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85화 (85/123)

룸으로 들어서던 희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만유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깨끗하게 비워진, 아니 애초 손님 맞을 준비도 하지 않았던 룸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희완을 기다리던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당황하고 의아해하는 빛이 역력한 희완이 잠시 머뭇거리다 그 곁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식 자린 줄 알고 찾아왔을 것이다. 총괄 팀장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회식 자리를 빙자 삼아 희완을 끌어다가 은근슬쩍 몸로비를 시도하려 했다는 것을 희완은 모르고 있었으리라. 그런 식으로 신세 망친 배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부터도 요주의 인물이었던 만유가 용케도 승도의 레이더망에 들어 일찌감치 치워졌다.

아직 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승도의 왼 켠에 앉아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희완은 근래 드물게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저를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씻지도 않고 부랴부랴 뛰어오기라도 한 모양이지. 저 상태에서 불안해하는 눈초리로 입술을 짓씹는다면 고스란히 스물다섯의 연희완이었다. 그러는 대신 야구모자를 벗어 내리며 상석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희완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화대 자리였습니다.”

딱히 둘러댈 말도 떠오르지 않고, 일부러 숨길 생각도 없었던 승도는 사실대로 답했다. 선뜻 이해를 못 하는 듯하던 희완이 곧 낮은 탄식과 함께 가만 입술을 닫는다. 눈에 띄게 준수한 얼굴로 여러 가지 감정이 읽혀진다. 혼란스러움, 치욕감, 씁쓸함, 그리고 자괴감이었다. 그 감정들이 차례로,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져 가는 걸 묵묵히 바라보던 승도가 그를 기다리는 동안 따라 두었던 술잔을 비웠다.

“모르고, 왔습니다.”

그 끝에 남자에게 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친 모양으로, 곤란하거나 불안이 엄습하는듯하면 저도 모르게 귓불이나 입술 따위 등을 꾹 누르던 희완이 구차한 변명을 덧붙였다.

“중요한 자리라 해서, 나온 건데.”

무엇보다 스스럼없이 친애를 표하면서도 묘하게 냉정한 만유에게서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해 오는 사람이라면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냉정하기 마련인데, 만유는 그저 감정 표현에 솔직한 제작 관계자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다. 유난스럽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도 희완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니 업계 종사자 특유의 과장된 화법 정도로만 생각했지 특별히 그런 쪽으로 사고를 진행시킬 만한 계기도 없었다.

“압니다.”

“…….”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런 자리에 왜 남자 혼자만 앉아 있는지, 선뜻 묻지 못하는 희완에게로 가득 따라진 우유 한 잔이 밀어졌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 신경 쓸 것 없고.”

공복으로 왔을 테니 그거 한 잔 마시고 집에 가자는 승도가 남은 술을 마저 비워내었다.

순순히 차 키를 맡기는 남자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대리를 불렀어도 상관없었는데 불현듯 운전할 줄 아느냐고 묻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선뜻 운전대를 맡긴다. 면허가 있으면 아르바이트의 선택지가 넓어져, 무리를 해서라도 학원 등록을 해 고등학교 졸업 전에 면허를 따냈었다. 베스트 드라이버까지는 아니어도 운전 감각은 괜찮았고 실제로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 운전 경험도 제법이었다.

“안전벨트 매셔야.”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 긴장을 한 탓인지 평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희완이 정지 신호를 받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걸 발견하고 뒤늦게 권하려다 도로 입을 다문다. 조수석에 몸을 기대어 앉은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음영이 두드러지는 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희완이 제 어깨에 멘 안전벨트를 풀어내었다. 남자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조수석 안전벨트를 손수 매어주는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술 냄새도 나지 않고 얼굴색에도 변화가 없어 얼마 마시지 않은 거라 생각했었는데, 제법 마신 모양이다. 제 행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또 지그시 들여다보던 희완이 노란색으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고 서둘러 제 것도 다시 매었다.

아직 손에 안 익어 낯선 핸들을 꽉 쥔 희완이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인파가 많은 번잡한 도로를 내다보며 실내가 더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희완의 목울대가 작게 출렁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 좋을 법한데 9월을 앞둔 환절기의 밤은 쌀쌀했고 술이 든 남자는 곤히 잠든 상태였다. 괜히 밤바람을 들여 그의 체온을 내리게 하고 싶지 않아 제 목뒤로 오른 열기는 무시하던 희완이 곧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꽉 닫혀 있던 창이 소리 없이 내려가며 서늘한 밤공기가 창밖의 소음과 함께 떠밀려 왔기 때문이었다.

자는 줄 알았던 남자가 내린 창에 팔을 걸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을 감지하고 괜히 턱을 당기는 희완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가볍게 나부꼈다. 머리 뒤부터 등까지 뜨끈하게 올라 있던 열기가 식어 내리며 저도 모르게 바짝 수축되어 있던 신경이 이완되어 간다. 겨우 한시름 놓는 듯한 기분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간다. 그제야 제가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희완이 저를 배려해준 남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였다.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남자는 여전히 창백하게 식어 있는 희완의 뺨에 눈길을 둔 채였다. 처음엔 의식하는듯하던 희완도 곧 그것에 익숙해져 갔다.

운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출발 전에는 긴장을 했고, 출발하고도 잠깐은 헤매는듯하던 희완이 안정을 찾은 건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에 진입했을 때였다. 운전에서도 성격이 드러나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행인들을 일일이 기다려 가며 골목을 빠져나오니 희완의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큰길에서도 그리 답답하게 운전을 할까 하고 봤더니 여기서는 또 의외로 대담한 구석이 있었다. 차선 변경도 잘했고, 길도 잘 찾고, 방어 운전에도 능숙했다.

“소질이 있습니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었습니다.”

납득이 갈 법한 실력이었다. 배달일한 것 치고는 꽤 신사적이기도 했고.

“무슨 배달 했습니까.”

“이것저것… 이륜 면허가 없어서 주로 족발 집이나, 주말엔 택배 아르바이트도 하구요, 명절 때는 물류센터에서 또 택배 업무도 보구요. 운 좋을 때는 금일봉 나오는 운전기사 노릇도 했었는데, 운전대를 놓은 지 오래돼서.”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버벅거리기도 하니 이해해 달란 말이었다.

“찌그러져도 상관없으니 사람 칠 것 같으면 딴 데 박읍시다.”

격려치고는 무시무시한 말을 대수롭잖게 늘어놓는 남자가 차갑게 식은 희완의 이마를 확인하고는 도로 창문을 올려놓았다. 주의가 분산된 탓인지 운전을 시켜 놓으니 말이 늘어 듣는 재미가 있어 드문드문 말을 걸며 가는 길을 확인하기도 한다. 눈썰미가 좋은지 길도 헤매지 않고 한참 달리던 희완이 뒤늦게 집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하고 확인을 해 왔다. 아니더라도 아파트는 벌써 코앞에 있었다.

새벽같이 연습실로 출근한 희완이 사무실 내부로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하곤 이상하다 생각했다. 갈아입을 옷들을 챙긴 가방을 라커에 넣어 놓고 옷을 갈아 입으려는데 탈의실 문이 열리며 우진이 들어섰다.

“형, 일찍 왔네.”

“그래, 왔냐.”

일찌감치 와 있었던 듯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는 우진이 옷을 갈아입는 희완은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막 도착해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눈앞의 녀석이 바로 이 사태의 원인이겠지, 추측하는 우진이다.

“그놈하고는 잘 지내냐.”

다시 만난 지 넉 달도 안 돼서 동거를 시작했다는 희완을 말릴 까닭이 없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야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관계에 노심초사를 하더라도 그렇게 몇 년을 깨지고 엎어지면서도 끝내 돌아가 버린 자리다. 희완이라고 그걸 몰라서 저러고 있겠나 싶어 가끔 심술이나 부릴 뿐 그런 쪽으로는 별 의견을 내지 않는 우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잘 지내신다고, 수더분히 답하며 상의를 갈아입는 희완의 날갯죽지에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자국이었지만 그런 것에 대한 면역력이 대단한 우진은 수월히 알아볼 정도였다. 그렇다면 우진 말고도 알아볼 인종들이 꽤 될 거라는 뜻이었다. 조심성이 없기보다는 지각이 없는 경우리라. 하필이면 찍어도 저런 데다 찍어 놔서. 보이는 대로 질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늘부로 제작사 바뀐다더라.”

“응?”

티에서 머리를 빼내느라 우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희완이 되묻는다.

“총괄 팀장이 탈세 혐의로 불구속 입건돼서, 제작사 망하기 일보 직전이란다. 연 기획에서 이번 작품 맡는다고 나섰대.”

첫 공연을 딱 나흘 앞두고 발생한 사건에 공연 관계자 측은 대부분이 패닉 상태였다. 우왕좌왕하는 그들 사이에 끼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들은 우진은 밑도 끝도 없이 탈세 혐의로 잡혀 들어간 총괄 팀장과 연희완을 저도 모르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술자리 지분거림이 맘에 걸려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던 주여욱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더니 물꼬가 터지듯이 총괄 팀장에 대한 루머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더러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하준우와는 달리 집안 빽도 대단해 사고를 쳐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통에 오히려 피해자들이 쉬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쓸 만한 놈 하나 건졌다며 가벼운 주둥이 나불거리며 돌아다닌 통에 그 판에선 이목이 쏠리기도 했었는데, 덕분에 남자의 눈에 띄었나 싶기도 했다.

“너, 총괄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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