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흔적을 남기셔도 안 되고, 삽입도 안 됩니다.”
대기실을 다 같이 쓸 건데 남자의 흔적으로 죄 덮인 몸을 하고 거길 드나들 순 없었다. 삽입은, 그 자체가 무리니 한참 컨디션이 중요할 때에 모험을 감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아무리 제가 졸라도, 그때처럼 술을 먹고 졸라도 절대, 그런 건 안 된다 못을 박는 희완의 얼굴은 그럼에도 산뜻하기만 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요릿집 여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크게 반응이 없는 승도를 상대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성적인 농담도 예사로 던지던 그녀는, 종종 창문틀을 통해 몰래 들여다보곤 했던 희완의 외모에 감탄하며 잊지 않고 몇 마디 던지기도 했었다.
풋풋한 사과 같은 줄 알았는데, 잘 익은 복숭아 같다고 했었나.
주욱 과육을 발라내면 농도 짙은 과즙을 진득하니 흘려내는.
승도는 그 말에 동의도 부인도 하지 않았었다.
“몸에 흔적을 안 남기고, 삽입도 안 하면, 다른 건 해도 됩니까.”
남자의 물음에 잠시 말을 삼키던 희완이 생각에 잠기는 얼굴을 했다.
다시 삽입을 하게 된 이후로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한번 몸을 섞으면 희완부터 이성을 잃어 꼭 끝까지 가게 되고 말았다. 그러니 결국 남자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뒤늦게 이해한 희완이 복잡한 얼굴을 하였다.
“많이 졸랐습니까.”
이젠 아주 그날 밤 일을 기정사실화해서 묻는 희완은 무척이나 곤란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걸 보던 승도가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일 쉰다 했습니까.”
다시 또 처음으로 돌아가는 대화에 말을 아끼던 희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하루 정도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내일 하루 꼬박을 자신에게 상납하면 그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는 승도를 마냥 응시하던 희완이 결국 수긍을 하게 된다.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는데, 하루 꼬박이라는 말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기색이었다.
뭘 하자고 못을 박은 것도 아닌데 하루 꼬박이라는 말에 그런 쪽의 의미를 둔 건 희완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남자가 제게 손을 뻗어 올 때마다 움찔움찔 긴장을 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자와의 섹스가 예전처럼 괴롭고 힘들기만 한 게 아니라 때때론 희완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좋은 것이라서, 그 긴장은 여러 가지 의미로도 해석이 되었다. 하여 오랜만에 아무 터치 없이 같이 밤을 보내고도 내내 별다른 기미를 보이지 않던 남자가 차 키를 들고 재킷을 걸쳐 입었을 때 희완은 조금 엄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저를 부르는 그의 손에 이끌려 외출을 하게 되었을 땐 그 야릇한 긴장감을 쉬이 잊기도 했다.
이틀 뒤 개관이라는 신축 건물에 도착했을 때 희완은 내내 창밖으로 비껴 지나가던 익숙한 대학로의 풍경에 시선을 놓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이 많든, 적든, 그 특유의 활기를 품고 있는 거리는 평일 낮이라는 시간임에도 제법 술렁임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차시설이 열악한 대학로에 위치한 건물이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주차공간이 넓은 곳에 차를 댄 승도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아직 개관도 전인 신축 건물엔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잠자코 그 뒤를 따라 내리던 희완이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걸음을 멈추고 비스듬히 저를 돌아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춘다. 머뭇거리다 곧 그를 향해 발을 내딛는 희완이었다.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공사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던 건물 외부는 물론, 내부 곳곳도 개관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 놓아 당장 관람객을 받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등은 작동을 시켜 놓지 않아, 앞장 선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용한 공간으로 구둣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그 구둣소리를 배경 삼아 계단을 따라 올라가던 희완이 문득 창밖을 돌아보았다. 계단 모퉁이에 붙은 벽 반면은 죄다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창밖으로는 대학로 전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왼쪽으로는 번화가가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학정이 위치해 있는 한적한 골목이 보였다. 가까운 곳으로는 주변 인구 밀도가 높아 대관 장소로 아주 인기가 좋은 소극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었다.
“높네요.”
올랐던 계단을 도로 내려와 제 등 뒤에 선 남자의 기척을 느낀 희완이 창 아래 죄 펼쳐진 전경을 내려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러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맑은 푸른빛이 무척 잘 보였다. 항상 부족한 공간과 자금에 쫓겨 두더지처럼 어둡고 퀴퀴한 극장만 전전하다 이리 빛이 보이는 곳에 서 있으니 생경한 기분도 들었다. 이 극장이 곧 제가 무대에 오를 장소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에 듭니까.”
창밖의 전경을 두고 말하는 줄 아는 희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로가 한눈에 보입니다.”
“그쪽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게 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혼연히 고개를 끄덕이던 희완이 저도 모르게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한참 마주하던 남자가 거길 다 봤으면 이젠 다른 데도 가 보자며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다른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건물 내부에는 앞서 간 남자의 발자국 소리만이 뚜렷이 들려왔다. 그 뒤를 따르는 희완이 찬찬히 건물을 돌아보았다. 영문도 모르고 쫓아온 곳이 저와 가장 밀접한 곳이라 조금 놀라운 마음이 있었다.
“좋습니까.”
“네, 정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설계한 이가 누군지 몰라도 건물의 용도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건물 내부를 관통하는 넓은 홀과, 연극과 뮤지컬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갤러리 형식의 복도도 좋았고, 무엇보다 각 층 극장의 높은 천장과 맞물린 음향시설은 대극장 못지않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어서 이 건물을 세운 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한눈에 보였다.
“애정이 깊은가 봅니다.”
원형의 통로로, 넓은 로비에 앉으면 높은 천장과 위층 난간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던 희완이 하는 말에 그 옆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던 남자가 눈썹을 든다.
“무슨 말입니까.”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요. 누군진 몰라도, 굉장히 공을 들인 느낌이라서요. 업계에 대한 애정이 깊구나 싶습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부정적인 답을 내어놓는 남자를 보던 희완이 그런가요, 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럼 조예가 깊으시든가.”
“그렇지도 않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는 희완이 남자를 보았다. 그러나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희완을 응시하던 남자에게선 그 이상의 답은 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희완은 스스로 유추해낸 것을 꺼내 놓았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누구 말입니까.”
“이 건물 주인이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던 남자는 그도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애정도 없고 조예도 없다면 이렇게까지 훌륭한 공연장을 내어놓기 힘들 텐데, 본래 철저하신 분인가 봅니다, 그럼.”
“이걸 올리겠다 한 인물은 모르겠고, 이 건물주는 확실히 애정도 조예도 깊긴 할 겁니다.”
아.
그제야 건물주와 이 건물을 실질적으로 올린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는 걸 이해한 희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주인 있는 건물에 허락도 없이 이리 당당히 걸어 들어온 남자가 건물주인가 하였던 추측도 선회시킨다. 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희완을 응시하던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희완의 기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한 남자의 관심을 특별히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공연에 대한 애정도 조예도 깊다는 건물주에 대한 설명을 힌트 삼아 그 후보에서 남자를 제외시킨 희완이 그에 대해선 더 궁금증을 표하지 않았다. 밝은 햇살이 고스란히 들이치는 청장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감탄을 한다. 확실히 건물 구석구석에서 묻어 나오는 세심한 배려는 아무 경험과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멋지네요.”
이런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아무리 좋은 건물이 들어서고 좋은 공연장이 생겨도 학정 같은 영세극단이 대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그런 영세극단에 우선적으로 대관자격을 쥐여 준다는 소식은 극장에 목말라 있던 여타 연극인들에게도 단비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