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65화 (65/123)

병원에서 링거를 맞은 우진이 도통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하룻밤 입원하는 쪽으로 결론을 보았다. 경성이 들러 희완의 몫으로 싸 들고 온 도시락을 건넸고, 곤히 잠든 우진을 두고 근처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짧게 환담을 나누는 동안 희완도 허기를 채웠다. 그리 배고픈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아침 이후 뭘 넣은 게 없어 공복이었던 희완은 꽤 푸짐한 도시락을 깨끗이 해치웠다. 더 사다 주랴? 묻는 경성에게 고개를 젓고 간단히 양치를 하고 나오니 그가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벌써 가십니까.”

“얼굴 보러 온 거지. 너 끼니도 챙기고, 심각한 건 아니라지?”

“네. 가벼운 몸살이랍니다.”

“그래. 너도 여기 있을 생각이냐.”

“네. 달리, 갈 곳도 없어서요.”

잠시 남자의 얼굴이 스치긴 하였으나 싱긋 웃는 희완이 선선히 답을 했다.

“대신 있으면 좋겠는데. 술자리가 있어서.”

좁은 바닥이라 어느 제작자 사장이든 잘나가는 극단 단장이든 선후배 관계로 얽히고설켜 그 흔한 술자리도 편하게 파토 낼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학정에서 그나마 그런 자리에 꼬박꼬박 얼굴 드밀며 이름값하고 있는 경성은 극단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연출에게 전해 듣고 가는 길에 들른 것이라 했다.

“우진 형은 한 살이라도 어린 제가 더 좋을 겁니다.”

“하긴. 저놈이 영계를 좀 밝히긴 하지. 첫날부터 널 콕 찍고 두루두루 못된 것만 가르친 것도 저놈이었으니.”

“아, 제가 못된 걸 배웠었습니까.”

“이렇게 또랑또랑하게 눈 크게 뜨고 바른 말만 골라 하는 것도 못된 짓이지. 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희완의 반듯한 이마를 쿡 찔러 넘긴 경성이 곧 병실안의 우진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으로 일별을 하였다.

“너도 옆에서 눈 좀 붙여.”

“네.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구요.”

“새색시 얻은 것 같고 좋구나.”

희완을 가볍게 끌어안은 경성이 키득거리며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그를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온 희완도 병실에 딸린 욕실에서 가볍게 세수를 마치고 나와 의자를 끌어다 우진의 머리맡에 앉았다. 영양제와 안정제를 동시에 맞아 깊이 잠든 우진은 좀처럼 눈을 뜨는 법이 없었다. 열이 내린 이마엔 식은땀마저 싸늘하게 식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재건 수술로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콧대와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을 풍기는 데 일조를 하는 얇은 입술 아래로 아직 뚜렷이 자리하고 있는 칼집을 응시하던 희완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학정의 말을 희완은 눈앞의 우진을 보며 절감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매번 혼미한 정신으로 저를 올려다볼 때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던 누이 역시 저에게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희완의 시선이 기울어졌다.

어둡고 긴 터널을 굽이굽이 돌아 나오며 희완은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 길의 끝은 밖이 아닌 저 바닥일 것이라 예감했다. 젖어 있는 발에 엉겨 있는 것들은 누구도 떼어 주질 못하였다. 학정도, 우진도, 남자도. 희완이 스스로 날카로운 햇빛에 발을 내어놓고 엉킨 것들이 말라 굳어 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굳은 것들이 , 부서져 흩어지고서야 가까스로 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희완을 뒤에서부터 앞에서부터 밑에서부터 세우고 있던 것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앞장선 학정의 등을 보며 따라 걸었고 등짝을 매섭게 때리는 우진의 손길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으며 또 불안한 제 발밑을 지탱하여주고 있던 남자로 인해 간신히 무너질 듯한 바닥을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 혼자서 서야하는 길은 곧 혼자서는 설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우진의 손등을 눈길로 쓸어내리던 희완도 보호자용 침대에 몸을 누이고 가만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희완은 눈을 감고 얼마지 않아 금세 잠이 들었고, 그가 새벽에 눈을 뜬 건 제 어깨를 가만 흔들어 오는 손길 때문이었다.

새벽같이 아파트를 나선 노부모를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리고 곧장 병원으로 왔다는 학정이 흔들어 깨운 희완을 먼저 집으로 보내었다. 너도 몰골이 말이 아니라며, 집에 가서 편히 몸 좀 누이고 오라 희완을 내보낸 학정 역시 썩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덥수룩했던 수염이 그새 증식해 있었고, 살이 내린 건지 움푹 패인 광대뼈 아래로 인해 인상이 더욱 거칠어 보였다. 딴 거 말고 택시 타고 들어가라며 손에 쥐여 준 만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완이 막 들어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는 없는데, 하면서도 구겨진 지폐를 펴서 지갑에 넣은 희완이 목적지를 말했다. 남자의 아파트였다.

들어선 곳은 조용했다. 귀가 전인지, 출근 전인지, 알 수 없는 남자는 부재중이었고, 텅 비어 있는 넓은 아파트 내부를 감도는 것은 서늘한 정적뿐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을 가로지른 희완이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열린 창 너머로 길게 비추어지는 새벽의 여명이 사방형의 테이블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앉아 그 희미한 빛을 응시하고 있는 희완은 저 밑에 고여 있던 묵직한 것이 갑작스레 부피를 늘려가며 차오르고 있는 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아파트를 채우고 있는 것은 쓸쓸한 적막함이었다. 희완이 없던 일 년 동안 이 메마른 공간에서 홀로 지냈을 남자를 떠올림으로 뻐근해지는 가슴 한쪽께를 문지르던 희완은 검게 드러워진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제가 남긴 흔적을 단 한 조각도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던 남자의 마음은, 희완으로선 짐작기도, 가늠키도 어려운 것이었다. 자각해버린 마음은 단 이틀을 견디는 것에도 이리 불안과 초조를 동반하며 희완의 그리움을 뒤채었다. 단 이틀이어도, 이리 오래도록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건 오랜만이라 새삼 지난 시간의 무게에 가슴을 매어놓고 있던 희완이 손끝으로 푸르게 덮인 빛을 더듬었다.

남자에게서 풍겨지는 체향을 굳이 색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것이리라.

남자의 체향으로 시작된 기억으로 성마르는 것 같은 가슴에 젖어드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희완이 그 손끝으로 제 입술을 덮었다.

병실을 잡아 놓고 밑이 헐도록 당하는 내내 그에게 상해를 입는 만큼 희완 역시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그를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는 착각은 그 안에 쌓아 두었던 온갖 악의란 것을 몽땅 쏟아붓게 만들었다.

좋아한다면서 돈으로 그 상대를 사는 행위, 원한다면서 몸만을 갈구하듯 게걸스럽게 육체를 탐하던 행위, 희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제대로 납득할 수도 없었던 그러한 관계들은 고스란히 남자의 공간에 쌓여 있던 마음들이었다. 한길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을 어찌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시 이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와 남자를 품에 안았을 때 희완은 그 마음의 실체를 인정해야 했다. 놓아주지 않아도 달리 길이 없던 희완을 보내준 남자의 마음을 인정해야 했다. 몇 번이나 희완을 억지로 잡아채 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이 황량한 공간을 우리 삼아 어슬렁거리던 그의 발치에 쌓인 가시덤불을 본다. 희완에게로 향하지 않기 위해 그 스스로 쌓아 놓은 덤불이었다.

오랜만에 닿았던 몸은 머리부터 뜨거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입술을 비비며 엉켜들었을 때 희완은 차게 식었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몇 발자국 더 가지도 못하고 현관에 엎어져 빈한한 몸을 갑작스레 덮쳐 오던 허증을 채우려고 안달을 내었다. 서로의 옷을 미처 다 벗기지도 못하고 하의만 간신히 끌어 내려 살갗이 벗겨지도록 몸을 비비적거리는데 그것만으로도 화득해진 속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맞붙은 그에게서 진하게 맡아지는 체향에 흥분한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입술이 붙여지며 뜨거운 살덩이가 서로의 속을 갉아내듯 핥아 올렸다. 남자에 의해 셔츠가 뜯어지듯 벗겨지고 살갗을 물렸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바지춤으로 집어넣은 손으로 남자의 것을 주무르던 희완이 경직한 건 그때였다.

예민하게 선 희완의 유두에 남자의 입술이 닿은 순간 저도 모르게 등 뒤로 한기가 스치며

움찔하고 말았다. 한참 열이 올라 있던 남자의 검은 눈이 멈칫 희완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마주한 희완이 다시 먼저 그를 끌어당겼다. 너무 오랜만이라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그를 안고 입을 맞추는데 이번에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남자의 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 둔덕에 감추어진 비부를 건드렸을 때 희완이 그만 꽁꽁 얼어붙고 만 것이었다.

놀란 희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괜찮은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은 오히려 이렇게 뜨겁기만 한데, 남자의 손이 닿기만 하면 얼어붙어 가는 몸이 이상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타버릴 것처럼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희완의 얼굴 역시 하얗게 질려 갔다. 그것을, 그 위에서 말없이 내려다보던 남자가 가만 눈가를 쓸어 왔다. 그조차도 그 순간에는 받아들일 수 없어 희게 질리는 희완의 눈가를 연신 쓸어내리며 진정을 시켜주는 남자를 바라보던 희완이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남자가 안으려는 순간 이 미련한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희완은 안에서부터 굳었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증세는 더욱 심해지기만 해, 덜덜 떠는 제 손을 올려다보던 희완의 어깨를 따뜻한 것이 덮어 왔다. 남자의 손이었다. 그것조차 움찔 떨며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뚱이가 당혹스러웠고, 단 한 번도 쉽게 가질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원하는데, 이렇게 원하는데,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란스러워하는 희완에게 그럴 것 없다며, 가만 다독여주던 어깨를 조심스럽게 안아 품으로 당기는 남자의 가슴에 등을 맞댄 희완의 어깨가 서럽게 움츠러들었었다.

소파에 앉아 고치처럼 웅크려 있던 그때의 잔상이 남은 현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희완이 시계를 보았다. 남자의 일과는 규칙적이었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가 하는 일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지만 불안은 이처럼 전염되는 습성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남자에 대해 배제하려는 마음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떠나오는 건 항상 희완이었지만 남자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등을 떠밀어 보내면서도 돌아오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약 없는 그 마음을 희완은 가늠하지 않으려 했다. 이 뜨거운 불덩이를 인정하면서도 남자를 완벽히 알아 가는 것에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완은 늘 남자를 원했다.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몸을 섞을 때마다 경직되어 가는 희완을 다독여 가며 차근차근 몸을 열어 오는 남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도 있었다. 억지로 밑을 열어 남자의 것을 들이밀려 할수록 더욱 빳빳해져 가는 몸을, 제 것인데도 제어할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 전해지지 않는 마음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저는 정말로 남자를 원하고 있다고 천 번을 말해도 꽉 닫힌 몸뚱이가 거부해 내면 희완으로서는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 모든게 거짓이었다고, 악을 쓰며 울부짖던 때의 악의가 그대로 비수가 되어 온몸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남자의 곁에 있는 이유를 그가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렇게 또 이기적이었다.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올려다보던 희완이 몸을 일으켰다. 웃옷을 벗으며 욕실로 걸어 들어가 불을 켠다. 거울에 비친 몸은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제는 많이 열린 몸을 삽입 없이 장난처럼 섞기도 하며 진득하니 희완을 훑어 오는 남자는 예전처럼 적나라하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과 섞여 뒹굴어야 하는 희완에겐 좋은 일이었지만 관계 후에도 그의 흔적이 남지 않는 몸은 낯설고 또 허전하기도 했다. 삽입 후 그 뭉근하게 남아 있던 열기와 이물감들은 이제 어땠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샤워볼을 당겨 발가벗은 몸을 적시는 희완이 제 발치로 빨려들어 가는 물줄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니 뒤로 손을 뻗어 밑을 만져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자의 손이 닿기만 하면 바짝 수축하여 신경을 곤두세우는 곳은 한껏 벌어져 잘 다물어지지도 않던 때도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손을 더듬어 이번엔 제 유두를 만지는 희완이 옅은 숨을 뱉는다. 그나마 여기는 나아진 정도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물어뜯기고 잡아 당겨져 덜렁거리던 것은 흔적도 없이 회복이 되었음에도 몸에 남은 기억은 지나치게 정직했다.

아직도 어리숙한 제 몸에서 손을 떼어 내며 점점 거세어지는 물살에 몸을 맡긴 희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승도가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를 발견하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둥그렇게 솟아 있는 형체가 잡혔다.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승도의 걸음이 그리로 향한다. 재킷 단추를 풀어 테이블에 걸어 놓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는 그가 소파 앞에 서서 희완을 가만 굽어보았다.

대본을 보다 잠이 든 건지 벌써 닳아 헤어진 책자를 가슴에 얹고 긴 속눈썹을 내리감고 있는 흰 얼굴이 곤하였다. 이틀간 보지 못한 얼굴은 여전히 준수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 심상을 일으키게 하는 그늘을 담고 있었다. 그걸 묵묵히 내려다보던 승도가 장신의 몸을 집어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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