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35화 (35/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희완이 기묘한 정적에 멈칫 비좁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벽지가 발린 벽에 바짝 붙은 낡은 4인용 소파와 32인치 브라운관 티브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수납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을 살피던 희완이 신발을 벗고 올라서며 손에 든 것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베란다에도 역시 인기척이 없었고 저녁을 먹기 직전이었던 건지, 식탁 위에 깔아 놓은 밑반찬과 가스레인지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은 김치찌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썰렁하게 비어 있는 부엌과 일전에 자신이 신세진 작은 방도 둘러본 희완이 안방 문 앞에 섰을 때였다.

빈틈없이 닫히고도 방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소리가 잘 새는 문 안쪽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한 박자 늦게 놓고 뒷걸음질을 치는 희완은 안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어느 종류의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방대학으로 양일간 출강을 가게 된 학정이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될 우진을 부탁했다. 극단에 우진의 상태를 알고 있는 단원이 유부남인 경성을 제외하곤 희완이 유일하였으니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부탁을 하던 학정도 별다른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이제 회복단계인 우진을 혼자 두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퇴원을 할 정도니 전보다야 나아졌지만 가끔 그 지랄 맞은 성질나올 때가 있으니 알고 있으라 당부를 하면서도 영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었다.

점점 더 짙어져만 가는 소리에 두어 발자국 더 물러선 희완이 물끄러미 닫힌 문을 보다 곧 벗었던 운동화를 도로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던 신음소리에 방안의 열기가 섞여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소리만으로도 장면의 연상은 쉬웠다. 누군가와 벌거벗은 몸으로 엉겨있을 우진을 완전히 떠올리기 전에 서둘러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선 희완이 모퉁이쯤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덮고 숨을 죽인 채 웅크려 있었다. 센서 등이 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 굳게 닫혔던 현관문이 열리고 막 샤워를 마친 듯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씨발, 도우진. 걸레 같은 새끼.”

뭐가 못마땅한지 들으라는 듯이 채 닫히지도 않은 문틈에 대고 욕지기를 뱉은 남자가 곧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을 쿵 걷어차곤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희완이 움직인 건 그로부터 15분여가 지난 후였다. 자동으로 잠긴 현관문을 해제시키고 안으로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귤을 까고 있는 우진이 핼슥한 얼굴로 힐긋 희완을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귤 박스가 주둥이를 벌린 채 노오란 알갱이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추운데 어디가 있었냐.”

자리를 피한 걸 이미 알아채고 있는 우진의 면박에 입은 재킷을 벗으며 옆 자리에 앉는 희완이 계단에 있었습니다. 사실대로 답했다.

“숫총각도 아닌 놈이 내외하기는.”

과민한 반응이라는 태도였다.

“하긴 나라도 사내놈이 씹질 좋다고 자지러지는 소린 개좆같이 들리겠지.”

피식 웃으며 깨끗하게 깐 귤을 희완의 입에 물려준 우진이 다시 귤 하나를 까기 시작했다.

어느새 앙상한 손끝으로 노란 물이 들어 있었다.

“저녁 안 드셨습니까.”

귤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며 우진의 손에서 귤을 가져와 제 손으로 까는 희완이 물었다. 학정이 차려 놓고 간 듯한데 손 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다 깐 걸 우진의 손에 들려주고 또 하나를 연달아 까는 희완이 받은 것을 통째로 털어 넣는 우진을 빤히 보았다.

볼록 솟은 볼이 꺼지도록 귤을 우물우물 씹으며 채널을 돌리는 옆얼굴이 초췌하고 날카로웠다.

“생각 없어. 배고프면 너 혼자 먹든가.”

“하루 종일 한 끼도 안 드신 것,”

“새꺄, 좆물로 배 빵빵하다고.”

원색적인 지껄임에 도로 입을 닫는 희완이 다 깐 걸 또 우진의 입에 물려주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밥통을 확인하고 가스 불을 올린다. 최근 장을 본 모양인지, 술과 안주뿐이었던 냉장고도 제법 차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음식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 일단 식탁에 나와 있는 밑반찬에 계란말이라도 더할 생각으로 계란 서너 개를 꺼내었다. 사발을 꺼내 계란을 풀고 간을 맞추는데 거실 안쪽에서 와하하하 예능프로그램의 패널들이 웃어 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발을 들고 안쪽을 쳐다보는데 감흥 없는 얼굴로 브라운관을 빤히 들여다보는 우진의 모습이 선뜩하기까지 했다. 잘 웃고 잘 화내고 잘 울고 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던 우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스폰서랑 같이 산다며 멋대로 나와 있어도 되냐.”

식탁에 앉고도 먹을 것엔 손도 대지 않는 우진이 생수만 벌컥벌컥 들이키며 툭 뱉은 말에 희완이 조금 어색한 얼굴을 했다. 예전 입원 중 정신없는 와중에도 칼날처럼 뱉어내던 말들을 통해 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직구로 던질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있을 때 잘해, 새끼야. 너 사채 빚 갚아주고도 이렇게 멀쩡히 내돌리는 걸 보면 또 어떤 호구 같은 놈인가 싶겠지만 그런 놈들이 미치면 더 무서운 법이니까. 드러워도 비위 잘 맞춰가면서 눈치 있게 굴어. 방긋방긋 웃으면서 안기는 놈이 좋지, 누가 때마다 죽을상 하면서 안기는 놈을 좋다 하겠냐.”

“…….”

“하준우가 학정에 대한 관심이 아주 지대했지.”

우진의 입에 좆을 처넣으면서 뒷조사로 알아낸 사실들을 줄줄이 읊어대던 하준우가 희완의 추락을 그렇게 통쾌해하면서도 아까워할 수가 없었다.

그 새끼는 너랑 종자가 달라서 그런 물이 들 거라고는 솔직히 기대도 안했거든. 그렇게 뻣뻣하던 놈이, 돈 앞에서는 애비 자식도 없다더니, 그 요령 없는 놈이 몸 팔아서 빚 갚을 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냐. 그것도 같은 거 달린 놈한테. 어찌나 낭창낭창하게 굴던지 아주 껌뻑 죽는다더라. 기껏 공들여 놓은 게 소용없게 됐어도, 그 끈 떨어지는 거야 순간이니 네 놈이랑 구멍동서 할 일이 머잖았으니 기대하고 있으라구.

기대에 부풀어 지껄이던 놈의 좆물을 받으며 우진은 냉소했다. 내내 바닥을 훑으며 남이 먹다 흘린 거나 주워 먹고 다니는 놈이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고 싶어 안달한 놈이 쳐다보고 다니는 건 시궁창에 가까운 밑바닥이었으니 가망이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느 것이라도 하준우에겐 썩은 동아줄일 뿐이었다.

“있을 때 챙겨주는 거 괜히 쟁여놓지 말고 무조건 현금으로 바꿔서 어디 꿍쳐 놓고. 베갯잇 송사라도 해서 원하는 게 있으면,”

별 말 안 했는데도 시뻘겋게 물든 희완의 귓불을 본 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알 거 다 아는 놈이.”

아니, 연희완이라면 알 거 다 알아도 몸만 홀랑 까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직도 동정이냐는 소리에 귓불을 빨갛게 물들이며 어색하게 웃던 녀석이 눈에 선했다. 첫 경험은 정말 소중한 사람하고 함께하고 싶다고, 보는 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낯 뜨거운 얼굴로도 또박또박 바른 소리를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놈이 몸을 팔아 빚을 갚았다고. 개소리라 생각했다. 희완은 연기를 동경하는 만큼 사랑이란 것을 동경했다. 감정이란 것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다. 고리타분할 정도로 따분한 순정이었다. 그러기에 연극이란 것에 매료됐으리라.

이야기는 온통 사랑이었다. 비장한 시대의 울음 중에도 사랑은 존재했고 우스꽝스런 광대의 놀음 중에도 사랑은 존재했고 별 일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에도 사랑은 존재했다. 뜨겁게 사랑 한번 못 해본 놈이 어찌 사랑 연기를 하겠냐며 온갖 여자를 갖다 붙여도 사심 없는 희완의 곁에 느는 건 친구일 뿐이었다. 이 자식, 남녀 간에 친구가 웬 말이냐, 하면 가슴이 뛰어야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며 난감한 얼굴로 눈가를 문지르던 모습이 여전했다.

“그 치가 좋으냐.”

“…….”

“그 치는 네가 좋다더냐.”

우진이 손도 안 대고 있다고 저도 수저엔 손도 안 대고 가만 앉아만 있는 희완을 빤히 응시하다 눈가를 찌푸린다.

“몸정도 쌓이면 정이라는데 돌아서는 건 한 순간인 게 그 족속이더라.”

목이 타는 듯 생수를 따른 물 컵을 매만지면서도 정작 입에는 대지도 않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준 것이 없어서였어.”

“…….”

“온갖 버러지 같은 놈들까지 나를 가졌다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정작 나는 준 적이 없다.”

빼앗아도 준 것이 없으니 우진은 오롯이 우진의 것이었다.

바닥을 기고 구멍이란 구멍에 온갖 것을 쑤셔지며 내돌려졌어도 우진은 알량한 것 하나만은 지켜내었다. 그것마저 내어주면 우진은 정말 누더기만도 못한 걸레였고, 밑창 더러운 창부였으며, 좆질에 환장한 약쟁이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거 지키겠다고 네가 버린 것들, 아무것도 아니다. 그거 없인, 어차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야.”

버리거나, 버리지 않거나, 어차피 모두 빼앗길 것들이었다. 그 선 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틀어쥐고 발악을 하며 견뎌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선 안쪽이었다. 한 발 내디딘 순간 자의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거라도 틀어쥐고 있어야 살아지니, 그러니, 그만큼 버틴 것도 용하다.

“그것까지 다 받아내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더냐.”

빤히 들여다보는 눈이 깊었다. 오랜만에 불순물이 서리지 않은 맑은 눈을 마주한 희완은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시를 뱉고, 비수를 꽂고, 뒤통수를 후려쳐도 도우진은 미움이란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모두들 그를 사랑했고, 좋아했고, 동경했으며, 자랑스러워했다. 입이 험해도 입 발린 말과 거리가 먼 그는 모두에게 공정했고 다감하고 친근하기까지 했다. 엄하게 혼을 내다가도 술 한 잔으로 달래줄 수 있는 여유와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고 맘에 안 들면 단장인 학정에게까지 가운데 손가락을 들이밀며 개길 줄 아는 객기도 있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도 인기가 좋았다.

눈치가 빠르고 계산이 빠른 그는 이미 희완의 속내를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 했다.

그것까지 원한다면 다 줄 생각인 거지?

그걸 줘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애초 다시 그를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

감히 돌아올 엄두도 내지 않고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웅크려 시간을 약처럼 받아들였을 거야.

“그 치가 좋으냐.”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견디는 것이 더 수월해졌느냐 묻는 우진을 말없이 바라보던 희완이 마른침을 삼켰다. 모르겠다는 답은 굳이 육성으로 듣지 않아도 그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에서 쉬이 읽어낼 수 있었다.

“언제든 널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

“지금이야 입맛대로 길들여지는 몸뚱이에 환장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내어줄 것 같이 굴 테지만, 언젠간, 널 버리고도 남을 족속이야.”

그걸 모르고 내주었을까.

아무리 늦돼도, 그걸 모르고 그 자리로 다시 기어들어갔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가늠하는 눈이다. 그 눈을 말없이 응시하던 희완이 시선을 내린다.

“돌아온 이유가 뭐야.”

비 오던 밤, 희완을 두고 병원을 빠져나왔던 우진은 그 자리에 갔었다.

회원제 데이트 클럽 모처였고, 우진은 별다른 출입증 없이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미 질펀하게 벌어진 놀음판에서 우진은 제 역할을 다했다. 우진이라도 제정신으론 못할 짓이라 우선 약을 탄 술을 서너 잔 마시고 그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달았다. 고작 반나절 못했을 뿐인데도, 술에 섞여 몸속으로 번져 들어가는 약 기운은 꿀맛이었다.

뒤로는 남자를 받으며 앞으로는 여자의 음부에 좆을 처넣고 있었다. 헤프게 벌어지는 여자의 음부만큼 헐렁한 우진의 뒤를 꽉 채우며 드나드는 것이 몇 개쯤인지 불확실해질 때쯤 소란이 벌어졌다. 환히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판 놀음의 추잡한 광경은 구역질이 날 정도였으나 난입한 사내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연놈들과 맛이 가 엎어진 놈들의 머리채를 잡아 일일이 얼굴을 확인한 사내들이 소란을 멈춘 것은 구석에 처박혀 목구멍까지 넘어온 정액을 쏟아내고 있던 우진의 팔뚝을 잡아 올린 후였다.

반쯤 맛이 간 와중에도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 미친 듯이 반항을 했다. 그러나 우진은 예외 없이 차 뒷좌석에 처넣어졌고 한참을 달려 시골구석에 박힌 정신병동에 갇혔다. 처음엔 그 사갈같은 늙은이가 이번에야말로 저를 끝장내려다보다 하고 눈앞이 캄캄해져 별짓을 다했다. 머리를 벽에 박고 나서는 침대에 묶여 또 며칠을 보내야했다. 약은 물론 제대로 된 끼니 한번 챙겨먹지 못하고 보름을 그렇게 짐승처럼 묶여 지냈다.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낼 힘조차 사라졌을 때 포박이 풀리고 일반병동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철진이라는 인간을 보았다.

“연희완.”

하준우는커녕, 그 늙은이도 우진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 대신 연희완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버러지 취급이었으나 우진은 감히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약기운이 개인 머릿속은 여전히 불완전했으나 그 회전속도만은 많이 복구되어 있었다. 단 몇 마디 말로 우진을 빼돌린 것이 철진의 윗사람이고 그 윗사람이 희완의 뒷배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결국 몸을 팔아 우진을 빼낸 것이다. 같이 못 들어가 드린다며 서럽게 울음을 참던 녀석이. 끝내는.

“돌아오고 싶긴 했었냐.”

묵묵히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흰 얼굴은 평연했다. 자괴감도 번뇌도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네.”

“…….”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고, 학정의 곁에 있고 싶었고, 우진을 붙잡고 싶었다.

곁에 있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는 남자를, 희완이 붙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을 원하면, 그것도 줄 작정이었다. 아직은 좋아지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몸을 섞는 것도 거부감 없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만 뜨면 입술을 부비고 있었고 눈을 감아도 희완은 그 짓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요릿집에서는 거의 직전까지 갔었지만 그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흥분하며 남자에게 매달려 요란하게 허리를 흔들어댔었다. 사실 이젠 남자의 목소리만으로도 희완은 절정을 맞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싫었다면, 이러진 못했을 것이다.

“노력할 생각입니다.”

남자가 언제까지 희완에게 자비를 베풀어줄지, 불확실한 건 사실이었으나 희완은 그때까지라도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모든 걸 내어줄 생각이었다. 우진의 말대로 언제 마음이 변하여 희완을 떨어진 부스럼 취급을 할지 모를 일이었으나, 희완은 최대한 그 시간이 길어지도록 노력을 할 생각이었다.

“얼른 회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날이 당장 오늘일지, 내일일지, 희완조차 가늠할 수 없으니, 그간 우진이 빨리 회복하여 약간의 부담이라도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희완도, 우진도, 더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학정은 이미 충분히 고통을 나눠받았다.

“아까 같은 일도 이젠,”

“건방진 자식.”

“…….”

“대단한 스폰서 하나 잡으니 이젠 너도 거물이 된 것 같으냐? 이, 개, 좆, 빌어먹을 자식.”

“형.”

“누가 너더러 그 짓까지 해서 구제해 달라더냐? 누가 너더러 남창 짓까지 해가며 구해 달래! 꺼지라고 했잖아! 내가 미친놈처럼 매달려도 본 척도 말라고! 다신 이 집구석으로 발길도 안 한다고! 이 가증스러운 놈! 니 놈 마음 하나 편하자고 그 짓으로 사람 피를 말려놓고 뭐가 어째? 학정이 그놈이 화대값으로 승승장구한다고 얼씨구나 좋다겠다! 이 개 같은 자식! 너 하나 속편하자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와 뭐? 그 대접이라도 받고 싶,”

“그러게 왜 그런 꼴로 돌아왔어!”

“……. 너,”

“그렇게 갔으면 멋지게 성공이라도 했었으면 좋잖아! 그렇게 망가져서 돌아와 놓고, 나 몰라라 하라고? 그게 될 것 같아? 형이라면 그게 될 것 같아서 이렇게 학정 형 곁을 맴돌면서 나까지 끌어들여!”

“누가 널 끌어들여! 누가 널 끌어!”

“뒤로 약 받는 거 다 봤어. 형 그러는 거 다 봤어!”

“그게 뭐! 이 자식아, 그게 뭐! 넌 그렇게 깨끗해? 넌 그렇게 깨끗해서 같은 사내놈한테 다리까지 벌려가며 사채 빚 갚고 학정 뒷돈 대주고 나까지 건져주니 그리 당당해!!”        

“안 그랬으면! 안 그랬으면 대체 나아질 게 뭐가 있어서! 여러 명한테 뒤대주느니 차라리 한 명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돌아가고 싶은데 언제 또 그 시커먼 것들이 몰려올까 무서워서 감히 뒤돌아보지도 못했어, 나라고 형 외면하고 싶지 않았는줄 알아? 나한테 전화하게 만들었잖아! 전화해서 날 불렀잖아! 나도 안 가려고 했어! 나도 다시 거기 구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그러면! 그러면 또 형이 불러낼 사람이 누구야! 거기까지 학정 형을 불러들여서 기어이 그 꼴을 보여줬어야 속이 시원-”

퍽-! 성질대로 희완의 뺨을 갈긴 우진이 그대로 멱살을 붙잡고 끌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게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이 멍청한 자식! 거기가 어디라고 부른다고 덥석덥석, 학정이 왔으면 적어도 그 꼴은 안 당하지! 그 인간이 왔더라면-!”

“형 사람 아니었잖아! 형 그때 사람 아니었어, 나도 못 알아 봤었으면서, 어떻게 그 꼴을 학정 형한테 보일 생각을 해!”

“너한테 전화한 적 없어! 너 불러낸 적 없고! 더군다나 학정 그 인간 불러낼 생각은-.”

“오지 말았어야 했어, 죽어도 여긴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게, 니가 할 소리야?”

희완에게 올라타 주먹을 한껏 치켜들었던 우진의 손이 우들우들 떨렸다. 그것을 멀거니 올려보던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마구마구 고개를 저었다.

“형, 나 때리지 마.”

“……뭐?”

“그 사람이 알면, 화낼 거야.”

터진 입술을 깨물며 기가 차다는 표정의 우진을 올려보던 희완이 두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우진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잘못했어, 그런데 형- 학정 형한테 우리 너무 많이 잘못했잖아. 형 말이 맞아, 나도 여기 오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렇게 못했어. 갈 곳 없었고, 떠날 수도 없었어. 빌빌거리면서 여기저기서 많이 얻어터지기도 해서 학정 형 속 많이 뒤집어 놓기도 했어. 그런데도 다 괜찮대. 아무것도 안 묻고 다 괜찮다고 해서, 나 끝까지 민폐만 끼치고 다녔어. 이제 그만 하려고 했단 말이야. 형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 학정 형이 형 그렇게 보내놓고 얼마나, 얼마나,”

“뭘, 그렇게 보내. 뭘- 얼마나,”

“형이 동의한 거 아니라는 거 알고 계셔. 말했잖아, 형도 안다고 했었잖아.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거 아무 의미 없는 일 아니야. 한동안 사람 구실 못하셨었어. 극단도 제대로 꾸리질 못해서 여러 번 파토 낼 뻔하기도 했었고, 무대 위에서 대성통곡하다 끌려 내려오기도 하셨어. 우리 보내놓고 그렇게 사람이 아니셨대. 형 보내놓고 그렇게 넋 놓기도 하셨었어.”

화드득, 불에 대기라도 한 듯, 가만 잡혀 있던 손을 떨치고 뒤로 몸을 빼는 우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형, 형 말이 다 맞아. 언제 버려질지 몰라. 내가 언제까지 그 남자한테 쓸모가 있을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얼른 나아. 내가 이런 거라도 해줄 수 있을 때 얼른 나아서,”

“낫고 나면, 너 끈 떨어져 더 뒤봐줄 사람도 없으면, 그땐 또 어떻게 될 것 같은데. 그럼 다시 거기로 끌려가 처음부터 그 짓들을 다시 해야 겠냐, 내가, 다시 그 짓을, 처음부터-”

“노, 노력하고 있어.”

기다시피해서 떨어져나간 우진의 손을 붙든 희완이 말했다.

“시,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고, 그가 원하는 거 다 줄 거야. 나랑 같이 놀자고 했어. 사채 빚도 다 갚아주고, 빚 진 거 없다면서 그냥 보내줬어. 누나 죽었을 때도, 곁에 있어줬어. 나 그때 제정신 아니었는데 계속 같이 있었어. 나한테 무서운 말 자주하는데, 별로 안 무서워. 그런데 내가 다치거나 정신 못 차리면 정말 무섭게 화내기도 해. 거,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 정도면 아직은 나 필요로 하는 거잖아. 내가 싫다 그러면 억지로 하지도 않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다 들어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줘.”

“희완아.”

“형 얼른 나아.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나도 할 말 없는 주제라는 거 알아. 그래도,”

“너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냐.”

턱을 붙잡힌 희완이 뒤늦게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정말 싫은데,”

“좋아.”

그런 거 아니라고, 얼른 고개를 젓는 희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졌어.”

“…….”

“형, 학정 형한테는 말하지 마.”

무얼,

네가 몸 팔아 뒷바라지 해준다는 거?

네가 나 같은 거 때문에 좋지도 않은 놈한테 억지로 다리 벌려가며 자비를 구한다는 거?

아니면, 그 자식이 정말 좋아졌다는 거짓말을 말하지 말라는 거냐. 그것도 아니면,

“형.”

“…….”

“형-?”

희완의 멱살을 잡은 우진이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겹쳐진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미처 밀어낼 틈도 없이 밀려들어온 혀가 희완의 입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처음엔 조금 반항하는가 하였던 희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막무가내로 입안을 휘저어오는 우진을 밀어내지도 않고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으니 머잖아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헉- 숨을 몰아쉬는 희완의 얼굴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초췌한 얼굴의 우진이 불안을 띈 눈으로 희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드리면 무어가 쏟아질 듯한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짓이 좋아?”

“…….”

“그 짓이 좋아져서,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거냐.”

대답을 않는 희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읽어낸 우진이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연희완, 너 몸 파는 거야.”

“……압니다.”

“그런데 그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학정이 모를 것 같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갈 데까지 갔구나.”

“형.”

“그 짓이 좋은 거야, 그 새끼가 좋은 거야, 돈이 좋은 거야, 권력이 좋은 거야-”

“…….”

“하준우 그 새끼가 널 못 먹어 안달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말이 났다. 도우진이 남자와 좁은 대기실에서 씹질을 하는 것을 누군가 목격했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대학로 바닥을 휩쓸었다. 학정이 우진을 불러들였다. 묻는 학정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우진이 지긋지긋한 이 집구석 나간다고 했다. 붙잡지 않았다. 아무도, 떠나는 우진을 붙잡지 않았다.

화간이라 소문났지만 그건 강간이었다. 우진은 자신을 강간한 하준우의 뜻을 따라 군말 없이 해우로 이적했다. 처음 업소로 나간 날 한물 건설 사장을 구워삶아 스폰서로 만든 후 해우에서 대형 기획사로 옮겨갔다. 이미 해우에겐 일억의 몸값을 받은 후였지만 하준우는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우진에게 홀랑 넘어간 한물 건설 사장에게 받은 얼마의 중매 값이 건진 돈의 전부였다. 처음부터 하준우를 물 먹일 작정이었던 거다.

그런 식으로 옮겨 다닌 끝에 최종적으로 낙점 당한 것이 Y그룹 총수였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뭘 노력한다는 거냐, 이미 씹질에 환장한 몸으로. 뭘 얼마나 더-.”

“형.”

“…….”

“우리, 밥 먹어.”

아직도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우진의 몸을 가볍게 밀어낸 희완이 흐트러진 옷깃을 정돈하며 거의 물어 뜯기다시피한 입술을 슬쩍 문질렀다. 아까 우진에게 맞아 터진 곳에서만 피가 조금 묻어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을 것 같다.

“김치찌개 다시 데울 테니까, 밥 먹고, 자.”

오늘 하룻밤만 외박을 허락 받았다. 이런 걸로 구속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매일 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게 희완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연습이 늦어져도 예전처럼 사무실 구석에 처박혀 자는 대신 꼬박꼬박 택시를 잡아타서라도 그 집으로 귀가했다. 남자는 먼저 잠드는 법이 없었다. 그걸 알고서 희완은 더더욱 귀가를 신경 쓰게 되었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었다.

한참 자신을 쏘아보다 일어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우진을 보던 희완이 몸을 일으켰다. 끼니를 걸러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병원에서 가벼운 빈혈과 영양실조 진단을 받고서 남자와 그러기로 약속을 했었다. 혼자 식탁에 앉은 희완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수저를 들었다. 이미 다 식은 김치찌개를 시작으로 희완은 식사를 시작했다. 잠이라도 자는 건지 안방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으로 눈을 뜬 희완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숨도 쉬지 않았다.

허억. 콜록, 콜록. 한참만에야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키는 희완에게서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불 꺼진 거실로 베란다 밖에 뜬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선잠을 자던 희완은 춥지도 않은데 으슬으슬 떨리는 몸이 이상하다는 생각이었다. 잘게 떠는 손끝으로 제 발목을 확인하고 바닥을 확인한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짧은 숨들이 탄식처럼 흩어졌다. 목덜미를 쓸며 어깨를 어루만져주던 커다란 손의 감촉이 어렴풋이 떠올라 더욱 견딜 수 없어졌다. 얼굴을 덮었던 손바닥으로 제 목덜미와 어깨를 한참 더듬다 가까스로 소파에 몸을 누인다. 잠을 청해보려 노력했지만 또 다시 그 악몽으로 끌려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희완은 처음으로 남자가 그립다는 생각을 하였다. 혼자 잠드는 밤이 무섭게 낯설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선뜩해졌다. 낯설어지는 게 늘면 안 되는데. 한숨을 쉬는 희완이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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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이 좋아해주시는 (짐)승도는 어느 익명 독자님의 멋진 센스입니다. 저도 무척 맘에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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