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43화 (43/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tay)

눈이 내렸다.

4월 초입에 내린 눈이 덮인 나뭇가지가 이는 바람에 흩날리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학정이 챙겨준 국화주를 가방에 매고 버스에서 내려선 희완이 잠바 후드를 뒤집어쓰며 발길을 재촉했다.

산사로 향하는 길은 험하지 않았으나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걷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매서운 바람 없이도 공기는 살얼음이 일만큼 쨍하였고, 꽁꽁 얼은 눈길은 누군가 뿌려 놓은 모래 덕에 겨우 걸음을 옮길 수준이었다.

꾹 다문 입술로 찬 공기가 녹으며 곧 짙은 입김으로 번져나간다. 두툼한 장갑을 끼운 손으로 굽어 자란 측백나무 가지를 붙잡으며 허리를 세우는 희완의 눈앞으로 깨끗하게 눈이 치워진 돌계단이 펼쳐졌다. 산 위에서 아래로 구부구부 휘어진 돌계단 끝에 어김없이 쌓인 눈을 머리끝부터 입은 출입문이 초행길 객을 맞이했다.

노래를 부른다.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 치며,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머무는 나를 본다.

손수 짜냈다는 참기름 한 방울에 소금 간을 한 나물을 안주로 국화주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죄다 비워낸 강명 선생의 소리를 듣고 서산으로 기우는 햇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훑어내는 희완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주름 굵은 강명 선생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오른 것이 내려오는 내내 뱃속부터 가슴을 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와 더운 기운을 올려주었다.

녹은 눈으로 축축하게 젖은 정류장 벤치를 탈탈 털고 앉아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희완의 귀 밑으로 서늘한 바람이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술이 들어갈수록 말이 많아지던 강명 선생의 입을 통해 나온 소리는 드문 노랫가락뿐만이 아니었다. 흔하게 뱉어지는 한량 잡담 중에서도 그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든 게 학정과의 인연이었다.

한 때 같은 스승에게 사사 받던 시절 덩치에 안 맞게 청승맞은 승무로 주름 잡던 시절도 있었다며 그 아쉬움을 굳이 감추지도 않던 강명 선생에게 듣는 학정의 이야기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가라 해서 갔고, 배우라 해서 배우는 거였지만 희완은 소리라는 것에 무지했다. 기타 들며 몇 마디 읊조리는 노랫가락. 흥에 겨워 쏟아내는 노랫말의 향연. 학정을 떠나 종종 뮤지컬 무대 앙상블로 서기 위해 단기적으로 받았던 성악레슨 외에 희완이 노래를 정식으로 배운 일은 전무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선생은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며 낄낄 웃던 강명 선생이 술자리에서 풀어 놓은 옛이야기 속 학정에게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 소리가 별 거냐며 히죽 웃던 강명 선생과 연기가 별 거냐며 비죽 웃던 학정의 얼굴이 겹쳐졌다. 소리와 연기가 삶의 전부인 그들에게서 듣는 그 말은 곧 사는 게 별 거냐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웃고 떠들고, 울고 화내고, 술 한 잔에 괴로운 기억 떠 보내고. 다시 허리를 차고 일어나 걷고, 또 걷고. 그러다 지치면 주저앉아 쉬었다가 다시 걷고. 얻어맞은 곳이야 언젠가 도로 낫고 부러진 곳도 도로 붙고 사정없이 갈려도 회복이야 되는 것이니, 몇 번 넘어졌다고 세상사 다 산 것처럼 굴 것 없다. 웃는 게 뭐 그리 어렵냐며, 손가락 하나를 세워 넌지시 제 옆구리를 찔러오던 강명 선생의 개구진 웃음소리는 곧 희완에게로 전염이 되었다.

발갛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멍하니 도로 너머의 눈 쌓인 논두렁을 넘겨보는 희완의 기다란 속눈썹으로 때늦은 오후의 맑은 햇살이 숨듯이 기어들었다.

명성과의 합동 연습에 참여한 후 자정을 넘겨 귀가를 했다. 2층 서재에 앉아 책을 보던 승도가 난간에 기대어 저를 굽어보는 걸 발견한 희완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겨우 이틀 간 두어 번 통화를 하긴 했어도 출장 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기도 하고 남자보다 늦게 귀가한 게 멋쩍어 괜히 뺨 밑을 쓸던 희완이 나선형의 계단을 딛고 내려서는 승도를 멍하니 올려보았다.

“오늘도 술 한 잔 한 겁니까.”

물음과 동시에 다가온 콧날이 냄새를 맡는 건가 했는데 그대로 비틀어 입술을 겹쳐온다.

“첫 합동 연습이라, 제가, 제가 풀겠,”

가볍게 혀를 당겨 빨던 입술을 콧잔등과 뺨, 눈꺼풀 등으로 옮겨가며 잠바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던 승도가 더듬어 나오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밑단을 잡아 위로 훌렁 벗겨내었다. 그 바람에 안에 껴입었던 반팔 면 티셔츠도 반쯤 말려 올라가 훤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걸 등을 굽혀 입에 담는 남자에 의해 살짝 눈가를 찡그리는 희완이 엉거주춤 올려놨던 손으로 그의 양 팔뚝을 가만 붙잡았다. 동시에 유두를 빨던 혀가 올라와 약간량 벌어진 희완의 입술을 가르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등허리를 타고 바지 안쪽으로 밀려들어오자 주춤 뒤로 물러서는 희완이 어깨를 움츠린다.

“씻고,”

“됐습니다.”

“따, 땀 흘려서,”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는 희완을 키스하다 말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도가 그새 붉어진 귓불을 한 입에 삼켜 물다 목 뒤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드러난 살결을 진득하니 빨았다. 의도적인 행위에 움츠린 어깨를 미세하게 떨던 희완이 붙들고 있던 팔뚝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조용한 만류에 면 티셔츠 라운드를 늘려 빗장뼈까지 훑던 승도가 느릿하니 입술을 떼어낸다. 곤란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보는 희완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니 바짝 딸려오는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게 되었다.

유난히 청결이라든가 씻는 것에 신경을 쓰는 희완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관계 때마다 일일이 편의를 봐주는 게 썩 달갑지도 않다. 정작 그 살을 구석구석 핥아 삼키는 건 승도임에도 적잖이 불편해하는 희완을 이대로 발가벗겨 게걸스럽게 핥는대도 딱히 거부하지 않을 걸 알지만 승도는 기어코 잡은 몸뚱이를 놔주었다. 우는 듯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것은 제 것을 받으며 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머뭇하다 곧 욕실로 빠르게 사라지는 희완의 붉어진 목덜미를 보며 걸음을 옮긴 승도가 근처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 넓은 아파트에서 침실과 욕실 등을 제외한 주 행동반경이라고 해봤자 거실이 전부인 희완의 것이 분명할 극본 몇 부가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승도야 거의 집을 비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나마 집에 붙어 있는 희완은 가끔 물을 주거나 기타를 칠 때 온실을 오가고 서재도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드물게 이용할 뿐인 아파트 내부는 사실 생활감이 많이 묻어나는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 그 몸 하나만 들어내도 남는 흔적이라곤 이 정도가 전부일 터였다.  

팔을 뻗어 대본 한 부를 집어든 승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툼한 표지를 넘겼다. 제법 깔끔한 표지와는 달리 대사가 줄줄이 적혀 있는 안쪽은 빽빽한 메모로 각 장이 너덜너덜할 정도였다. 소소한 낙서 외에도 고심한 흔적은 역력하였고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마다 분석하듯 쓰여 있는 첨언은 그 깊이와 너비가 놀라운 수준이었다. 생김 마냥 정갈한 글씨체는 때때로 그 기복이 심하였는데, 집중도가 높아질수록 흘겨 쓰는 경향을 보이는 희완의 필기체를 유심히 읽어 내리는 승도는 이미 극본의 대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잘 모르겠음. 이런 상황에서? 혼란스러움…, 그러나 과함.]

[잡고 붙잡고 패대기치고, 모호함. 웃으며 건넨다? 설움, 체념, 이해, 어느 것? 알 수 없음.]

[감정, 지나치면 관객과의 괴리. 낄낄거리다. 우진. 준수한 또라이?]

[열아홉 순정, 간드러지게, 사랑스럽게, 우습도록 순진하게. 학정 형=열아홉 순정?……….]

쓰다가 웃기라도 했는지 한참 말줄임표뿐인 틈을 살피던 눈이 그 후로도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 한 곳에 머문 것은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서였다.

[백승도]

이름 석 자만 달랑 쓰여 있는 종잇장 귀퉁이를 빤히 쏘아보던 승도가 시선을 들었다. 샤워를 마친 희완이 막 욕실을 나서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문지르는 그 시선이 닿기 전에 들고 있던 걸 얌전히 탁자 위에 내려놓는 승도가 리모컨을 집어 들어 티브이를 켰다. 마침 예능 프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와하하하- 웃음소리에 희완이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술기운인지 밖에서 안고 온 찬 기운인지로 발갛게 상기되었던 뺨이 그새 하얗게 식어 있었다. 그걸 말없이 응시하는 승도의 상체가 푹신한 소파 등받이 깊숙이 파묻혀진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그걸 단순히 소리로 풀어낼 재주가 없는 것일 뿐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희완의 일부 중 하나를 이해한다.

전화를 받은 건 이른 아침이었다. 가벼운 패팅과 오럴 정도로 관계를 마쳤어도 그와의 섹스는 보통 진이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는 하루 종일 버린 시간이 없었고 술기운이 남아 시작부터 심신이 나른하기도 하였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사이 외출하는 그의 키스를 받고 또 늘어져 있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는 희완이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한 번 끊기고, 다시 연이어 울리는 벨소리가 이상하다 싶었다. 거실 소파 팔걸이에 걸쳐져 있는 잠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든 희완이 발신지를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잠긴 목을 가다듬기 전에 반대편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었냐.

“일어나려던, 큼. 참이었습니다.”

-우진이가 간 것 같다.

“…….”

밤새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 또한 없었으며, 애초 우진의 것이랄 게 남아 있지도 않았던 아파트엔 덩그러니 우진만 빠져나간 채라고 했다. 간단히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희완이 몸을 움직인 건 예정대로 맞춰 두었던 알람이 울린 후였다.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산을 강명 선생을 따라 오전 내내 누비고 다녔다. 몸이 가벼워 곧잘 따라다니던 희완이 서서히 지친 기색을 보여도 멈추지 않고 산노인 마냥 미끄럽고 가파른 산길을 신나게 타고 오르던 강명 선생이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숙였던 허리를 편 희완의 눈앞으로 펼쳐진 것은 굽이 진 능선이 휘몰아치는 한 폭의 산수화였다. 그 풍경에 맥없이 시선을 놓고 있던 희완의 목덜미로 찬바람이 스쳤다.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고 죽겠다며 앓는 소리를 하던 것도 잠시 그새 구성진 소리를 풀어 놓는 강명 선생의 옷자락이 이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것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겼던 희완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풍파에 깎인 딱딱한 바위의 맨질맨질한 표면을 문득 더듬어보는 희완의 귓가로 우수수 쏟아지는 것 같은 바람소리가 스쳤다. 흐르는 물이었다.

[굶주린 이리떼를 잡아 가둘 생각은 않고 막아놓은 울타리 터주는 격이지. 갈 데 없어요, 울타리만 높고 튼튼했더라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는 한이 있어도 팔자거니 생각했을 게요. 허한 구석이 있어야, 기어들 구멍이 있어야 소리를 질러보고 연장도 휘둘러보고 그러다 막는 힘이 약할 것 같으면 밀고 나오는 게요. 아우성을 치면서. 천대받는 놈치고 약지 않은 놈 보았소?]

[무릎을 꿇고 기어야 할 판이면 그네들은 그렇게 할 게요. 쇠죽을 먹더라도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밥 먹으려고 둘도 없는 목숨 내어놓겠소? 어리석은 자들, 사탕으로 꼬임을 당할 놈들인가? 어리석은 자들, 한 치를 내어주면 모조리 내어주게 되는 걸. 어리석은 자들.]

번득이는 눈빛으로 저 긴 대사를 호흡 한 번 흩뜨리지 않고 끝낸 학정이 인상을 쓰며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친다.

“정신 안 차리냐.”

바로 뒤 대사를 치고 들어왔어야 할 찬길이 그 기세에 밀려 움찔하다 곧 꾸벅 고개를 숙인다.

“죄, 죄송합니다.”

상대역인 은성이 엑스트라로 차출되는 바람에 그 대사를 대신 맞춰주고 있던 학정의 기에 눌려 몇 번이고 대사를 잊고 제 차례를 놓치는 둥 쩔쩔매고 있는 찬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양의 앞의 쥐 꼴이었다. 그걸 잠자코 보고 있던 경성이 저게 웬 깽판이냐며 쯧쯧 혀를 차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희완을 웃음으로 반겼다. 스스럼없는 그 태도에서 아직 우진의 부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희완도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했다.

“어수선합니다.”

“새벽부터 뭔 난리라도 난 마냥 줄줄이 차출 당했거든. 명성하고 연습 시간 맞추려면 반나절 내내 우리 스케줄 빼야지 별 수 있나. 덕분에 간만에 애들 붙잡고 연습 시킨다는데 저 모양이다.”

자유연습의 일환으로 각자 원하는 극본을 한 부 씩 쥐로 통째로 익혀 아무 역이나 상황극을 펼치는 방법이었다. 그제야 화장실이고 탈의실이고 샤워실이고 계단이고 연습실 복도고 줄줄이 나와 앉아 제 순서 기다리는 면접생마냥 달달달 대사를 외고 있던 후배들의 모습을 상기한 희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잘 왔다. 너도 애들 상대 좀 해줘. 학정이 저 놈이 애들 저리 쥐 잡듯이 잡으니 잘 하던 놈도 그 앞에만 서면 돌덩이가 돼버려. 사무실 들어가 봐라.”

“네.”

제 순서 오기 전에 각자 짝 맞춰서 대사를 맞춰보는 무리들은 사무실에도 그득이었다. 근래 보기 드문 열기였다. 그 중 철민을 찾아낸 희완이 가방을 벗으며 그 옆에 가 앉았다. 한참 극본에 집중해 있던 철민이 뒤를 돌아보곤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한다. 무어라 말을 뱉기 전에 슬쩍 철민의 손에서 극본을 빼앗아 드는 희완이 주욱 대사를 훑었다. 그러느라 내리깔려진 긴 속눈썹을 빤히 쳐다보던 철민이 곧 머쓱한 표정으로 같이 극본을 들여다본다. 희완이 석주 놈 전담도 아니고, 또 실제로 무대에 선 걸 본 적은 없어도 연습 때의 모습만으로도 희완의 도움은 꽤 남다를 것이었다. 학정에 대해서는 족집게 선생이기도 했고. 그건 곧 사실로 드러났다.

“이 배역 시키실 것 같은데- 외웠어?”

학정이 두서없이 찍어낼 것 같은 배역 패턴을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인공의 절친 역을 콕 집어내는 희완의 물음에 선뜻 답을 한다.  

“외우긴 다 외웠습니다만,”

“빈정대는 느낌으로?”

곧장 대사 분석에 들어가는 희완의 질문에 곧 집중하는 철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음, 괜찮은데. 한 번 해보자.”

이어지는 철민의 대사를 곰곰이 듣다 마주쳐 응수하는 희완이 빤한 시선을 올린다. 제 몫의 대사를 마친 철민이 턱을 긁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젓는다.

“과한 것 같은데요.”

“여기 문맥 보면, 송인을 보는 만중의 시선이 단순하게 표현됐는데, 나는 이걸 애증으로 봤거든.”

“네, 저도 그런 해석은 했었는데 너무 진부한 것 같아서요. 저라면 친구 여자를 사랑할 것 같지도 않고, 더구나 여자 때문에 친구가 그렇게 됐는데 말이 이렇게까지 곱게 나갈 리가 없잖습니까. 대사가 너무 순정적이에요.”

“음, 그런 번뇌를 뚫고 나온 대사라고 생각해봐.”

“…….”

잇따르는 희완의 의견에 잠시 뭔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던 철민이 곧 이미 너덜너덜해진 극본을 뚫어져라 쏘아본다. 주변인물이라는 편견을 지우지 못하고 만중을 단순히 제 3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철민과 고스란히 만중이 되어 들여다본 희완의 시각 차였다.

“빈정거림의 대상이 송인이 아닌 만중 자신이 되겠군요.”

“다시 해보자.”

먼저 송인의 대사를 읊는 희완은 그새 대사를 외운 건지 극본을 내려놓고 철민을 응시했다. 불안한 시선이었고 떨리듯 비켜가며 철민의 어깨 어디쯤을 바라보는 눈빛은 송인의 그림자가 완연히 덧씌워져 있었다. 절로 분위기에 동화되어 만중이 되어가는 철민이 송인을 윽박지른다. 아니, 만중 자신을 향한 발악이었다.

무려 다섯 장에 달하는 송인과 만중의 이별 장면을 한 번에 끝낸 철민이 마지막 대사를 뱉어낸 한참 후 무언가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던 여럿의 대사로 시장통이 따로 없던 비좁은 사무실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애끓는 심정으로 만중을 붙잡던 송인은 어디 갔냐 싶게 말끔한 얼굴로 내려놨던 극본을 철민에게 안겨주는 희완이 스윽 자리에서 일어선다.

활짝 열린 문설주에 삐딱하게 기대섰던 학정을 쫓아 나가는 희완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철민이 하- 기운 빠지는 소릴 내며 제 머리를 긁는다. 내동 넋을 잃고 있다가 이 미친놈! 너 혼자 세냈냐! 뒤늦게 타박을 잊지 않는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송인을 생각하는 철민의 뒤통수로 빠악 동기의 돌주먹이 날아온다. 그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일 겁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면 그리로 가지도 않았을 터였다.

까닭을 묻지 않는 학정이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혼잡하게 얽혀 있는 난간 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그쪽에서 사람이 왔다갔었습니다.”

담배꽁초를 놓치듯이 떨어뜨린 학정이 희완을 돌아본다.

“언제.”

파주 촬영으로 집을 비운 그 밤이었으리라. 답을 듣지 않고도 찾아낸 학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말을 안 했어.”

“했어야 했습니까.”

우진의 선택이었다. 희완도 할 만큼 했고, 학정도 할 만큼 했다. 그에 따른 결과는 오롯이 우진이 감당해야할 몫일뿐이다.

“연희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누굴 위해서라면 거기 가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진이 형이 거길 간 건 순전히 형 자신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형도 미련 갖지 마.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 간 거야. 모르겠어? 살 만 하니까 간 거라고. 여기가 지긋지긋하니까 간 거라고. 비빌 만 하니까 갔어. 우리 따윈 애초 안중에도 없었던,”

“연희완!”

학정의 다그침에 꾹 다문 입술을 바르르 떠는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매어 놓아도 결코 설 수 없는 게 있어, 형. 잡으면, 평생, 우진이 형만 붙들고 살 작정인 거야?”

“…….”

“형이야 말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번듯한 직장도 아니고, 사는데 도움 하나 안 되는 놈들 끌어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거야. 이럴 거면 처음부터 놓아주지나 말지.”

말을 멈춘 희완이 주춤 뒤로 걸음을 물린다. 어둑하게 그늘이 진 학정은 어떠한 감정적 충격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쏟아 놓은 말에 위해를 입은 건 희완 본인이었다. 꺼낼 말이 아니었다. 진심도 아니었다. 아니, 진심이기도 했다. 한 번만 더 붙잡아 주지. 한 번만, 한 번만 더.

학정의 그 낡은 아파트를 뒤로 하던 우진도 같은 심정이었을 터였다.

결국 흐려진 얼굴로 학정을 바라보는 희완의 팔목으로 뜨거운 것이 감겨온다.

학정의 손이었다.

“잡아주길 바랬던 거냐.”

“아니, 그래도 갔을 겁니다.”

그러니 희완의 이런 원망은 옳지 않은 것이었다. 스스로 설 수 없는 것을 누군가 잡아 세워주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안에서 흠뻑 젖은 것을 주욱 뽑아내는 승도의 손이 상기되어 있는 뺨을 가만 훑어낸다.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격하게 차올랐던 숨을 간신히 잦히는 희완의 젖은 눈썹 주변으로 정사의 여운이 진하게 번져 있었다.

뺨을 건드리던 손으로 구겨진 시트 자락을 당겨 한껏 쏟아낸 점액질이 엉겨있는 제 것을 대충 닦아낸 승도가 침대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 어딘가만 올려보고 있던 희완이 늘어뜨린 손으로 배 아래쪽을 더듬는다.

아직도 벌어져 있는 것 같은 밑에선 그가 쏟아낸 정액이 물처럼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는 뻐끔 벌어진 곳에서 짙은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뱃속을 그득히 채우던 그 이물감에 더하여 안에서 꿀럭거리며 토정을 해대던 감각까지 생생히 남아 밑이 죽 늘어난 기분이었다.

다시 매트리스가 출렁이며 양쪽 다리를 붙잡은 손이 희완의 몸을 쑤욱 밑으로 당겼다. 힘없이 열려있던 다리가 더 벌어지며 허리 밑으로 두툼한 베개 뭉치가 밀어 넣어졌다. 차가운 것을 감은 손가락이 다물어지고 있는 밑을 비집고 안으로 쑥 박혀들었다. 화끈하던 내벽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도망치듯 손가락을 밀어낸다. 희미한 열감에 눈가를 찡그리는 희완이 옅은 호흡을 밀어냈다. 왜 그러느냐는 시선을 빤히 마주하다 살짝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늘어뜨렸던 팔을 올려 눈두덩을 꾹 눌렀다.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안을 깨끗이 긁어내던 손이 멈추었다. 흘긋 저를 향하던 시선도 잠시, 도로 내벽이 닦아지는 걸 적나라하게 느끼던 희완이 눈을 가린 팔을 내렸다. 눈앞이 점멸하며 느리게 제 시야를 찾아갔다.

“우진이 형이, 그리로 간 것 같습니다.”

찰랑, 쑤욱 빠져 나간 손이 새 거즈에 물을 적셔 다시 밑을 깨끗이 닦아내었다. 이번엔 좀 더 빠듯한 느낌에 목울대를 드러내던 희완이 헉, 짧은 숨을 토해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다 쓴 거즈를 내던지고 마른 수건을 적셔 사타구니부터 시작해 허벅지를 주욱 닦아주는 남자의 목소리에 희완은 선뜻 답을 하지 못하였다. 참담하다는 생각이었다. 동등해지고 싶었는데, 이제 더는 무엇도 빚지고 싶지 않았고, 조금의 무게도 더하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원하는 것을 묻는 남자의 말은 묵직했다.

“찾아와주길 바랍니까.”

“아닙니다.”

저를 향한 시선을 뒤늦게 마주하는 희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도 찾아올 수 없습니다.”

“…….”

“스스로 간 겁니다.”

억지로 끌어다 놓는다 해도, 또 언제 그리로 갈지 모를 일이다. 충분히 했다. 충분히 했어. 더 이상의 관계를 망쳐서는 안 되었다. 이 이상 더 받으면 희완은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졌다. 겨우 끌어올린 마음이다. 겨우 다잡아 묶은 마음이다. 같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 도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희완은 정말 스스로를 속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 없이, 빈껍데기로만 남자를 끌어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지 말라 했고, 있을 곳은 여기라 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했다. 그럼에도 갔다. 자기 자신 만을 위해 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굳이 찾아 꺼내올 필요가 없다. 남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이깟 걸로, 또 부채를 질 순 없었다.

“원해서, 간 겁니다.”

그러니 상관하지 말라는 희완의 마음을 읽는다. 검은 마음이다.

승도는 닦던 것을 마저 닦았다. 제 흔적으로 뒤덮이고 제 욕심으로 엉긴 살이 감겨들며 손 밑을 서늘하게 한다. 닦아도 선명히 남은 제 자국들을 묵묵히 내려다본다. 흰 살결들을 검고 붉게 물들였다.

공모전 당선 소식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선방을 한 남극의 주도로 뒤풀이가 열렸다. 소줏집을 통째로 빌려 남극과 학정, 그리고 명성 단원들이 죄 모이니 바글바글하니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그 틈에 섞여 소주잔을 내내 비우며 그 시끌벅적하고 들뜬 분위기에 동화되어 있던 희완의 어깨로 말랑말랑한 팔 하나가 척하니 걸쳐진다. 벌써부터 얼큰하게 취한 성희였다.

“어이, 연희완이~!”

기분이 무척 좋아 평소와 달리 생글생글 웃으며 뺨을 부비는 성희에게서 잔을 받는 희완이 싱긋 웃는다.

“축하한다.”

“히끅, 그렇지? 축하 받을 만 한 일이지?”

하며 꺄드득 웃는데 따르던 소주가 넘쳐 희완의 바지 위로 왈칵 쏟아졌다.

“어구구구.”

기우뚱하며 쿵 엉덩방아를 찧는 성희를 부축하는 희완이 그 손에서 술병을 빼어들었다.

“어라, 너 오줌 싼 거 같다.”

하며 허벅지 안쪽을 들여다보는 걸 만류하며 옆에 앉은 도연에게 성희를 넘긴다.

“어유, 많이 쌌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면서도 기꺼이 성희를 챙기던 도연이 쑤욱 일어서는 희완의 젖은 바지를 보고는 그리 키득댄다. 허벅지 바깥쪽에서부터 사타구니 깊숙한 곳까지 거하게 부어 놨다. 물수건으로 대충 청바지 안쪽을 슥슥 닦으며 자리를 비우는 희완이 좁은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였다.

나직하게 깔아 놓은 유행가와 고성방가나 다름없는 여러 단원들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좁은 복도 뒤로 떠밀려갔다. 한참 돌아들어가 막다른 벽을 차지한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희완이 우선 젖은 손을 씻어내었다. 이미 젖은 데다 닦아낼수록 젖은 자국만 번질 게 뻔하여서 바지를 닦으러 오기보다는 잠시 머리를 식히러 온 것일 뿐이었다. 들고 온 물수건으로 대충 바지를 북북 문대고는 금세 포기한다.

술기운이 오른 얼굴은 달아오르기보다 희게 질려 있었다. 물기가 남은 손으로 무심코 귀 밑을 문지르다 축축하게 묻어나는 감각에 빤히 제 손을 내려다보곤 눈썹을 찡그린다. 찬바람을 쏘이고 싶었다.

화장실 통로와 연결되어 있는 복도 왼쪽을 돌아나가니 바깥으로 통하는 뒷문이 나타났다. 열고 나가면 그 역시 얽히고설킨 골목 중 하나인 외벽에 등을 기대어 서서 하늘을 올려본다. 겹겹이 맞닿아 있는 처마 끝 사이로 사금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무리가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다 뒤늦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무릎을 굽혀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뱉어내니 벌어진 입술 새로 흐린 입김이 토해진다. 봄날임에도 늦은 밤의 기온은 낮기만 하다.

잠시간 골목길에서 시간을 보내던 희완이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시 비좁은 통로를 지나 여전히 복작복작한 홀로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좀 전과 약간 달라져 있었다. 못 보던 인사들도 각 테이블에 띄엄띄엄 끼어 앉아 있는 걸 대수롭잖게 흘려본 희완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극 단원을 발견하고 그냥 근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지화자!”

“지~화자~!”

누군가의 선창에 맞춰 일제히 쏟아지는 외침에 동참한 희완도 누군가 채워 놓은 소주잔을 비웠다. 여기저기서 캬! 하는 소리와 함께 또 술을 따르느라 각자 어수선해진 틈을 타 내부를 훑던 희완은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좀 더 시야를 넓혔다. 여러 테이블에 드문드문 끼어 있던 양복쟁이들을 무심히 스치던 시선이 되돌아왔다.

석주와 경성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덜컹, 엉거주춤 일어난 희완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다가온 희완을 발견한 경성이 반색을 한다.

“어~ 희완아. 인사드려, 여긴 박 대표님. 이번 공모전 주최측 대표시고, 여기 이쪽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희완을 끌어다 인사를 시키는 경성에게 두 번째로 소개를 받게 된 사내는 제법 준수한 얼굴로 싱긋 웃고 있었다.

“성의준입니다.”

“주석그룹 본부장님이셔. 이번 공모전에 여러 모로 도움을 많이 주신 분으로.”

“공연계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특히 연극계 말입니다.”

능청스레 초면인 양 구는 성의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희완이 주변에서 묘한 기류를 눈치 채기 전에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연희완입니다.”

“듣던 대로 미남이십니다. 그쪽 극단 에이스라면서요. 맞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경성을 향한 것이었고 그에 맞장구를 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당사자 앞에 놓고 낯 뜨거운 소리를 서슴지 않고 쏟아 놓는 경성의 속셈이야 속물적이긴 하였어도 못 봐줄 수준은 아닌지라 간간히 대꾸를 하여주는 성의준이 손수건을 꺼내 희완과 맞잡았던 손을 느긋이 닦아내었다. 여보란 듯한 행동을 눈여겨 본 건 희완 뿐이었다.

“학정이라 했습니까.”

“네네, 맞습니다. 이름이 좀 예스럽죠?”

“듣다 보니 김학정 씨가 이쪽에선 명사던데, 그간 한 번도 뵙지를 못했습니다.”

“하하, 우리 단장님이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 하는 인사인지라,”

“공모전에 참가해주지 않으실까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많이 아쉽습니다.”

“어이구, 그랬으면 심사하는데 골머리 깨나 썩었을 겁니다. 이래봬도 판 벌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니 더욱 아쉽군요.”

불편한 자리임에도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경성과 박 대표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희완만 물끄러미 응시하던 성의준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의도적인 행동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눈치 빠른 경성이었다.

“어이쿠, 바쁘신데 저희가 괜히 오래 붙들고 있던 모양입니다.”

실상이야 극단끼리의 회식자리에 불쑥 난입한 건 박 대표 측이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가난한 바닥이라 갑과 을의 관계는 너무도 쉽고 명확하게 구분이 지어졌고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는 경성의 수완이 없었다면 학정이 이만큼 버티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사근사근 말을 붙이는 경성을 흘긋 쳐다보는 의준이 탁 소매를 펴 시계를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의 잔치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유, 그 무슨 말씀을-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주시니 저희가 영광이죠.”

배알도 없는 놈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대거리를 하는 경성의 곁에서 얌전히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던 희완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던 박 대표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서는 게 보였다.

“안 나오셔도 됩니다.”

굳이 따라 나오려는 경성을 만류하는 박 대표가 변변한 인사치레도 없이 이미 돌아선 성의준을 대신해 인사를 건넨다. 희완도 그가 내민 손을 맞잡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 하는데 아, 하고 성의준이 다시 돌아선다.

“라이터 있습니까.”

희완에게 던진 말이었고 아까부터 뭔가 좀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있던 경성이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슬쩍 희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걸 빤히 쳐다보던 성의준이 휑하니 돌아섰고 그걸 뜸하게 보던 박 대표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약간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성의 주의를 끌어다 그 역시 자리에 앉혔다. 그래, 다음 작품 내용이 어떻다고요? 하고 묻는 박 대표의 걸걸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희완이 걸음을 옮겼다. 북적북적한 실내를 헤치고 미닫이문을 열고 나서니 바로 옆 처마 밑에 선 성의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임에도 성의준에게서 풍겨지는 고압적인 분위기는 그가 지고 있을 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 앞에서 이 바닥은 항상 약자였다.

고급 케이스에서 담배를 빼어 무는 성의준에게 불을 붙여주려던 희완이 그 손을 도로 떨어뜨렸다. 금박으로 세공된 지포 라이터에서 솟은 불이 그가 문 담배를 빨갛게 태우고 있었다. 후- 뱉어지는 담배 연기가 희완에게로 흘러든다.

“이래서, 내가 연희완 씨 스폰서라고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그럴 까닭이 무에 있겠는가. 학정은 일찌감치 공모전에 선을 그었고, 희완이 눈앞의 남자를 본 건 지난밤 학정의 아파트에서가 처음이었다. 공연계에 눈을 돌려 반짝 간을 보다 수익금만 싹 쓸어 판 걷어가던 사업가들이 한둘이 아닌 바에야 희완에게도 눈앞의 성의준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조차 몰랐을 건데. 어찌하여 그런 소문이 난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희완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그걸 깊이 들여다보기 싫은 것이다.

“백 대표 그 친구가 원래 뭐 하나에 진득하니 마음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또 다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피해 한 발자국 물러서니 입술을 비틀며 웃는다.

“투자제안이 들어왔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뭐 나쁘지 않겠다 싶었고, 얼굴 한 번 못 본 연희완 씨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아 흥미가 동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게 다 백 대표 그 친구 술수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이 정도 여흥에 그 대가라면 나쁠 거 없지. 했었고.”

비죽 휘어지는 눈은 대체로 단정한 얼굴인 성의준의 인상을 달리 보이게 했다.

“백 대표가 트라우마 때문인지 사람 장사는 잘 안 하는데, 필요해지면 곧잘 하기도 했습니다. 이왕이면 새 것이 좋지만 백 대표가 주는 거라면 헌 것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태우다 만 담배꽁초를 떨어뜨려 구둣발로 잘근 밟아 끄는 성의준이 싱긋 개운한 웃음을 건다.

“백 대표 손에 잘 개발된 것들은 까는 맛도 제법이거든.”

필요에 의해서 희완을 성의준에게 넘기기로 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희완은 알지도 못하는 소문이 돌았고, 공연계에 투자까지 해가며 이렇게 친히 희완을 만나러 왔다는 소리다. 희완과 엮어주기 위해 성의준에게 공연투자라는 명분을 주었고, 그간 몸을 섞어왔던 것도 성의준의 만족도를 높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지금 나를 깔러 왔다는 말입니까.”

담담한 대꾸에 반 뼘 쯤 차이가 나는 눈높이를 올려보던 성의준이 눈가를 찡그린다. 불쾌해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애석하게도 연희완 씨는 내 타입이 아닙니다. 백 대표가 이런 허우대하고 붙어먹을 줄은 내 생각도 못 했어서 말이지.”

“그럼 피차 섞을 이유가 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니, 까는 게 꼭 나일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연희완 씨 타입이라 꼭 나한테 깔리고 싶다 해도 난 비역질에는 흥미가 없거든.

덧붙이는 성의준의 입가로 웃음이 걸린다. 즐거움이 드러나는 면면이었다. 그걸 계속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타입 운운할 만큼 솔깃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씹질 좋아하잖아, 원래 그런 용도로 다듬질 당하다가 백 대표가 건져 온 거라며. 그 친구한테 돈이고 뭐고 받는 것도 아니라니, 내 보기엔 살정 밖에 안 남은 것 같거든. 백 대표 그 친구 물건 실한 건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어느 연놈이든 붙여 놓으면 구멍 찢어지겠다고 가랑이 붙들며 줄행랑을 치던 게 한둘이 아닌데 이렇게 붙어 있는 걸 보면 연희완 씨 구멍도 만만찮은가 본데. 그 짓에 환장하지 않고서야, 그리 오래 붙어 있기 어렵지. 그러니 내가 충족시켜주겠다는 제안이야. 백 대표 그 친구 따위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물건들을 박아주지. 어때, 동하지 않아? 제대로 씹질만 하면 평생 섭섭지 않게 해줄 수도 있어. 화대라는 건 싫은가? 그럼 연극처럼 관람료라고 생각해. 난 그런 걸 보는 것도 좋아하거든.”

“백 대표님께 그 대가는 지불하셨습니까.”

“음?”

“날 까는 대가를 그에게 지불하셨냐는 말입니다.”

그 딴 걸 왜 묻냐는 시선을 응수하는 희완이 미닫이 유리문 너머의 소줏집 안쪽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내 포주를 자처하였다면 내게도 언질을 주었을 겁니다. 아니더라도, 화대는 선불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나한테 추근 대지 말고 포주 짓을 했다는 백승도에게 가 확실히 일을 마무리 짓고 오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포르노라도 찍을 건가.”

“선택권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의외로 제 주제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저 뻣뻣한 얼굴은 시건방지기 짝이 없다.

“내 말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은근한 협박조에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희완이 저벅,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선다. 성큼 다가온 성의준에게서 차가운 향이 풍겨졌다.

“일말의 가치도 없다 판단되면 백 대표만큼 인간 말종인 놈도 드물거든. 그게 지금 당장일지 아닐지 확신할 수 있나?”

“불신할 까닭도 없습니다.”

“흠. 자신하기도 이르지.”

하며 바짝 다가온 성의준이 희완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는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골목 끝 붐비는 청춘들이 오가는 길가였다. 희완 역시 그곳을 돌아본다. 얼기설기 섞인 불빛들 외에 보이는 것 없이 흐릿하기만 한 풍경이다.

“매양 따라붙는 눈이 있음에도 날 제지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

“도우진이 연희완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 음탕한 늙은이한테 간 걸 되찾아오지 않은 백 대표를 그리 신뢰합니까.”

“필요 없다 했습니다.”

잘못 들었는지 확인하는 눈이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그제야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서 희완을 가늠하는 성의준의 만면으로 모호한 기운이 스며든다.

“그렇게 자신합니까.”

그 만큼 모호한 질문이다. 무엇을 자신한단 말인가. 희완은 무엇하나 자신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입장인데.

그러나 그 사실을 눈앞의 남자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대답 않는 희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왁자한 소줏집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백 대표의 도움 없이 도우진을 찾아올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우뚝 멈춘 희완의 손이 소줏집은 낡은 미닫이문 어디에 닿아 있었다.

“도우진이, 그 음탕한 늙은이가 좋아 간 건 아니니 말입니다. 그 이유를 알면,”

서서히 성의준을 돌아보는 희완의 눈으로 즐거워 보이는 눈이 스민다. 적어도 제 속을 감추는 교활함을 숨기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그 살얼음 낀 속을 녹일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내 제안을 지금처럼 무시하지는 못할 테고.”

자, 이제 어쩔 거냐 묻는 성의준을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제 발밑에 고인 구덩이는 스스로 닫아야 했다.

얼음장이 아닌 고작 살얼음 낀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성의준은 이미 희완의 대답을 알고 있는 듯 의기양양하기만 하다.

그래서, 뭐. 나완 상관없어.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단 말이야. 가지 않아도 된다 했는데.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희완의 푸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성의준이 가볍게 웃는다. 비웃음이었다.

“본래, 인간이란 것이 그리 지 안위만 챙기고 보는 아주 이기적이고 교활한 동물입니다.”

재킷 안쪽을 젖혀 품에서 무엇을 꺼내 희완에게 내민다. USB가 든 케이스였다.

“이게 결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선뜻 손을 내밀어 받지 못하는 희완의 손에 직접 케이스를 쥐어주는 성의준이 덧붙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돌아서는 성의준의 어깨 너머로 다시 짙은 담배 연기가 바람결을 따라 흩어진다. 그걸 내다보며 제 손에 쥐어진 것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희완의 눈가로 잘은 고통이 스쳐지나간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소줏집 안쪽에서 왁자한 소음을 뚫고 와하하하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등걸에 맺혔다. 동 떨어진 것에서 이제 겨우 벗어났다. 이런 곳에서 다시 떨어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프도록 쥔 손가락 마디를 펴 투명한 케이스를 내려다보는 희완의 머리 위로 바람이 스쳤다.

스너프 필름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서른 개의 영상 안에서 우진은, 넝마주이가 되어 있었다. 발가벗겨진 몸뚱이는 말할 것 없이 정신적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해보였다. 앉은 자리에 앉아 한 번 멈추지도 않고 영상을 빠짐없이 본 희완의 마주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 편 보기도 힘들었다. 모든 영상은 소장용이나 판매용으로 쓰기도 어려울 만큼 적나라하고 잔혹하고 충격적인 장면들로만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 악의와 집요함이 무서울 정도였다.

화면이 정지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희완이 메마른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훑었다. 묻어나는 것은 창백한 피부 위로 서늘하게 맺힌 식은땀이었다.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이미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지만 희완의 머릿속은 우진이 질러낸 비명과 한탄과 애원과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내지르는 신음소리로 꽉 차 있었다. 우진이 내는 소리는 점점 증폭되어갔고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몸뚱이 또한 그에 비례했다. 초반에는 슬쩍 냉소적인 웃음을 비치기도 했던 우진의 얼굴은 갈수록 검어졌고 초췌해졌고 날카로워져갔다. 그 중에서도 최근의 것은 가장 엉망이었고, 매우 참혹했다.

손바닥으로 제 입가를 누르고 있던 희완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밀어 삼켰다. 이걸 누구에게 보인다 했겠는가. 짙은 장미향이 너울너울 흩어져 있던 좁은 방 침대에 앉아 파리하게 질려 있던 우진의 옆얼굴과 그 발치에 앉아 있던 성의준의 등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걸 누구에게 보인다 했겠는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왈칵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구겨 넣는 희완의 눈알이 팽창되며 투둑 실핏줄이 돋는다.

우진에게 쏟아 부었던 말들이, 학정에게 뱉어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망령처럼 되살아나 희완의 오감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원해서 간 거다. 제 발로 간 거야. 할 만큼 했고, 살 만 해지니까 또 그렇게 훌쩍 혼자 가버린 거다. 안중에도 없이, 우리 따윈 안중에도 없이. 아니야! 아니다. 상관없어,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는.

턱이 짓뭉개질 정도로 입가를 덮은 손으로 짓누르던 희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어 두었던 잠바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선뜩한 것이 가슴을 가로지른다. 희완은 벌벌 떨면서 그 벨소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학정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호흡기를 달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들어가지 못하고 문턱에 걸려 있던 희완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인기척을 느낀 학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산발에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난 학정의 얼굴이 검어져 있었다. 어쩐지 더욱 굽어진 것 같은 학정의 어깨가 불쑥 솟아오른다. 저벅저벅 저에게로 다가오는 학정을 올려보던 희완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눈이 붉었다.

손목을 꽉 잡혀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텅 빈 휴게실이었다. 비좁고 환기가 잘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곰팡이처럼 번져 있는 휴게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희완은 잘 켜지지 않는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라이터를 켜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 넘기는 학정의 두툼한 손가락 마디를 쳐다보았다.

“…….”

손을 뻗어 그 손에서 라이터를 빼와 직접 불을 붙여주는 희완의 짓이겨진 입술에 학정의 시선이 닿는다. 곧 일그러진다.

“도대체 왜, 니 놈들은-,”

툭, 떨어지는 장초가 불티와 함께 더러운 바닥을 뒹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는 학정의 구겨진 살갗이 마디 사이사이로 비집어진다. 그걸 말없이 응시하던 희완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학정에게 닿지 않고 밑으로 허물어졌다. 각진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이 화드득 시선에 얼룩진다.

한밤중에 응급실 앞에서 뒹굴고 있던 것을 건져보니, 사람이었다. 숨만 겨우 붙어 있는 것을 대여섯 시간에 걸친 수술로 연명시켜 놨다. 눈 옆에서부터 턱 밑까지 길게 벌어져 있는 칼집으로 인해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그나마 칼집이 나지 않은 곳은 얻어 터져 퉁퉁 붓거나 부러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병원 측에서도 불명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환자가 도우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학정 때문이었다 한다. 회복이야 하겠지만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다고, 병실을 찾기에 앞서 만났던 의사조차도 증세를 선뜻 말하지 못했다. 탈장이 있어 장을 10센티 가량 잘라내야 했다는 말까지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간 지 일주일도 못돼서 그리 육시가 되어 버려졌다.

학정에게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울음을 듣는다.

붙잡았어야, 그랬어야….

주춤주춤 물러서는 희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다. 뒤돌아 휴게실을 걸어 나가는 희완의 호흡이 가빠졌다. 복도로 나와서는 거의 뛰다시피 걷는 희완이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타박타박, 핸드폰을 꺼내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성의준이었다.

희완에게 우진의 소재를 알린 것도 성의준이었고, 학정에게 우진의 소재를 알린 것도 성의준이었으리라.

덜덜 떨리는 입술에서 뱉어진 목소리 치고는 차분한 음성이 지금 당장 만나야 겠다 한다. 흔쾌히 그러자 하는 성의준을 발견한 것은 병원 입구를 나서기도 전이었다. 로비 소파에 앉아 저를 발견하고 일어서는 성의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희완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꽉 쥐어진 주먹이 뻗어나가며 콱 성의준의 얼굴을 갈겼다.

“헉, 헉.”

비틀, 휘청하며 도로 소파에 주저앉는 성의준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는 희완에게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부릅뜬 눈이 빠듯할 정도로 메말라 있는 걸 빤히 주시하던 성의준이 코웃음을 친다.

“화납니까.”

희완의 눈동자로 검은 것이 스민다.

“그래서 날 패면 풀릴 것 같습니까?”

짙어지는 웃음은 본디 성의준의 것인냥 화사하기까지 하다.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내가 도우진을 억지로 끌고 가길 했습니까, 그 동영상을 찍길 했습니까, 저 좋다고 간 놈이라 상관없는 일이라 지껄이길 했습니까.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내게 이리 화풀이를 하는 거냐고. 지금 묻잖아 이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야.”

하며 툭 희완의 손을 뿌리치는 성의준이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바로 세운다.

“안 합니다.”

성의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다시 저 구덩이에 처박힌다 해도 너 따위한테 신세 안 져. 버러지만 못한 건 바로 너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을 쳐. 재밌습니까? 즐겁습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웃어대는 그 얼굴이 어디 사람 얼굴입니까.”

“그래, 내 신세를 안지면 너 따위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가랑이 벌리고 같은 사내새끼 좆 물면서 엉덩이 흔들어 대는 거? 한철 꽃놀이라 했더니 사랑 놀음이라며 씨발스런 짓거리 서슴지 않는 백승도 품에 안겨 기집들처럼 베갯잇 송사라도 할 작정이신가? 그게 한계라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뭘 주고받든 화대 밖에 안되는 게 니 새끼랑 그 새끼 관계라는 거라고. 상관없어? 도우진이 걸레짝이 된 것에 정말 백승도가 아무 상관을 없을 것 같나? 널 싸고돌면서도 네 주변에는 무심한 그 새끼가? 개 씹 좆같은 소리 집어 치우라 그래!”

“닥쳐. 내 일에 그 남자를 끌어들이지 마.”

“그 새끼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니 놈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왜, 이번엔 딴 놈한테 몸 팔아 저 걸레 같은 놈을 구제라도 할 셈인가? 나도 싫고, 백승도 싫으니, 아하! 그래 그 음탕한 늙은이한테 다리를 벌리면 되겠군? 다행히 넌 그 늙은이 입맛에 딱이니까!”

“그만해!”

듣기 싫다는 듯 소리치는 희완을 비웃는 성의준이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한밤중의 병원 로비는 한산하여 오가는 사람이 없었고 데스크의 직원도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러니 성의준의 그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희완뿐이었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성의준이 손바닥으로 희완의 가슴을 툭 친다. 그대로 떠밀려지는 희완의 귓가로 싸늘한 음성이 내려앉는다.  

“정신 차려, 연희완. 니 일은 니가 해결해야지 언제까지 백승도한테 구걸할 건데. 그 새끼라고 별 수 있을 것 같나? 그 늙은이라고 별 수 있을 것 같아? 그 영상을 손에 쥐고 있는 건 바로 나라고. 매달릴 거면 누구한테 매달려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는 해야 할 거 아냐.”

“…….”

“하하하, 정말 그 늙은이가 아직도 미련이 있어서 그 걸레한테 그리 매달린 줄 알아? 그 걸레가 아직도 그 허황된 꿈에 미련이 있어 거길 기어들 간 건 줄 알아! 그래, 그렇게나마 자존심을 지키니 떳떳해지던가? 코에 두레 껴 질질 끌려가는 짐승 모른척하며 꼴랑 체면 하나 챙기니 그리 당당히 얼굴 치켜들 수 있을 것 같아!”

번득이는 성의준의 눈이 희완을 훑는다.

“지금이 아니라면 저 걸레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평생 죽느니만 못한 꼴로 만들어주지. 의식도 없이 벌어진 음부 꼴로 겨우 숨이나 붙여 놓으면 참 후련하겠어, 그렇지?”

날아온 손이 희완의 뺨을 갈긴다. 다시 날아온 손이 반대쪽 뺨을 갈겼다. 그 뒤로도 연거푸 갈겨지는 뺨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입술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주륵 흘렀다. 그제야 겨우 손을 거두어가는 성의준이 더러운 것이라도 닿았다는 듯 행거칩을 꺼내 털던 손을 박박 닦아낸다.

“무슨 상관이야, 남의 목숨 따위가. 나 하나 잘 살면 그만이지, 남이 똥밭을 기든 그 똥을 주워 먹든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 니가 그 걸레를 버린 것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재주라고는 몸 굴리는 재주밖에 없어 똥구멍이나 벌리며 사는 놈이 감히.”

치를 떠는 성의준의 시선은 병적이었다. 희완의 주먹이 스치고 지나간 입술을 닦아내며 안에 고인 피를 긁어 모아 뱉은 침이 희완의 뺨에 떨어졌다. 거미줄처럼 엉겨 속눈썹에서부터 느적이 흘러내리는 걸쭉한 액체를 닦아낼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선 희완에게로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던져졌다.

“그 돈으로 널 사지. 진즉 영리하게 굴었다면 이리 헐값에 팔리지는 않았을,”

말을 멈춘 성의준의 시선이 위쪽으로 휘어졌다. 그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검은 팔이 목덜미를 스쳐 희완의 뺨에 닿았다.

그제야 희완의 검은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이 저가 아닌 것을 깨달은 성의준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진다. 팔의 주인이 성의준의 뒤에서 완연한 형태를 드러내며 희완을 향해 다가선다. 제 뺨에 닿은 남자의 손끝을 멍하니 두고 있던 희완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내쳤다 주춤 수그러들었다. 아랑곳 않고 내쳐진 손으로 다시 희완의 얼굴을 덮는 승도가 걸쭉한 피가래를 슥슥 닦아낸다. 눈가가 이지러지고 부어오른 뺨이 뭉개지고 터진 입술이 도로 비죽 핏물을 솟아 올려도 멈추지 않고 닦아내던 것을 깨끗이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희완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남은 것을 구석구석 빨아 먹었다. 눈부터 시작한 것이 목덜미에서 멈추었고 다시 입으로 올라와 벌어져 있는 입술을 삼킨다. 가볍게 훑는 정도로만 끝내고 한 팔을 둘러 희완을 품에 당겨 안은 승도의 시선이 흘긋 뒤 켠으로 가 닿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만면으로 날카로운 웃음을 걸고 있는 성의준의 바로 뒤쪽으로 철진의 덩치가 불룩 솟아 있었다. 별다른 지시 없이 희완을 안은 채 걸음을 옮기는 승도의 넓은 등짝을 노려보던 성의준이 제 팔뚝을 붙잡아 오는 철진을 매몰차게 뿌리친다. 그걸 뒷덜미를 꽉 붙잡아 당긴 철진이 질질 끌다시피 해서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때서는 별다른 반항을 않는 성의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는 희완의 귀에도 들렸다.  

* * *

대사 인용 출처 <노래 - 국밥 집에서> <소설 - 토지>

정말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이제 눈떨림이 회복 되었어요. 다음엔 완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책으로도 ^^; 독자님들이 힘내라고 좋다고 해주시고 격려도 잊지 않아주셔서 이렇게 부족하나마 소장본으로 찾아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말씀, 그리고 따뜻한 의견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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