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니가 알아 뭐 하게.”
“물어볼 사람이 형밖에 없어.”
새삼 뭐가 궁금해 이러나, 뜸한 눈길로 희완을 응시하던 우진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거의 눕다시피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희완의 검은 눈동자는 알코올에 젖어서 평소보다 더 도드라져 있었다. 가만 보고 있자면, 속 시꺼먼 사내새끼들이 환장하고 덤벼드는 까닭을 알 것 같은 눈이었다.
“뭐 얼마나 거창한 걸 물어보려고.”
“연애라는 게 어떤 거야?”
“니가 지금 그놈이랑 하고 있는 건 뭔데.”
“모르겠어. 이런 게 연앤가….”
“돈 안 받고 한 놈하고만 섹스하면 그게 연애지 달리 연애가 있어.”
“그럼 그게 원래 이렇게 가슴이 묵지근한 건지.”
중얼거리듯 뱉으며 뱃가죽을 문지르던 손으로 제 가슴께를 누르는 희완이 내리 깔고 있던 속눈썹을 기어이 꾸욱 닫았다.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뜨거워져.”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
툭 떨어지는 음성에 기가 차다는 눈초리로 희완을 응시하던 우진이 미간을 좁힌다.
“몸이 어떻게 뜨거워지는데.”
“그 남자 걸 계속 담고 있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던 희완이 꾸벅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 꼴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우진이 한참만에야 미간을 찌푸리며 희완의 상기된 뺨을 쿡 찔렀다. 이 호랑말코 같은 녀석이.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줄은 알고나 이러는 건지. 할 짓 다 해놓고 아무것도 모른다며 기함할 소릴 뱉어놓곤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희완을 툭툭 건드리는 우진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대체 애를 어떻게 놀리기에 아직도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건지. 스폰으로 시작한 관계가 연애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덧입혀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우진이 둘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만큼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희완이 그와 떨어져 보낸 일 년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런 어수룩한 놈을 배우라고. 이래 가지고 연기는 어떻게 하려는지.
나참, 뭐가 어쩌고 저째. 뭘 담은 것처럼 뭐가 시도 때도 없이 뜨거워져?
기도 안 찬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시름시름 죽어가며 싫은 짓을 하는 놈이 이렇게 얼굴 발갛게 물들여 가지고 와서 잘 모르겠다고 앓는 소릴 늘어놔 봐야 하나 설득력이 없다. 앞으로 작품 수가 늘어 가면 가짜 연애 수없이 해야 할 텐데 지가 뭘 하는지도 제대로 몰라서. 뭐 이런 꼴통이 연기를 하겠다고 굴러 들어와선 이런 어이없는 웃음을 주시나. 아주 베드신이라도 찍고 오는 날엔 참 볼만하겠다며, 중얼중얼하는 우진이 곤히 잠든 희완을 옆으로 누이고 베개와 이불을 챙겨 덮어준다.
깨진 유리를 쓸어 담는 순댓집 주인을 흘긋 넘겨보던 승도가 담배 연기를 훅 뱉어내며 차에 올랐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몰려든 용역들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영세 상가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오는 승도의 시야로 식당 물품을 뒤집어엎으며 소란을 피우는 용역의 모습이 비쳤다. 신고해 봤자 이런 곳으로는 발길도 두지 않으니 누구나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 치안에 대해서 묻던 철진에게 클럽 북쪽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상 신경 쓸 것 없다던 승도가 큰길가로 빠져나가며 창문을 올렸다.
백승도는 그들이 세 들어 사는 부동산 소유주이지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 책임자가 아니었다. 깡패들의 영업 방해로 세를 제때제때 못 내어 장사가 망한다면 세를 빼면 되고, 그로 인해 이 일대가 다시 유령도시로 회귀한다 해도 승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월세를 받아먹으려고 세를 놓은 것이 아니라 놀리는 땅 그냥 두기 아깝다며 철진이 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장사에 불과했다. 부동산 실소유주를 압박하기 위해 깡패들이 죄 없는 세입자를 괴롭히는 것이었지만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거다. 이 일대가 영영 죽은 땅으로 변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조용한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차 세우기가 마땅찮은 대학로 주변을 한 바퀴 돈 승도가 자리가 난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섰다. 한참 희완에게 후원 아닌 후원을 해주겠다고 별짓을 다 하던 때 철진을 통해 제작사에 들어앉힌 박상수가 꽤 일을 잘하고 있다 했다. 공모전으로 모집한 작품을 판권만 사들이는 게 아니라 투자와 후원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도 망한 작품보다 성공한 작품이 훨씬 그 수를 웃돌아 유명 제작사로 이름 날린 지 오래였다. 물론 그 기반에 탄탄한 자금이 있었지만, 웬만한 감각으로는 성공시키기 어려운 문화 사업을 이 정도까지 올려놓은 건 훌륭한 일이었다.
소극장과 중극장 작품들을 넘어서 이제 대형 뮤지컬에까지 그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연 기획의 평판이 좋은 건 수익이 적든 많든 배우들과 극단에게도 그 수익을 골고루 분배하기 때문이었다. 자금 탄탄한 기업이 밀고 들어와 알맹이만 쏙 빼 가도 울며 겨자 먹기로 투자금을 챙겨야 했던 극단들이 연 기획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는 까닭도 그 이유에서였다.
좁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대학로 거리를 돌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아직 건물을 올리고 있는 공사 현장이었다. 총 8층 건물로, 각종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극장용으로 설계하여 작년 7월부터 시공에 들어가 올 9월, 다음 달이면 개관될 장소였다. 진작부터 올려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또 화대니 뭐니 그 작은 머리로 괴로워할 게 뻔하여서 미뤄 두고 있다가 작년 희완과 헤어져 있던 시기에 충동적으로 올리기 시작한 건물이다. 심지어 초기 상가 이름은 희완이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이름으로 바꿨지만 이 건물은 희완의 것이었다. 물론 알릴 생각은 없었다.
기초공사는 일찌감치 끝내고 마지막 층 뚜껑을 덮고 있는 공사 현장으로 불쑥 들어가 한 바퀴 돌고 온 그의 구두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는 길에 대리점에 들러 값을 치른 핸드폰을 전해 주려 온 것이다. 비싼 걸 사주면 간수를 더 잘하겠지 싶어 일부러 최신형을 골랐다. 한 손에 종이 가방을 들고 희완이 연습하고 있을 뮤지컬 제작사 건물로 향하는 승도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계단 아래서부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주라고는 격정적인 피아노 하나만 깔아 놓고 템포가 빠른 넘버를 제법 능숙하게 불러 재끼는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희완의 탁한 미성에 이어 힘 있게 터지던 상대의 음성이 어느 순간 뚝 그쳤다. 더운 열기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기 위해 활짝 열어 놓은 문간에 선 승도의 눈이 일순 희미하게 번뜩였다.
우진에게 어깨를 붙잡힌 희완의 입술이 스륵 벌어졌다. 붉은 살갗이 맞붙었고 가볍게 얽히다 깊어지는 혀의 뒤섞임이 질척한 소리와 함께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우진의 팔을 꼭 쥔 희완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는 데 반해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의 볼은 달뜬 빛을 띤 채로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더 다가오지 않는 우진을 애타하며 그를 좀 더 당겨 안으려던 희완의 팔이 거칠게 뿌리쳐졌다. 돌아선 우진을 바라보던 희완이 머뭇거리며 내민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시 한 번, 매정하게 그를 내치려던 우진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둘의 몸이 겹쳐졌다. 잠시 멈추었던 피아노 반주가 감정의 고조를 더하듯 빠르게 연주되다 뚝 끊어져 버린 순간, 뜨거운 키스가 시작되었고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하는 그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정적으로 휩싸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열린 문을 통해 환희에 젖은 희완의 몸짓을 보고, 헐떡거리는 그의 숨소리를 모조리 듣고 있던 승도의 입술에서 짙은 담배 연기가 내뱉어졌다. 한참 극에 몰입해 있다 연출의 박수 소리에 정신없이 휘감았던 혀를 떼어 내며 우진에게서 떨어지던 희완이 언뜻 그 냄새를 맡고 돌아보았을 땐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브라바! 잘했어요. 방금 진짜 좋았습니다.”
무뚝뚝할 것 같은 성격과는 달리 작품에 있어선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분하여 쓸 줄 아는 연출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 옆에서 번들거리는 입술을 무심히 닦아내던 우진이 한눈을 팔고 있던 희완의 주의를 끌었다. 제 침이 묻어 있는 희완의 입술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주고 생수를 건네던 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출의 찬사를 시큰둥한 얼굴로 응수했다. 꽤 흥분해 있는 연출의 반응은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1막을 완벽하게 끝마쳤다. 리허설 중에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을, 한 달을 꽉 채우고서야 겨우 해낸 것이다.
우진이 술자리 참석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연출이 저녁 식사 자리를 잡았다. 이 근방에서도 꽤 단가가 센 요릿집에서 식사를 하며 우진을 배려해 반주 한잔하지 않은 연출의 신상명세가 줄줄이 읊어지는 동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노총각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니던 연출이 놀랍게도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티는 안 나겠지만 사실 저는 품절남이라며, 거추장스러워서 손에는 끼고 다니지 않는다는 반지를 대신 목에 걸고 다니던 걸 빼어 보여주며 싱긋 웃는데, 이제 신혼 1년 차라는 말이 그제야 신뢰가 갔다. 영화 공부를 하다 나이 서른에 뮤지컬에 꽂혀서 3년 유학 후 귀국과 동시에 바로 이 작품을 맡은 거라 했다.
브로드웨이에선 규모가 작은 뮤지컬을 이례적으로 성공시켜 데뷔와 동시에 연출상을 휩쓸기도 했다는 말은 우진도 희완도 금시초문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국외에서 훌륭한 상을 받고 들어와도 폐쇄적인 국내에서는 인맥과 자금력이 아니라면 작품 하나 맡기도 어려운 게 이 바닥 실정이었다. 때문에 아무 빽도 없이 국내 데뷔와 동시에 화제의 작을 맡게 된 건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도우진 씨 연기는 단막극 조연으로 출연했을 때부터 좋아했었다며, 잘나가던 한때 그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는 백마 탄 왕자님 역만 줄줄이 맡는 걸 보고는 무척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는 연출은 또 희완의 첫 작을 기억한다고도 했다. 스무 살 청년이 첫 연극 주연을 꿰찬 게 놀랍기도 했고, 그 평이 또 박한 건 아니라 관람을 갔다가 한 번에 낚였다는 소리였다. 희완 씨 얼굴은 화선지 같은 면이 있다고, 뭘 그려 넣어도 깨끗이 흡수해버리는,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며 객쩍은 듯 아하하 웃던 연출이 결심이 어려웠을 텐데 흔쾌히 수락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우진에게 뒤늦은 인사치레를 해 왔다.
“나는 두 배우를 무척 좋아합니다. 아끼기도 하고요. 워낙 개 같은 바닥이라 여긴 그런 것들을 아낄 줄 몰라요. 쓰고 버리면 또 어디서 캐어지는, 그런 일회용으로밖에 생각을 안 한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도우진 씨에게도 연희완 씨에게도 이번 작품이 큰 의미가 되겠지만, 내게도 참 남다른 작품이 될 겁니다. 제가 오죽했으면 두 분 같이 캐스팅하려고 실력 좋은 두 아이돌 배우님들 잘라내는 척을 했겠어요.”
이로써 총괄 팀장의 의심이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희완이 오른 차는 남자의 아파트로 향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기분 좋게 취한 느낌이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시원하게 불어 밤바람을 맞으며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희완이 턱께를 문질렀다. 드물게 편안하게 웃던 우진의 웃음소리와 그런 우진을 동정과 터부의 눈초리가 아닌 동경과 신뢰를 담은 눈으로 응시하던 연출의 눈빛이 떠올라 뱃속 깊은 곳을 뜨끈하게 데워 왔다. 넘어져도 일어서기만 하면 다시 걸어갈 수 있다고,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서 주저앉아야겠다면 쉬면 된다고, 다시 걸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길 때까지 앉아서 숨을 돌리고 기운을 차리면 되는 거라고, 창문에서 뛰어 내리려던 이후에도 몇 번씩 자살시도를 하였던 우진에게 학정이 뱉은 말들은 희완의 가슴에도 맺혀 있었다. 어느 길은 빙 돌아야만 도착할 수 있는 길이 있고, 희완에게도 그런 길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서는 동안 내내 제 뱃속을 간질이던 어떠한 감각을 놓칠까 걷다 서다 하며 더디게 안으로 들어선 희완이 텅 비어 있는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물속을 부옇게 떠다니는 모래사막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