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4화 (104/123)

스며들어 깊이 젖어든다.

“희완아.”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을 붙드는 승도의 가슴으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이 넓게 번졌다. 잠결에도 저를 안아 오는 승도의 팔을 붙잡으며, 그의 체향에 코끝을 실룩이며, 긴 한숨 같은 호흡을 뱉어 놓다 도로 깊이 잠드는 희완의 숨결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걸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속삭였다.

“그년 주둥이를 찢어버릴 걸 그랬지.”

섬뜩한 악의가 일상처럼 배어 있는 승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앚아 있었다.

“시체라도 꺼내다가 육시를 내서 개 먹이로 던져줄까.”

이미 승도의 손에 참혹하게 발라져서 야산에 묻힌 망자들을 향한 섬뜩한 분노였다.

“내가 머리를 깨고 죽어 버릴까.”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죄의식에 후회를 담아 낮게 속삭이는 승도가 흰 뺨에 입술을 붙였다.

***

키스로 눈을 떴다. 미처 정신이 들기도 전에 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을 능숙하게 받아들이던 희완이 눈을 뜨자 눈썹 위에도 입술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도로 눈이 감겨졌다. 나른한 기분이 들어 남자가 하는 대로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희완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욕조 안에서였다. 남자의 품에 안겨 물에 잠겨 있던 희완이 목덜미를 더듬는 부드러운 감촉에 멍하니 눈을 떴다.

새삼 다정하다는 생각이었다.

어젯밤 술을 마시지 않았어도 며칠간 남자의 품에서 녹초가 되었던 몸은 따뜻한 물속에서 쉽게 끈을 놓았다. 남자가 씻겨주는 대로 몸을 씻고, 욕조 난간에 앉아 몸을 헹구던 희완의 관자놀이로 입술이 닿았다. 미끄러져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들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살갗을 혀끝으로 무심결에 핥던 희완이 입을 열었다.

“어제.”

“일찍 들어왔습니다.”

저녁식사 자리가 고스란히 술자리로 이어져 희완도 어제 일찍 귀가를 했었다. 늦게 온다는 말을 들었고 잠이 오지도 않아서 극본을 펼쳐 놓고 읽다가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남자가 오는 소리도, 제 곁에 드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아 물었는데 저리 답을 하는 남자가 세면대에 희완을 엎드리게 했다.

“몰랐, 읏.”

둔부를 벌려 아직 미세하게 헐어 있는 항문 주름을 하나하나 펴듯이 연고를 발라주던 남자의 손가락이 느리게 안을 파고들었다.

“자고 있어서 안 깨웠습니다.”

안에서 축축해진 손을 쑥 빼내어 닦은 승도가 이번엔 다리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성기를 감싸 쥐었다. 사용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하였으나 역시 만져지는 대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진찰을 제대로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한다. 그렇게 뒤에서부터 앞까지 온몸 곳곳에 그가 남긴 흔적들을 살피고 치료할 곳은 치료해주고 닦을 곳은 닦아내어 준 남자가 그대로 희완을 욕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3월 초입이었지만 아직 문밖은 쌀쌀했다. 알몸으로 남자에게 끌어 내어져 식탁 앞에 앉은 희완은 추울 법도 하였지만 밤새 올려놓은 난방으로 실내는 훈훈했다. 그래도 썰렁해하는 것 같은 희완의 어깨에 제 와이셔츠 한 장을 걸쳐준 남자가 식사를 챙겨주었다. 살갗에 남은 흔적들은 완전히 나은 게 아니어서 씻고 나오면 더 예민해지는 몸은 차라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게 나은 편이긴 하였다.

거의 전라의 몸으로 식탁에 앉아 남자가 손수 챙겨준 아침을 먹고 나니 오전 연습시간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희완이 깨기 전에 이미 샤워를 마친 남자가 간단히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희완도 옷을 껴입었다. 재킷을 걸치려는데 어느새 준비를 마친 남자가 뒤에서 걸치는 걸 도와주곤 앞장서 나갔다. 오늘 이상하게 친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싫지만은 않은 희완이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혀가 얼얼해지도록 꽤 긴 키스를 마치고 창가에 붙은 벨트를 당겨 손수 매어준 남자가 곧 차를 출발시켰다.

불어오는 햇살이 좋았다. 오랜만에 극단 건물 뒷마당에 나와 앉아 나른한 고양이처럼 빛을 쪼이던 희완이 제 곁으로 와 앉는 도연을 발견하고 뒤늦게 눈매를 접었다.

“이야, 호랑이 바람피우기 딱 좋은 날인데.”

날 좋다는 말을 제 식대로 해석하며 담배 하나를 피워 무는 도연이 맛있게 한 모금 쭈욱 빨아들이며 헤죽 웃었다.

“아- 좋다.”

겨울 내내 뮤지컬 작품 앙상블로 활동했던 도연은 목 관리한다고 그간 단기금연을 했는데 그 스트레스로 살이 다 빠졌다고 했다. 성대가 의외로 예민한 기관이라 단기간이라도 관리를 해주면 쉽게 그 효과를 볼 수 있어 많은 배우들이 단기금연을 하곤 했다. 물론, 아예 금연을 하거나 비흡연자인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그런 인물은 거의 희귀품에 속한다고 보면 되었다. 오죽하면 희완도 연극판 입성 후 제일 처음 배운 게 발성도 호흡도 아닌 담배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남극 작품 엎어지기 직전이었다며?”

“어, 작년에 무대 섰던 배우 대부분이 기획사로 빠졌다고.”

“죽 쒀서 남 주는 게 이 바닥 특기잖냐.”

키득거리며 웃는 도연의 말이 다른 누구에게 같잖은 피해의식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어느 분야나 그런 불합리한 일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번에 작품 나간 것도 개런티 때문에 속이 쓰리고만, 그 소식까지 들으니 술 땡긴다.”

“출연료 또 밀렸어?”

“앙상블 중엔 사람이 아예 없고, 주연급 출연료도 미지급인 모양이야.”

꼬박 3개월 해 봐야 70만원 안팎인 앙상블 출연료 떼먹는 건 예사라고 쳐도 주연급 출연료까지 미지급이라면 제작사 측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해서 이번에도 한탕 삼아 유령회사 세워 놓고 토낀 게 아니냐는 소리가 꽤 타당성 있게 제시되고 있다는 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의 첫 금연기가 이딴 식으로 똥칠을 당하다니.”

장난스러운 음색이었으나 그 속은 많이 분하고 억울하고 허탈할 것이었다.

“신생 제작사라 초반에도 말이 많았는데 대형 뮤지컬 라이센스 떡하니 업어 들어온 거 보고 넙죽 엎드렸으니 이 바닥도 멍청하다 해야 할지, 순진하다 해야 할지, 절박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도연이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문다. 불을 붙이려는 걸 라이터를 가져와 동그랗게 바람을 막아 붙여주는 희완이 생긋 웃었다.

“이따 저녁에 술 한잔 할까?”

“니가 쏘는 거지? 나 빈민이야.”

“거기다 기아인 것도 같은데?”

덧붙이는 농에 피식 웃는 도연이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희완아, 희완아, 예쁜 연희완아. 하며 희완을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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