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이 말도 못 하게 화려했을 거라고.”
희완을 안아 오던 손길은 거칠었으나 확실히 능숙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에게서 풍겨지는 그 진한 체향은 모든 걸 납득케 하는 힘이 있었다. 이상한 사실은, 희완에게 있어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를 상상하는 일은 쉬웠으나,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어려운 것이었다.
“상관없어.”
“지금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부러 시선을 기울여 희완을 들여다보는 우진의 눈으로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스며들었다. 예뻐서, 꽤나 쓸모 있는 물건이라 생각했었다. 중성적인 외모가 아니더라도 희완의 준수함은 특출 난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설익은 열정이 더해져 쓸데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딱 그 정도만이었더라면, 불행이 비켜 갔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신경 안 써.”
“좋은 대답이 아닌데.”
“…….”
“널 안으면서 한편으론 다른 연놈들 끼고 놀아나도 전혀 신경 안 쓸 거라는 소리. 필요할 때만 불러 욕구를 채우고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다는 소리냐. 너 그런 걸 세상에서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돈으로 시작된 관계고, 또 부채감으로 이어진 인연을 옭아매는 한계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멍하니 발치 어딘가를 응시하던 희완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볍게 훑어 내렸다.
“섹스 파트너.”
거기서 대가가 오가게 되는 거면 스폰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돈을 빌미로 몸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희완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로 대신 욕구를 풀지도 않고, 희완을 강제하지도,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말이 없는 사내에게서 전해지는 것은 감정이었다. 때때로 희완조차 넋을 놓게 되는 그 뜨거운 감정.
“왜 다른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았어.”
일 년. 남자와 떨어져 지냈던 그 일 년간, 희완은 다른 이를 만나볼 기회도 시간도 충분하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회복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지만, 사람의 인연과 만남이란 건 그런 걸 단순한 핑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희완은 구태의연한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저 안에 들어찬 것이 많아서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그것은 빈한한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라서. 희완은 그것을 덜어내기는커녕, 간신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찼었다. 들여놓을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도. 그 남자 외에는 누구도. 이미 꽉 틀어막힌 마음이었다.
“형, 나는 그 사람이 좋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오래전에.
희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어버렸다.
“정말 좋아하고 있어.”
담담한 고백에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우진이 그러냐며, 마른 어깨를 다시 벽에 떨어뜨렸다. 습하고 더운 사우나를 비추고 있는 희미한 조명으로 시선이 두 개가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좋아한다는 녀석이, 그놈이 딴 연놈들이랑 붙어 있어도 신경 안 쓸 거라는 헛소리를 해.”
“그러지 않을뿐더러, 그래도 별수 없어. 나는.”
“연애라는 게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게 맞긴 하다만.”
말을 멈춘 우진이 더 잇지 않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뒤따라 나오는 희완을 돌아보지도 않고 샤워기로 걸어간 우진이 눈을 감은 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남자가 은연중에도 내보이는 희완에 대한 집착을 사랑으로 치환하자면, 아마도 매번 지고 들어가는 것은 남자일 터였다. 우진이 입원해 있는 동안 모든 병원비와 수술비는 익명으로 값이 치러져 있었다. 아니, 애초 비용이란 게 매겨지지 않았다. 우진은 끝까지 특실환자였고, 대우 역시 그에 비례했다.
그 사실을 학정도 묵인했고, 우진도 묵인했고, 희완도 묵인하였다.
남자가 치른 값이었다. 그가 희완에게 치른 값.
몸과 섹스 따위가 아닌, 그가 마음을 빚진 값이었고, 그걸 희완이 모를 리 없었다. 일 년 동안 묻어 둔 채로 제 심산을 추스른 희완을 결국 돌아가게 한 것은 남자의 그 묵묵함이었을 것이다. 조용히 발치를 따라오는 그 무게. 우진 역시 그런 것들을 알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고 잊어도 결코 떼어지지 않는 것들.
대충 몸을 씻고 이미 가득 차 있는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으니 희완이 뒤따라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놈도 네가 딴 연놈들이랑 뒹굴면 상관 안 할 것 같으냐고 물으니,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희완은 그건 아닐 거라는 답을 주었다.
꼼짝도 못 하는 반 시체 데리고 도망가겠다는 걸 못 참아줘서 미친놈처럼 굴었다는 놈이, 잘도 그걸 두고 보겠다는 게 우진의 심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어리숙하다 못해 순진해 빠진 놈이 그걸 아는 게 기특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하고, 긴 시간 입원해 있는 동안 어찌 저찌 주워듣게 된 이야기 속에서 약 2주간 특실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을 둘러싼 루머는 우진으로 하여금 희완을 데려다 제 앞에 불러 앉히게 하였고, 희완은 거짓도, 숨김도 없이 우진이 묻는 것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물으면 묻는 대로 에두르지 않고 곧이곧대로 답을 해주는 건 어려서부터 희완의 버릇이었다. 그런 희완을 학정은 새끼 품은 놈처럼 그리 싸고돌았다. 학정을 따라 출강 순회공연을 돌면 매번 따라오는 게 어린 희완의 검은 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진도 그 눈을 보는 게 즐거워졌었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이 깃든 눈이었다.
깨끗한 온탕에 앉아 학정이나 작품애기에 몰두하다, 또 별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다, 또 다른 작품 얘기를 하다, 시간을 보내던 희완이 먼저 빨갛게 익은 몸을 건져내었다. 등을 밀어 주겠다는 우진의 앞에 돌아앉아 제 발가락을 문지르던 희완에게로 뜨거운 물이 한 바가지 끼얹어졌다. 으억, 뜨겁습니다. 때 한번 기깔나게 밀린다. 이 자식, 너 언제 밀고 안 밀었어? 제법 맛깔나게 경성의 말투를 구사하던 우진이 매번 밀어 준다는, 희완의 답에서 빠진 주어를 듣지 않고도 알아채 등짝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바짝 대라고 한 소리 했다. 곧 희완에게서 앓던 이가 빠지는 듯한 신음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각자 등을 밀어 주고 사우나에서 몇 번 더 땀을 뺀 둘이 욕탕을 나왔을 때 마루는 텅텅 비어 있었다. 매대에서 대놓고 엎드려 자던 알바생도 없었고, 마루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골던 사내 둘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었나 하는 희완이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선풍기 앞에 섰다. 다른 쪽에서 벌써 머리를 말리고 있던 우진은 스킨로션을 대충 얼굴에 바르고는 담배만 챙겨 발가벗은 채로 흡연실로 향하였다. 팬티만 먼저 꿰어 입은 희완도 곧 그 뒤를 따랐다. 벽에 걸려 있던 가운을 내미니 그걸 맨몸에 걸친 우진이 담배를 내밀었고, 입으로 받아 무는 희완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빠끔빠끔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내일 시골서 학정 부모님 올라오신다더라.”
“형 잘 데는?”
“호텔.”
권 회장과 하준우가 갈취해 갔던 돈은 어느 순간 고스란히 우진의 통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걸 굴리지도 버리지도 않은 채 통장에 쌓아 두었던 우진은 이따금씩 이런 용도로나 쓰곤 했었다. 밥을 먹거나, 장을 보거나, 청소 업체를 불러 학정의 비좁은 아파트를 뒤집어엎거나, 호텔에서 묵거나 할 때.
“또 선보라셔?”
“그 나이 되도록 장가 안 가고 버티니 노친네들 늙는 소리가 예까지 들려.”
“안 뵌 지 오래됐는데.”
“얼씬도 하지 마. 너도 노친네들 잔소리에 시달릴 거다.”
그러면서도 학정 대신 우연히 전화를 받기라도 하면 두 노인 긴 하소연을 군말 없이 들어 주기도 하는 우진이 길게 담배 연기를 뱉으며 희완의 머리칼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 다 건조되지 않아 축축한 머리칼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얽혀 왔다. 뼈를 다 드러내었던 손등도 손톱이 빠져 거멓게 죽었던 손끝도 모두 말끔히 회복이 되어 가느다란 머리칼이 실처럼 감아졌다.
“오늘 자고 가라.”
“응.”
맵시가 좋은 입술 새로 연기를 뱉어내는 희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벽에 기대어 서서 한참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미간을 좁히고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지나가던 스태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그에 화답하여 핸드폰을 꼭 쥔 채 다시 연습실로 들어선다. 보컬 레슨과 동시에 시작한 연습은 각 페어 당 할당된 연습 시간이 달랐고 제작사 내부의 작은 연습실엔 희완과 우진, 그리고 연출과 음악 감독이 한창 연습 중에 있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고 다시 극으로 돌아가기 전에 악보와 대본을 번갈아 숙고하던 연출이 우진을 불러 세웠다.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던 우진이 가슴에 걸린 티를 끌어 내리며 그리로 향하였다. 사건 후 한동안 몸에 남았던 흔적들은 제법 희미해져 있었다.
“여기서 감정이 너무,”
“그렇습니까.”
“좀 더 응축시켰다가 터트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혼란이 심화되는 장면이지, 혼란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아니니까. 그- 손끝으로 ‘나’ 의 뒤를 더듬는 건 좋았습니다. 희완 씨, 이리 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