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61화 (61/123)

자정이 다 되어서야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막 건물을 빠져나오던 은색 세단이 희완과 우진의 앞에 멈춰 섰다. 짙게 선팅이 붙은 창이 내려가니 연출의 모습이 들여다보였다.

“타요. 바래다줄게요.”

카풀을 해주겠다는 소리에 꾸벅 인사를 하던 희완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걸어서 20분 거립니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십시오.”

“가는 길이면 태워다 줘도 되는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완곡히 사양하는 희완을 억지로 태울 생각은 없었는지, 눈짓으로 우진의 뜻을 묻고 그대로 또 사양을 받은 연출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조심히들 들어가요. 지나는 길에 정취 좋다고 술 한잔씩 꺾지 말고 내일은 오전 연습이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십시오.”

둘의 인사를 연달아 받고서야 창을 올리는 연출의 차가 곧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그걸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던 우진이 문득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우나 할래?”

덩달아 시간을 확인한 희완이 그의 권유에 선선히 응했다.

“안 그래도 찌뿌드드했어.”

“이틀 꼬박 찍었다며.”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지난 금요일 밤부터 연 이틀간 있었던 촬영장 에피소드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가 다친 건 아니었으나 크게 불이 나서 전투 씬 배경 중 하나인 배가 전소되는 바람에 오래 시간이 지연됐었다. 주요 장면이 해전이라 배를 뺄 수는 없으니 결국 시에서 보존하고 있는 낡은 어선 하나를 빌려다 선미만 그럴싸하게 꾸며 촬영을 진행했었다. 스태프는 물론 엑스트라로 동원됐다 졸지에 소품팀으로도 활용된 단역 배우들 모두 이틀 내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해 그에 대한 인사치레는커녕 잠시 쉴 틈도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촬영으로 끝 무렵에는 희완도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남자와의 약속은 거르기 싫어 새벽녘에 귀가해 일요일 오전 잠깐 눈을 붙였다. 아파트로 가겠다는걸 그가 직접 태우러 와 픽업이 됐었다. 또 그 밤에는 남자의 품에서 그대로 곯아떨어지기도 했었고.

“필영 선배는 제법 발판을 다졌겠는데.”

“대우가 대단합니다.”

부를 때마다 군소리 없이 족족 불려 나가더니 드라마 판에서의 필영에 대한 신뢰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필영 선배 말이라면 신인을 연기고수라 해도 믿을 거야 아마.”

“공을 꽤 들였으니까.”

그런 대우라도 못 받으면 억울하지.

시큰둥하게 답하는 우진이 먼저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예전에 자주 가고 했던 욕탕은 지금쯤이면 사람이 빠지고 한창 청소 중일 터였다. 찜질방도 없이 겨우 동네 목욕탕 수준인 욕탕은 대학로 터줏대감으로 그 주인 역시 한때 연극밥 좀 먹은 인물이었다. 한번 발을 디디면 도통 빼기가 힘든 바닥이었다. 소줏집 주인과는 달리 요즘도 심심찮게 단역 오디션을 보기 위해 영화판을 전전한다는 욕탕 주인은 또 목욕비도 칼같이 받아내었다. 그래도 여느 목욕탕에 비하면 반값이었지만 말이다. 복잡한 골목을 휘돌아 인적이 드문 구석에 박혀 있는 허름한 목욕탕 입구엔 예상대로 반달형의 유리 구멍에 청소 중이라는 팻말만 덜렁 걸려 있었다. 알아서 신발장 열쇠를 챙겨 안으로 들어서니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와 마루 위에 드러누운 사내 두엇의 코 고는 소리가 그 둘을 반겼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는 우진을 보내놓고 라커를 찾아 들어간 희완이 옷을 벗기 전에 핸드폰을 먼저 꺼내들었다.

단축번호를 누르고 두 번째 돌아가는 신호음을 남자의 음성이 끊고 들어왔다.

-이제 끝난 겁니까.

“네. 아직 안 주무신 거,”

-밖입니다. 어딥니까.

“연습 끝나고 형하고 사우나 왔습니다.”

-…사우나?

잠시간의 침묵을 크게 신경 쓰지 못하고 단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들을 나름대로 해석하던 희완이 눈썹을 들며 나직이 되물었다.

“네?”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라커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어 좁은 욕탕 안을 살핀 희완이 답했다.

“몇 명 안 됩니다. 세 명 정도.”

-옆에는.

“아무도.”

-도우진은.

“화장실에.”

-옷 입고 있습니까.

“네.”

-벗읍시다.

“네?”

갑자기 들려오는 요구에 당황을 하면서도 이어지는 남자의 침묵에 별 이견 없이 옷을 벗은 희완이 잠시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 벗었,”

-다리 벌려 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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