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변한 작품 하나 만들어보지 못하고 이대로 끝날 겁니다. 내가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술이나 한잔 따라주는 건데, 그 정도 대가라면 후한 것 아닙니까. 나도 유명해지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좁고 후줄근한 연극판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에 절절매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이러는 걸 용납 못 하겠다면, 학정을 나가겠습니다.
그 거리에서 한참 돌아 들어오며 내내 우진이 반복했던 말들이었다. 스물넷, 어린 나이였고, 전역 후 제대로 적응을 못 해 불안해하며 방황하던 시기였다. 기회를 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 손을 잡으려면 반드시, 무엇이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준우의 알선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따라 들어간 자리에서 소식을 듣고 난입한 학정에게 끌어내어진 이후로 그나마도 중개가 끊어져 버렸다.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멋대로 뛰어들어 일을 망친 학정에게 화가 났었다. 동시에 학정의 바름과 저의 속물근성을 비교해 메스꺼운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기도 했었다. 입을 열면 그와 저를 동시에 상처 주는 말만 뱉어낼 것 같아 아예 꾹 다물었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쪽 팔을 붙잡힌 채 내도록 걸었던 우진은 등 뒤로 불어오는 서늘함에 겨우 도착한 곳을 올려다보았다.
낡고 허름한 아파트. 이대로라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깊은 구덩이였다.
“나가 살겠다고 했어.”
걸음을 멈춰 얕은 하천에 드리워진 검은 먹구름을 내려다보던 우진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허튼소리 작작 하라던 학정을 싸늘하게 노려봤었다. 능력도 여건도 안 되면서 한번 품은 것을 놓지 못하는 학정의 미련은 때때로 우진을 숨 막히게도 했고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게도 했다. 그러나 우진은 처음부터 언성을 높일 생각이 없었다. 학정과는 그 어떤 감정적 소모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재킷을 잡아채던 학정의 등 뒤에 집은 구해 놨다는 말을 던지니 와장창, 화분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학정이 우진의 팔목을 비틀어 쥔 뒤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발작 끝에 우진 스스로 입힌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팔목을 눈앞에 들이밀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몸뚱이로 어딜, 어떻게, 혼자 잘 살겠느냐는 학정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우진이 걷어 올려진 소매를 끌어 내렸다. 수치심으로 미세하게 떠는 그 손을 내려다보던 학정에게서 낮은 욕지거리가 뱉어졌다. 평생을 가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죽을 때까지 이 구질구질한 집구석에 날 처박아 둘 거냐 싸늘하게 일갈하는 우진을 사납게 쏘아보던 학정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이를 악무는 게 느껴졌었다.
“그 인간은 도대체, 날 어쩌겠다는 건지.”
선을 본 뒤로 아파트로 걸려오는 전화가 많아졌다. 학정이 집에 거의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전화기는 거의 장식품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그 뒤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진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거나 낮잠을 잘 때면 어김없이 울리는 그 전화의 주인공은 시골에 계신 학정의 노부모였고, 가끔은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학정의 소재를 묻고 금세 끊어버리는 여자는 둘째치고서라도, 전화를 받을 때마다 반색을 하며 우진에게 학정의 근황을 묻는 노부모는 매번 우진을 당혹스럽게 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통화 말미에 우진이 너도 어서 예쁜 색시 만나서 장가가야지, 말끝을 흐리는 그들에게서 분명한 속내가 읽혀졌었다. 학정의 연애사업에 방해꾼이 되는 것은 우진 역시 사절이었다. 작품을 마치고 수술을 들어가는 동안 뒷전에 미뤄두고 있었던 집을 알아보고 다녔고 일사천리로 계약까지 마쳤다. 원래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따로 나가 살 계획이었으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버럭 화를 내며 윽박지르던 학정을 마주할 때까지는 그랬었다.
“그 곰 같은 새끼는 내가 저 집에서 눈칫밥 먹고 있는 것도 모를 테지.”
뭔가 굉장히 분하다는 심정으로 말을 뱉던 우진이 한숨을 쉬며 뚝방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않았다. 그 곁에서 내내 하천을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학정이 우진에게 가지고 있는 미련에는 부채감 따위도 있을 터였다. 그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는 우진을 끝까지 붙잡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 그 결과는 선택을 한 우진의 몫이건만, 하여간 미련 곰팅이라는 생각을 하는 우진이 답답하게 목을 감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기어이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는 학정의 성정을 한때는 야속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진은 부는 바람으로 온몸을 씻기며 그 거리를 걸었을 때 제 팔에 화득히 남아 있던 학정의 열기를 기억했다. 학정은 그 식대로 우진을 내내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로는 가선 안 되는 길이라고.
“나랑 같이 살래?”
툭 던져지는 물음에 발치로 흙바닥을 툭 차던 희완이 빤히 시선을 들었다.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 벤치에 길게 등을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진의 턱 밑으로 목울대가 굵게 도드라졌다.
“잘해줄게.”
혼자가 그리 못 미더워 하룻밤 놔두는 것도 전전긍긍하며 누구라도 한 명 붙여놓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학정에게도 더는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
“그냥 콱 정신병원에 처박혀 버릴까.”
나직이 중얼거리며 눈을 감아 내리는 우진의 안색이 창백했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이 있었다. 벤치에 뭉쳐 놓았던 머플러를 그 목에 감아주는 희완이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사는 것으로 되겠어?”
한참 침묵하던 우진이 툭 뱉었다.
“되겠냐.”
이미 망가진 것은 평생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주변에 민폐 끼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누구 신세 망치려고 언감생심 결혼이란 걸 꿈꾸겠는가. 우진의 주변은 온통 퇴로가 막힌 채였다. 초기에만 약을 끊었어도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던 의사는 5년 만에 이렇게까지 심한 중독 증상을 보이는 우진을 놀라워했었다. 치료과정에서 마약을 받던 방법들을 듣고서야 납득을 했고, 반면 완치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었다. 원래 중독이란 거는 불치병과 같은 거라 했었던가. 재건수술을 도맡아 하던 성형의와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는 그를 보며 역시 같은 족속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쩜 그리 말하는 토씨 하나까지 별반 차이가 없는지.
“그 전에 그놈한테서 떨어져 나올 수 있겠어.”
가볍게 웃으며 하는 말에 별다른 대꾸를 않는 희완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다 되었다며 일어선 희완이 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우진의 머리 위로 흐린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극을 보고 나오니 눈이 쌓여 있었다.
예고에도 없던 눈에 앞에서 기상청이 아니라 구라청이라며 투덜대던 커플 하나가 잠바를 같이 뒤집어쓰며 건너편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를 올려다보던 희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쯤 끝난다는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 남자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라 있었다. 백, 승도. 배우 같은 이름이라 생각하며 통화버튼을 누른다.
-눈 옵니다.
“네, 지금 보고 있습니다.”
-어딥니까.
“끝나고 막 나왔습니다.”
-차 보낼까.
“아닙니다. 저녁 먹고, 형네서 자고 갈 생각입니다.”
-또 외박입니까.
“내일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별말 없이 알았다 하는 남자에게 운전 조심하시라 하고 통화를 마치는데 아래 계단에서부터 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는 길에 관계자의 눈에 띄어 잠시 붙잡혀 있어야 했던 우진은 썩 유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눈 와.”
위를 가리키는 희완의 손끝을 따라 밖을 내다보는 우진이 슬쩍 눈살을 이지러뜨렸다.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솜털처럼 내리는 눈은 걸어 다니면 쌓일 정도는 되었다.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는 눈발을 뿌리고 있는 하늘은 벌써 검게 어둑해져 있었다. 대학로에서 학정의 아파트까지는 버스를 타기에도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편의점에 들러 우산 두 개를 사서 나눠 쓴 둘이 가까운 우동 집으로 향하였다. 일요일 밤의 대학로 거리는 눈이 와서 더 붐비는 듯했다. 안 부딪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걷는 이들 사이로 가로질러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선 우진이 먼저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출입구 쪽 몇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죄다 칸막이로 되어 있는 우동 집은 그 구조로 인해 배우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밥 먹다가 사인을 해줘야 할 일도, 사진을 찍어주는 일도, 모두 미연에 방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전처럼 편안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불편함을 느낄 정도까지는 아닌 희완과는 달리 우진은 이래저래 알아보는 사람도, 붙잡는 사람도 많아 때때로 골치를 썩는 편이었다. 극장에서 우진을 붙잡았던 관계자도 예전에 드라마를 찍을 당시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일요일 밤이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씨이기도 해 손님으로 가득 차 있는 우동 집 통로를 지나 유일하게 비어 있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우진이 메뉴판을 건넸다. 그 맞은편에 앉으며 눅눅해진 재킷을 벗는 희완이 대충 눈으로만 메뉴를 훑어 우동을 말했다. 둘이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서버에게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는 우진의 잔으로 따뜻한 감잎차가 부어졌다.
만석인 우동 집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좌석 구조 덕에 다른 테이블의 소음이 그리 크게 넘어오지 않았다. 웅성웅성 몰리는 소리는 있었으나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도심을 걸어 돌아다닌 게 효과가 있었던지 낮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간간이 농도 던지면서 피식피식 웃던 우진은 아닌게 아니라 비교적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짝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몽중에 있는 것도 같은 그는 드물게 해사하게 웃기도 했다. 테이블 바로 옆으로 나 있는 흡연석 창을 열고 담뱃불을 붙이는 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바람 한 점 없이 자박자박 눈만 쌓이는 바깥 풍경이 자그마한 창 안 가득 들이쳤다.
그 맞은편에 앉아 우진이 던지는 말에 대꾸도 하고 웃기도 하고 농을 맞받아치기도 하던 희완도 그가 건넨 담배를 받아 피우며 나른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추가로 버섯전골을 시키고 끊임없이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던 둘이 귀가한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눈이 멎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우진을 발견한 희완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의 불이 꺼지면 그대로 검게 잠길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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