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온기가 남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 오며 묻는 희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진이 입을 열었다.
“학정이 선본다더라.”
그렇게 버티더니, 어르신들 나란히 서울 상경하셨던 게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노부모가 올라와 계신 동안 틈날 때마다 그 옆에서 시간을 보냈던 우진은 그들이 펼쳐 놓은 사진을 보며 학정의 타입과 비타입을 같이 골라내 주기도 했었다. 시커먼 사내놈 둘이서 부대끼며 산다고 기집들 얼씬도 못 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은연중에 내비치던 그들은 다만 악의도 없었다.
“집을 알아봐야겠어.”
영화판까지 발을 넓히니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불청객들 또한 늘어갔다. 학정이 교통정리를 해도 팍팍한 바닥에서 낯짝 두께만 불려 온 군식구들은 넉살 좋게 웃으며 기어들어 와 좁은 아파트 구석을 차지하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동거인이라도 학정의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었고, 이젠 도통 얼굴을 알 수 없는 놈들이 대부분이라 딱히 싫은 소리도 않던 우진은 급작스레 인구밀도가 높아질 때면 알아서 호텔로 옮겨 가는 일이 잦아지기도 했었다.
“학정 형은 알아?”
일순 호텔 욕조에서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우진을 떠올린 희완이 짐짓 대수롭잖게 물어왔다. 제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을 가볍게 치워내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후원 바깥쪽을 쳐다보는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평생 누군가와 붙어살아야 돼.”
그 끔찍한 짓을 평생 하느니, 차라리 약이 부르는 유혹을 독하게 끊어내는 게 백배 낫다며 훌쩍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오늘도 자고 갈 거냐?”
“아니, 들어가 보려고.”
“그런데도 잡혀 사는 게 아니야?”
왜 자꾸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가볍게 웃는 희완도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식탁에 서서 온수로 목을 축인 희완이 다시 악보를 보았다.
오늘 리허설 도중에 흔들린 부분을 확인하려고 음정을 맞춰보다 흠, 흠, 목이 갈라지는 것 같아 다시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인다.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어서 한번 대사가 꼬이면 그야말로 지옥길이라, 매번 하면서도 긴장되는 장면이었다. 다시 음정 없이 가사만 또박또박 읽으며 발음 훈련에만 집중하던 희완이 다음엔 감정을 섞어 뱉어낸다. 마지막은 음정을 섞어, 넘버 그대로를 부르며 끝을 맺은 희완에게서 짧은 숨이 토해졌다. 좀체 맘에 들지 않는 기색이다.
매번 꼬이는 그 부분을 몇 번 읊조리고 남은 물을 마저 비워낸 희완이 식탁을 더듬어 녹두색 과편을 입에 밀어 넣었다. 한우 전문점에서 잘 구운 걸 몇 점 집어 먹은 뒤로는 뭘 손댄 게 없어 집에 돌아오니 뒤늦게 배가 출출해졌다. 냉장고를 뒤질 것도 없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바구니를 열어 보니 주전부리가 한가득이었다. 평소에도 주전부리에는 취미가 없는 남자가 먹으려고 쌓아 뒀을 리는 없고, 저 먹으라고 놔둔 것일 터였다. 아마도 요릿집에서 가져온 것일 게 분명한 것들을 열심히 씹으며 연습에 집중하던 희완이 다시 빈 컵을 든 채로 정수기로 걸어갔다. 여전히 악보에서는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정수기에 컵을 들이미는데 뒤에서 뻗어 온 손이 컵째로 희완의 손을 붙잡고 온수 버튼을 눌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희완의 이마로 남자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어,”
온 줄도 모르고 있던 희완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 입술을 미끄러트려 뺨을 건드린 그가 물 컵을 빼앗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희완을 돌려세웠다. 등으로 냉장고 문이 닿으며 희완의 고개가 조금 젖혀졌다. 입술을 맞추던 남자가 과편 부스러기가 붙어 있는 입가를 가볍게 훑어주었다. 과편에 굳어 있던 꿀까지 녹아든 입술은 역시 달아,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린다. 이렇게 단걸 잘 먹는 희완이 예전부터 의외이긴 했다. 한번은 다디단 유자차를 어디서 한꺼번에 여러 통을 공수해 오질 않나, 그걸 다 먹지도 않고 가 버려서 한동안은 수납장을 차지하고 있는 유자차를 볼 때마다 그걸 깨부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하기도 했었다. 제어할 수 없는 순간적인 욕구였고, 결국 깨부수는 대신 희완이 남기고 간 자취를 자각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그 충동은 매번 승도의 주변을 맴돌았다. 당연한 이치였다. 희완을 기다렸던 시간은 기다림이 아닌 번뇌였기 때문에 승도는 그것을 잘 견뎠다고도 버텼다고도 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자 해서 기다렸던 것이 아니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두커니 앉아 생각하며 흘려보낸 시간은 기다림이 아닌 집착이라 해도 좋을 것들이었다. 또는 뼈아픈 후회라든지. 어느 쪽이든 결코 속에서 꺼내 보일 만한 것들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평생 희완에겐 내보이지 않을 것들이었다.
제 곁에서 떨어뜨리기 싫어서 억지로 붙여 놓았던 시간들은 오히려 희완이 겨우 제게 붙들고 있던 끈들을 우수수 끊어지게 하는 흉기가 되어 있었다. 한 올 한 올 꿰어 가까스로 얼러 놓았던 것을, 승도는 저를 떠나려는 그 진심을 들여다본 순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 손으로 그것들을 끊어 놓았다. 한 꺼풀 벗겨진 승도의 검은 것을 마주한 희완은 두려워 달아나지도 않고, 잘못했다 애원하지도 않으며, 견디는 것으로 그 폭력적인 관계를 다그쳤다. 그래서 그것이 소용이 있었던가. 스스로 무너져 구석으로 숨어 들어간 희완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며 승도는 무지근해진 가슴 한 켠이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가까스로 연결되어 있던 것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본래 주인이 돌아오면서부터 몇 스푼씩 덜어지기 시작하고, 생명력이 깃드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이처럼 때때로 별스러운 감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말끔히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승도의 눈이 짙어졌다. 그 안에서 뭉근히 피어오르는 열기를 감지하는 희완이 눈길을 내리면서도 물러서지는 않는다. 의외의 면모였다. 화대를 받으며 몸을 팔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승도가 어떤 짓을 해도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대를 받지 않고도 승도에게 몸을 여는 희완은 매번 그렇게 다음 날 몸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시달려지면서도 거부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싫어한다면 강제로 범할 뜻이 없다는 걸 희완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그가 승도를 밀어 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하지만 희완은 그러는 법이 없었다. 때때로 그 단정한 얼굴을 곤란하다는 듯이 이지러뜨리거나, 벌게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정사의 괴로움을 드러낼 뿐, 단 한 번도 가볍게나마 승도를 밀어 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병실에서의 며칠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도의 폭력에 대한 희완의 대응은 오로지 침묵이었다. 때문에 좋다고 달라붙으면서도 매양 일그러지는 흰 얼굴을 보는 것은, 그것이 저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만족스러우면서도 때때로 괜찮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피부결이 좋은 희완의 뺨을 문지르며 그 입가를 꾹 누르니 절로 벌어지는 입술이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혀를 섞은 후 가볍게 떼어 내니 젖은 입술 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공연이 가까워져 올수록 목을 쓰는 일이 많아 무거워진 성대는 희완으로 하여금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내게 했다. 그것 역시 섹시하다 생각하는 승도가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내일 쉽니다.”
묵묵히 말이 없던 남자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할 겁니까.”
그 뒤로 다른 말이 없이 빤히 들여져 오는 눈길에 뒷말을 덧붙이는 승도의 손이 희완의 티셔츠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걸 가만두고 있는 희완이 끌려져 올라간 티셔츠 아래의 살갗으로 닿는 냉장고의 서늘함에 눈썹을 살짝 모았다.
“저번에 말입니다.”
커다란 손으로 제 날갯죽지를 문질러 오며 목덜미를 빨아 자국을 남기는 대신 가볍게 훑어주는 남자가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답을 한다. 이렇게 매일 눈만 마주치면 맞대는 몸인데도 쉼 없이 흥분하고 달아오르는 감각은 매번 다르기만 했다.
“술에 취한 날 말입니다.”
살갗이 간지러울 정도로만 등을 쓸어주던 남자가 그제야 하던 걸 멈추고 온전히 희완을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레 몸을 만져 오던 손을 거두어 가며 한 발 물러서 식탁에 기대어 앉는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 보라는 눈짓에 손끝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던 희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잠시 머뭇거렸는데 곧 입을 열었다.
“혹시 안아 달라 조르기라도 했던 겁니까.”
언젯적 일을 이제 와 묻는 거냐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희완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필름이 없던 시간, 기억에도 없는 동안 제가 또 남자에게 다른 추태를 보인 건 아닌가 하여, 걱정이 되었던 거다.
이제 더는 남자 앞에서 까발려 보일 것도 수치심에 붉힐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희완은 여전히 그와 몸을 섞을 때마다 발갛게 몸을 물들이곤 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리 익숙해져 간다 해도 쉽게 면역이란 게 되지 않는 것들이다. 어쩌면 영영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의 것은 매번 품을 때마다 희완을 다른 방식으로 몰아붙여 가곤 했고, 그나마 이젠 그런 게 괴롭다기보다는 걱정스러울 뿐이라는 게 달라진 거라면 달라진 점이었다.
“무슨 말을 듣고 이럽니까.”
내내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묻는 희완을 가늠하는 듯하던 남자는 그리 쉽게 정답을 골라 왔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또 곧이곧대로 전할 말도 아니었다. 단지 희완은 그날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만 알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또 눈앞의 남자는 그것만 쉽게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아 고민이 되었다. 만유의 말을 듣자마자 희완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남자였는데, 만유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둘 다 곤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왜 제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말문이 막힌다.
“연희완.”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손끝으로 귓불을 문지르던 희완이 저를 당기는 손에 가만 따라갔다. 남자의 다리 사이로 몸을 안착시키는데 뜨거운 손이 목덜미를 덮어 왔다. 시선을 든다.
“무슨 말이 듣고 싶어 이럽니까.”
“다음 주에 첫 공입니다.”
말을 돌리려는 속셈인가 싶어 가만 들여다보는 눈에 겹쳐지는 시선이 제법 선선해졌다. 이전이라면 같은 얼굴을 하고도 주눅이 들거나 메말라 있거나 때때로 궁지에 몰린 작은 짐승 같았다면 지금은 비록 긴장을 드러내긴 하여도 그리 볼품없이 허물어질 것 같은 불안은 서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승도는 이 똑바로 선 것을 하릴없이 무너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잘 알고 있었다.
매번 버티다 무너지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던 연희완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건 공교롭게도 그를 구석으로 내몬 그 폭력이었다. 그의 극한을 끌어내어 정신적 공황을 만들어내는 그것은, 어떤 상식으로도 제어할 수 없고, 어떤 방어막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지극히 일상적인 곳부터 거침없이 무너뜨려 오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때문에 업자들이 자행했던 무대 위의 폭력은 지극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한동안은 무대 위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고, 올라가서도 덜덜 떠는 것을 겨우 극복해낸 희완은 여전히 폭력에 대한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다음 주에 첫 공인데.”
계속 다음 말을 이어서 하라는 승도의 재촉에 눈살을 이지러뜨리던 희완이 결국 하려 했던 말을 뱉어 놓는다.
“아무리 졸라도 다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뭐, 섹스 말입니까.”
직접적인 어휘 선택에 눈을 위로 뜨던 희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도의 답은 듣지도 않고 그날 제가 졸라 일이 그렇게 된 것이라 알아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술 취했을 땐 별별 말을 다 써가며 그거 다 승도한테 배운 거라고 잘도 책임을 지우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실상은 취한 희완을 얼음으로 구슬려가며 그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만든 것이었으나 굳이 그의 생각을 정정해주지 않는 승도였다. 졸랐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