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산발인 학정의 눈이 희완을 가만히 훑는다. 무슨 일이 있어 이러시는가 싶어 슬쩍 주눅이 든 희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는데 학정의 손목에서 달랑 거리는 게 보였다.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 있던 학정이 그 시선을 받자 손목에 걸고 있던 걸 쑥 내밀었다. 검은 봉다리였다.
“들고 가서 먹어라.”
“…….”
고개를 든 희완이 멀뚱히 학정을 올려다보았다. 받으라고 한 번 더 손을 내밀기에 받아드니 봉지가 묵직했다. 열어서 들여다보는데 둥글둥글한 사탕과 초콜릿같이 달달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붉은 입술이 꾹 닫힌다. 왜인지 목이 메어서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희완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계속 만져주는 것이 없어 고개를 드니 그새 말도 없이 돌아선 학정이 놀이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법적 절차를 다 끝낸 서류를 넘기고 공증을 받고, 도장 몇 번 찍으니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어쩐지 긴장된 얼굴로 내내 자리에 임하던 저쪽 변호사가 마지막 도장을 찍고서야 식은땀을 닦아내듯 진 한숨을 토해낸다. 이로써 그 일대는 서울시 소유가 되었다. 이런 결단을 내려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그와 마지막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승도는 또 요릿집 여주인이 내어 주는 주전부리를 받고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이걸 갖고 가도 제대로 먹을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창 시달릴 때는 물도 제대로 못 받아먹었으니 말이다. 맛이 좋긴 해도 소화하는 데 부담이 있는 주전부리 보따리를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던 승도가 뒤늦게야 그걸 받아들였다.
옆구리에는 노오란 해당화 보따리를 끼고 왼손으로는 담배를 태우며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꽤나 볼만하다 웃는 여주인이었다.
우는 희완을 내려다보던 승도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건드리지 말라는 듯 어깨를 비튼다. 손을 거두고 말없이 내려다보다 다시 손을 뻗는다. 이번엔 거부하지도 않고 얼굴을 덮은 손바닥을 내내 누르고 있는 희완의 젖은 머리카락으로 굵은 손가락이 엉켜 들었다. 이번에도 거부를 하지 않으니 대담해진 손길이 우는 얼굴을 가린 희완의 손을 잡고 떼어 낸다.
“…….”
우는 꼴을 보면 속이 좀 풀리려나 했으나, 막상 보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다. 오늘은 별거 하지 않았는데도 시작부터 희게 질리던 희완은 제 다리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길에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흥건히 젖어 있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주고 목 밑을 안아 품에 들여 주니 얌전히 딸려 오는 몸이 훌쩍 가벼웠다. 살이 내린 것은 이미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정도였다. 다만 잘 울지도 않는 녀석이 우는 걸 듣고 있자니 승도는 어쩐지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어깨만 문질러 주며 희완의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대학로로 명우가 찾아왔었다.
한창 개성 있는 조연으로 주가를 올렸다가 최근 들어 로맨틱 코미디에서 서브 남주 역을 통해 초특급 스타로 급부상을 한 그를 심심찮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최근 드물게 소란해진 구석에서 활기가 돌았다. 금의환향하기 전에는 절대 학정을 찾지 않을 거라더니, 학정이 키워낸 배우 중에 제일 정상적으로 훌륭하게 제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중인 그는 훌쩍 성장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의 시선이 들지 않는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고성민의 이야기가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도 희완은 정확하게 그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학교 선배였고, 희완이 깔개 취급당하며 맞고 다니던 시절 연출에게 희완의 소문을 흘려 남창 취급당하는 데 일조를 한 사람이기도 했다. 학정과는 대학 동기로 막역지우와 비슷했고 따로 극단을 만들어 꽤 괜찮은 작품도 만들어 인정받다가, 업자들이 들이닥친 시기에 맞물린 자금난으로 극단을 접고 영화판으로 뛰어든 케이스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건너 듣는 것도 썩 유쾌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희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학정의 근황을 묻던 명우가 흘려 준 이야기에 입술을 꾹 다물며 멀건 찻물만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판이 좁긴 해도 연극판만큼은 아니라 같은 작품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친한 동기라도 얼굴 보기가 힘든데, 최근에 장미호가 학정을 밀어주기 시작하면서 학정의 주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걸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시기 어린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그중 제일 질 나쁜 게 실없는 소리, 즉 확인도 안 된 유언비어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아무튼 학정과 장미호도 그런 사람들의 타깃이 되어 저질스러운 소문이 한동안 따라다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듣고 열 받은 게 바로 장미호와 결별하고 두문불출하던 주여욱이란다. 루머 중 하나가 장미호가 주여욱과 사귀었을 당시 학정과 양다리 관계였다는 이야기였는데, 자존심 강한 주여욱이 그걸 가만 못 넘기고 그 소문 유포자를 직접 수소문 하여 찾아냈다고 한다. 쉬운 일은 아니어도 그 좁은 바닥 이 잡듯이 뒤지면 못 찾을 일도 아니라던 명우의 입에서 다시 고성민의 이름이 나왔다.
원래 학정 선생님이 사람 입으로 들고 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장미호하고 그런 소문이 도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장미호가 원하는 대로 스케줄 다 맞춰 가며 연기 가르치셨고요. 학정 선생님 그렇게 매니저처럼 부려 먹은 이유가 실은 연기 수업 받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누가 모른다고. 그런데도 군소리 없이 다니던 학정 선생님이 어느 날 근처 촬영장에서 카메라 돌리고 있던 고성민 멱살 붙잡고 죽여 버리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대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고성민이라는 그분이 좀 그렇더라구요.
최근 찍은 영화가 연달아 망하면서 메가폰은 잡지도 못하고 영화판 전전하며 카메라만 겨우 붙잡고 있는 와중에 학정의 승승장구가 배 아팠던 모양이다. 주여욱이 알아낸 바로는 최초 유포자가 고성민이었다. 신세 처량하게 된 이후로 성격도 괴팍해져 술만 먹으면 그렇게 입이 걸어지는데 어느 날부턴가 그 입에서 학정이란 이름이 떨어져 나가질 않더라. 장미호하고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만들어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더니, 이제는 하다하다 어디 막장 드라마 판에서도 안 나올 스토리를 학정 대학 동기라는 명함 앞세워 리얼 히스토리라고 주욱 읊고 다녔단다.
김학정, 도우진, 하준우, 연희완, 영화판에서는 잘 모르고 연극판 좀 뒹굴었다 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그 이야기를 상도도 없이 주욱 읊고 다녔다고, 한번은 기자가 낀 술자리에서 한창 뮤지컬로 주목받았을 때, 배알이 꼴린 고성민이 또 입을 열었더라. 도우진은 몰라도 연희완이 뒤가 더럽다는 건 내 장담한다고, 알 만한 연출가라면 앞뒤 안 재고 졸졸 쫒아가서 뒷구멍 열어 배역 따내거나 일자리 따내던 게 바로 그놈이었다고, 김학정 그놈이 애를 그렇게 키우는 놈이라고, 자기도 그 흉내 한번 내 보겠다고 연희완이 아는 연출한테 넘겼다가 괜한 역정만 들어 먹었다고, 더러운 주둥이 나불거리는 걸 마침 주여욱한테 돈 먹고 귀동냥 다니던 기자가 홀라당 일러바쳤고, 주여욱은 그걸 또 학정한테 홀랑 따졌다가, 그 사단이 났다는 말이었다. 영화판 사람들이야 도우진이 누군진 알아도 연희완이 누군지 모르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명우만 연희완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는 얘기다. 눈치 없이 그런 게 사실이냐고 묻지는 않았어도, 이 바닥 눈치가 빤한 녀석이니 한동안 학정 속 썩이고 다니던 희완과 대충 짜 맞추기는 했을 터였다. 어쨌거나 덕분에 학정 선생님이 우리 영화판에서 악명이 자자해지셨다며, 푸흐흐 웃는 명우가 대충 맥을 끊어내고 또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그래서 그 밤 그렇게 말도 없이 찾아온 건가 했다.
물끄러미 찻잔만 내려다보던 희완은 무심코 입술을 건드리다 아릿한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희완은 잘 살아야만 했다. 행복해야 했고, 아프지 말아야 했고, 또 부끄러움 없이 반듯하게 잘 살아야 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유일할 수만은 없었다. 희완에겐 연극이 있었고, 학정이 있었고, 우진이 있었으며, 또 그 외의 것들이 있었다. 희완의 삶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들이고, 빼어 놓아서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남자도 소중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는데. 아니, 적어도 그렇게 하잘것없는 취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족한데, 오로지 필요한 건 희완 하나뿐이라는 듯이 구는 남자에게 더 형언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희완을 존중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하고 몸을 원하고 때때로 쑤셔 박은 채로 돌아다니고 싶을 정도로 희완이 간절하다는 남자라면, 적어도, 희완이 가슴에 감아 걸고 있는 걸들은 존중을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남자에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럼에도 희완은 남자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몸정이니, 살정이니, 그런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희완은 이제 남자 없인 결코 잘 살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렇게 엉망으로 당하고 굴려지면서도 매몰차게 떠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상대를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때때로 이렇게 휑해지려는 가슴을 진저리 치게 하는 것이었다. 닿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멀어져서 찬바람만 들이쳤다.
남자가 내민 물 컵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이 두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한참 거센 울음이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그 앞에 앉아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의 체향이 또 희완을 왈칵 떨게 하였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저 뱃속 깊은 곳이 아려왔다. 물끄러미 희게 젖은 얼굴로 물에 비친 제 얼굴을 응시하던 희완이 입을 열었다.
“우진이 형한테 사과하세요.”
남자의 눈썹에 꿈틀거린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좀 전까지 달래주던 손길과는 달리 냉담한 시선이 희완에게 쏘아졌다.
그걸 떠는 기색도 없이 고스란히 받고 있던 희완이 젖은 눈을 천천히 들었다.
“키스한 건, 잘못했습니다.”
남자의 눈길은 여전히 싸늘했다.
“춥다고 해서, 나도 추울 때 당신이 끌어안아 주고 문질러주면 따뜻해져서.”
그리했다는 희완이 입술을 꾹 닫고 시선을 떨어뜨리다 다시 그를 보았다.
“정말 잘못했어요.”
사납게 매서워지던 남자의 시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서히 잠재워져 갔다.
그걸 가만히 응시하다 나른하게 긴 눈을 내리까는 희완의 시선이 다시 물속에 잠긴다. 화가 나서 그랬던 거다. 화가 나서. 제 말은 제대로 들어 주지도 않고, 우진을 버러지 취급했던 남자에게 화가 나고, 또 서운하고, 야속해서. 그제야 그리 제 속을 차게 했던 것의 정체를 깨달아 가는 희완이 긴 한숨을 짧게 나누어 토해냈다. 물 컵을 내려놓고 아무 말이 없는 남자의 손을 붙잡는다. 당겨서 저를 안게 하고 묵묵히, 못 이기는 척 끌려오는 남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잘못했습니다.”
부드럽게 감아오는 것은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