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80화 (80/123)

우진이 무대로 구현된 자리에 들어서기 전 이미 나와 있던 희완은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물이 빠진 얇은 청바지에 살이 없어 도드라지는 뼈대가 반듯해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그는 명문가에서 반듯하게 자라 온 ‘나’ 의 현신 같기도 사랑에 실패한 유약한 몽상가 같기도 했다. 귀를 살짝 덮은 그의 까만 머리칼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살짝 나부꼈다.

이윽고 의자에 앉은 ‘나’ 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무엇보다 우진과 희완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던 총괄 팀장인 만유의 찬사가 가장 요란스러웠다. 이대로라면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어쩜 이런 것들만 착착 골라 왔느냐며 연출을 그대로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아주 예뻐해 주던 만유가 흥분된 어조로 희완을 불렀다.

“와, 진짜 오늘 너무 대단했어요. 어쩜 이렇게, 도우진 씨 정말 괜히 실력파 배우로 불렸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마약중독이란 얘기 듣고 정말 걱정했었거든요. 지금도 술 안 대는 이유가 그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이겨낼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딴 건 다 용서해도 약쟁이는 용서가 안 되는데, 내 그런 편견을 우진 씨가 타파해줬어요. 배우는 여러 번 부러지고 으스러져야 진짜 참연기를 한다더니 그게 빈말은 아닌가 봐. 너무 잘해줬고, 이대로 약에만 손대지 말구 쭈욱 가자고. 그리고, 우리 연희완! 연희완이, 연희완이! 어유 어디서 이런 게 굴러들어 왔을꼬?”

가만 놔두면 말 그대로 정말 희완을 물고 빨고 할 기세인 만유를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던 우진이 희완을 끌어다 저만치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고로 기분 좋은 상태인 만유가 푸흐흐흐 웃어가며 희완의 머리칼을 또 흩트려 놓는다.

“안 그래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한테 덜컥 주연을 맡긴다고 노심초사하는 중에 연출이 너무 순둥이로만 표현한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었다고! 그런데 마냥 순둥이만은 아니었네. 아니,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매달릴 생각을 다 했어? 보통 다들 보면 꽤 구태의연하게 표현하던데. 사랑으로 해석한 거야? 아닌데, 내 눈엔 애증도 보였다고. 그렇지 않아, 장 연출?”

앞서서도 다른 페어들한테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더니 이번에도 역시나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입에서 침이 튀어 나가도록 칭찬에 칭찬을 거듭하는 만유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던 연출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맘에 안 든다고, 캐스팅 안 바꾸면 이 건 엎어버린다고, 아니 엎을 필요 없이 너 하나만 갈아 치우면 끝이라고 웃는 얼굴로 온갖 협박이란 협박은 다 하더니, 결과가 좋으니 과정이야 상관없다는 사업가 마인드를 만유는 굳이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예술을 않고 사업을 하니 이 제작사가 이리 승승장구를 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성향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연출은 만유의 저러한 속물근성도 싫어하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예술가들과 종종 부딪칠 때도 있지만 유들유들한 저 성격은 그런 위기도 곧잘 넘기곤 했었다. 연출도 만만찮게 까탈스러운데 만유에겐 이 정도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마무리하고 팀장님께서 저녁 쏘신다니 다들 드시고 가자구요.”

연출의 발표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진다. 특히 풋풋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그 나이대의 어디로 튈지 모를 위험천만함을 고스란히 잘 표현해 낸 아이돌 페어의 리액션이 압권이었다. 이 정도면 팀 분위기가 무척 훌륭했다.

내일 하루 쉬고 모레부터는 FM체제로 돌입하니 오늘 술은 접어 두자던 만유는 작품팀을 한우 전문점으로 우르르 끌고 가 정말 소주 냄새만 맡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배우들은 쏙 빼놓고 제작팀 외 스태프들만 줄줄이 소주를 들이키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그 옆에서 고기도 못 먹고 있는 아이돌 출신 배우 하나가 속상하다는 표현을 과장스럽게 해 왔었다. 희완의 옆에 앉아 풀만 뜯고 있던 지욱은 이제 스물두 살로 한때 정말 날렸던 아이돌 그룹 출신 멤버였고, 현재 해체를 가리기 위한 유닛 팀에서 가장 친했던 멤버와 따로 떨어져 나와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었다. 미팅 때 형식적으로 통성명 한번 하고, 오다가다 눈인사 몇 번 한 게 전부였던 그는 술자리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요즘 한창 몸 만드는 중이거든요. 하루에 칼로리 꼬박꼬박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챙겨 먹어야 하는데 진짜 죽을 맛이에요. 제가 한우를 또 엄청 사랑하거든요. 저 야들야들하고 쫄깃쫄깃한 자태를 그 누가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안 그래도 엄마가 해준 한약 먹고 살쪘다고 매니저한테 엄청 깨졌었는데, 형은 다이어트 그런 거 안 하시죠? 부럽네요. 우린 죽음이에요, 죽음. 사진 한번 잘못 찍히면 완전, 필러 한 방 맞은 걸로 몰고 가는 건 예사고, 나중엔 아예 사람을 성형 중독으로 몰아간다니까요? 아, 물론 여긴 필러를 하긴 한 거지만요. 형은 웬만하면 필러 하지마세요. 이거 한번 하면 계속해줘야 한다니까요? 이거 잘해주시는 선생님들 찾기도 힘들고, 어우 저번엔 입술에 한 번 맞았다가 닭똥집 물고 다니느냐고, 그날도 댓글 완전 살벌했었죠. 제 팬이랑 안티들이랑 싸움 나가지고. 그런데 미안하게도 필러 맞은 게 사실이었답니다.”

낯을 가리는 듯한 첫인상과는 다르게 쉼 없이 말을 끊지도 않고 줄줄줄 읊어대던 지욱이 헤헤헤 웃다 쇠젓가락만 물고 불쌍한 표정으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쳐다보았다. 권하는 게 실례인지 권하지 않는 게 실례인지 순간 헷갈려서 뜸을 들이던 희완의 곁에서 우진이 푸짐하게 하나를 싸서 그 앞에 밀어 넣어 준다. 시무룩하게 변해가는 듯하던 지욱의 표정이 급변한 건 우진의 만능 언어 덕분이었다.

“안 먹냐. 선배 팔 떨어진다.”

자고로 선배가 주는 건 똥이라도 받아먹어야 하는 게 이 바닥 생리라고, 아주 어려서부터 그런 거에 누구보다 잘 길들여져 있을 지욱이 한 쌈 싸 먹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한우 공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간 못 먹은 한을 풀기라도 하듯 작정하고 달려든다. 그렇게 잘 먹는 걸 다이어트 시킨다고 회사에서 못 먹게 한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지욱은 사실 희완보다도 더 말랐었다. 그 곁에서 오늘은 술 한잔 받지 않고 한우만 열심히 구워 먹던 희완이 내일 스케줄을 물었다. 희완이 열심히 날라다 주는 한우를 채 비우지도 않은 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잘 거야, 하루 종일.”

그간 스케줄이 빡빡한 게 사실이긴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체력 기른다고 조깅하고, 레슨받고, 정규 연습에, 희완과는 틈틈이 시간을 맞춰 학정에서 따로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요즘도 단장님 자주 못 들어오십니까.”

“장미호가 들어간다는 그 드라마, 학정을 고문으로 불렀나 봐. 거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어. 장미호가 빽 써주니 다른 일도 줄줄이 들어오는 것 같고.”

톱 배우 파워가 그 정도면 쓸 만하다 하는 우진이 콜라 잔을 비운다.

“넌 내일 뭐 할 건데.”

“자취 집 다녀오려구요. 처분한다 한다 하면서 못 했더니, 가서 지로 정리도 해야겠구요. 그거 다 해지시킨다는 걸 못 했습니다.”

“거기 영영 눌러살려고.”

“일단은요.”

그렇게 하기로 했다며, 어색하게 웃는 희완이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 신세 한탄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한 지욱을 그 매니저가 끌어낼 때까지 상대하고 있자니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갔다. 쯧쯧, 아이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 꼴을 보고 있던 또 다른 아이돌 출신 배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는 소리에 그 자리에 앉았던 모두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만유의 초기 선언과는 달리 중반부터는 배우들까지 음주 레이스에 돌입해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자리 옮길 생각 없이 같은 곳에서 끝장을 볼 셈일 사람들 틈에서 슬쩍 빠져나온 희완이 한우 집에 딸려 있는 후원 한 켠에서 우진을 발견했다. 제법 공을 들여 가꿔 놓은 화단 옆 벤치에 앉아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던 그가 제 곁에 앉는 희완을 돌아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든 사탕을 던져 주었다. 이거 말고 담배 달라는 소리에 반대쪽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손수 입에 물려 준다.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주는 우진의 얼굴 위로 붉은 빛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담배가 늘었다, 너.”

“그러게, 학정 형 싫어할 건데.”

“유난은.”

남은 꽁초를 재떨이용으로 세워 놓은 돌 장식에 비벼 끄는 우진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달달한 게 녹아들어 가며 입 안에서 담배 향과 섞이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뭔 맛인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우진을 피해 담배 연기를 뱉고 남은 것도 빨리 태워낸 희완도 금세 꽁초를 털어 내었다. 그걸 가만 내버려 두는 우진에게서 받은 사탕을 까서 저도 입에 굴려본다.

“누룽지 사탕이네. 어디서 났어?”

“학정이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맨날 주섬주섬 꺼내 놓는 거다.”

옷도 벗지 않고 어디서 가득 챙겨 온 사탕들을 주머니에서 꺼내 거실 테이블에 죄 늘어놓고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자는 게 요즘 학정의 일상이었다. 예전에는 유자차로 그 난리 블루스를 치더니 이젠 사탕으로 갈아탄 것 같다고, 진심으로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우진은 요새 주전부리가 늘은 게 사실이긴 했다. 전에는 단걸 질색해했었는데, 이런저런 치료를 받으면서 자연히 늘게 된 모양이었다.

“수술 일정 또 잡는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올해 지나기 전에 한번 잡아보자고 했었는데.”

늘어뜨렸던 손으로 문득 제 귀밑을 매만져보던 우진이 눈살을 찌푸린다.

“분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분장을 해도 짙은 칼집은 옅게나마 두드러지는 게 사실이라, 희완은 애써 싱거운 위로를 더하지 않았다. 이미 남은 것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는 우진은 그러나 때때로 제 턱 밑으로 와 닿는 학정의 시선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주책없는 인사, 이 얼굴로 무슨 영화판에 기웃거리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귀밑에서부터 턱 밑까지 길게 이어진 흉측한 칼자국은 이젠 보지 않아도 쉽게 연상이 가능한 것이라서 우진은 거울 없이도 그 궤적을 그려낼 수 있었다. 무대에 섰으니 다음은 영화판, 드라마판, 순서대로 복귀를 하길 바라는 게 학정의 속내이리라. 도태되었다면 또 그대로 책임져 줄 인사였으나, 스스로 못 견뎌 돌아왔으니 제대로 해내는 걸 봐야만 직성이 풀릴 학정은 그런 데선 또 가차 없는 인사였다. 원한다고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난장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니 목 아래가 뻐근해지기도 하는 우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집에 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