐봐, 나랑 너만 해도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 인연이 20년 넘게 질기게 이어질 줄 알았느냐고.”

“아아, 네에. 예쁜 선배님. 그러니 이 끈 잘 붙잡으시라고요.”

대충 비아냥거리며 그새 태운 두 개째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영희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러니까 그룹 총수께 밉보여 요란하게 벌 받는 중인 도우진을 몰래 빼돌릴 정도로 출중하신 누군가가 그 무명 배우님의 뒷배란 말이지. 상전도 보통 상전이 아니란 소리잖아.

“그래, 쓸 만은 해?”

“왜 여태 못 떴나 했더니.”

“뭐?”

그 정도 물건이 왜 여태 들어본 적도 없는 무명 신세인가 했더니.

“엄청 질 나쁜 괴수한테 물린 것도 모를 정도로 둔해.”

“어어- 둔한 건 죄악인데, 그 바닥에선.”

“근데 또 이쪽 머리는 나쁘지 않거든.”

“뭐야, 그거 누가 교육 시킨 거야?”

“누구긴 누구겠어, 학정이겠지. 거기 출신이랬잖아.”

“참 나, 거긴 또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기에 그런 놈들을 둘이나 내놨어?”

“몰라, 그냥 3류 극단이라는데. 아우, 성가셔 죽겠네.”

하며 투덜투덜 대는 영희가 곧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반듯하게 매만지며 차가운 도시의 멋진 여성 강영희로 되돌아왔다.

“내일 오전 11시, 미팅 잡아 놨으니까, 시간 날 때 한번 들르세요. 허 팀장님.”

“내일 오전 11시, 디자인팀하고 한참 미팅 중이라 힘들 것 같네요. 강 대리님.”

올 거면서 튕기는 허 팀장을 샐쭉하게 흘기는 영희가 곧 흥, 코웃음을 치며 사무실을 나갔다.

사방형 탁자엔 패션 잡지를 잔뜩 쌓아 놓고 한 손엔 유명 브랜드 로고가 떡하니 찍힌 카탈로그를 든 채 잠에 빠진 희완을 가만 굽어보던 승도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진단 결과가 나온 뒤로 좋은 한약재란 약재는 모조리 들여 체질에 맞게 맞춘 걸 먹였더니 잠이 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노숙하고 쫓기며 살던 시간이 길어 그런지 수면 시간이 짧고 잠들어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 희완으로서는 드문 일이긴 하였으나 좋은 현상이라 답하는 의사였고 승도 역시 동의했다.

벗은 걸 희완의 상체에 덮어 주고 소파에 앉아 희완의 머리통을 제 허벅지에 옮겨 놓는 승도가 떨어질락 말락 희완의 손에 든 카탈로그를 조심스레 빼어 들었다. 말끔하게 생긴 모델이 페이지마다 다른 옷과 다른 자세와 다른 표정으로 찍은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는 카탈로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승도가 시선을 내렸다. 잠귀가 밝은 희완이 그새 눈을 뜨려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어깨를 쓸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주니 움틀 거리던 눈을 스륵 뜬다. 동시에 카탈로그에서 희완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승도가 가만 그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에서도 습관처럼 벌어지는 입술을 삼키는 승도가 깊숙이 혀를 밀어 넣는다.

희완이 키스를 좋아하는 건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가끔 잠결에 입을 맞추고 작정하고 밀어 넣은 혀로 농밀하게 안을 헤집으면 얇은 바지 아래의 희완의 것이 열기를 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럼 굳이 손을 대지 않고도 키스만으로도 희완을 가게 만들 수 있었다. 사정 직전에야 눈을 뜨면 희완은 거의 경직된 얼굴로 부끄러워 죽으려 했지만 승도는 스스로 뒤처리를 할 수 있게끔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곤 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키스라면, 앞으로는 더한 것들로 바뀌어가게 될 것이다.

감았다 뜨는 눈에서 차츰 이지가 서리는 희완을 내려다보며 혀를 놀리던 승도가 입술을 떼었다.

“들어가서 잡시다.”

대답대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희완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재킷을 승도에게 건네었다. 그리곤 어질러진 탁자를 정리하다 툭 얇은 잡지 한 권을 떨어뜨렸는데 하필 펼쳐진 페이지가 언더웨어 페이지였다. 손바닥만 한 팬티만 걸친 남성모델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완이 손끝으로 그걸 덮어 다른 책자들과 겹쳐 놓았다. 모델의 선정적인 자세나 매혹적인 자태가 아니라 그 미세한 근육으로 시선이 쏠렸었다. 동시에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역동하던 근육들이 떠올라 당황했다. 낮에도 그래서 난감했었는데.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하루 종일 남자 생각뿐이다.

셔츠 단추를 풀며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승도가 벌떡 일어나 거실을 가로지르는 희완을 보곤 슬쩍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살짝 붉어져 있던 귓불이 눈에 띄도록 빨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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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주신 덕분에 저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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