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8화 (108/123)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여차하면 날 죽이기라도 할 셈입니까?”

공격적인 어투에 느른하게 낮추고 있던 시선을 드는 남자의 검은 눈이 그대로 우진에게로 박혀들었다.

“권 회장 손에서 놀아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그게 무슨.”

“똥구멍에 돈뭉치 처박고 엉금엉금 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차갑게 굳었던 우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 돈뭉치에 불이 붙여지는 순간, 도우진 씨는 무슨 짓을 했습니까.”

덜컹,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우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미친놈처럼 발악을 했다. 밑에서부터 불이 붙어 실제로 살갗이 타들어 가는데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날뛰는 우진의 엉덩이가 좌우로 우스꽝스럽게 흔들어졌다. 사방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정말 죽는 줄 알고 광란을 하던 우진에게 구정물 한 바가지가 뿌려지는 순간 우진은 제 머리 속 뇌관이 뚝 끊기는 듯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은 비참함으로 비견될 수 없고 그 어떤 단어로도 구현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

“그 구덩이에 도로 처박히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남자의 음성은 성말라 있었다.

부릅뜬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우진의 몸이 손끝에서부터 떨려왔다. 전신으로 번져가는 그 떨림을 구경이라도 하듯 무신경하게 올려다보던 남자가 다시 의자를 발로 툭 찼다. 앉으라는 소리였다.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제 몸을 앉히는 우진의 목울대에서 혈관이 튀었다.

“박성욱, 한나경, 하상훈, 권종건.”

남자의 입에서 그 이름이 하나씩 튀어나올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듯 작게 진저리를 치는 우진의 안색은 기절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남자의 질문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던 우진은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도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가 거론한 인물들은 하준우를 위시하여, 차례대로 우진을 거쳐 갔던, 아니, 우진이 거쳐 가야 했던 나락이었다.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면 되겠습니까. 육체적으로 매장시키면 되겠습니까.”

참담할 정도로 얼어붙어 있던 우진의 얼굴로 곧 이해하기 어렵다는 감정이 스쳤다. 점점 혼란스러움과 의구심으로 복잡하게 얽혀가는 우진의 생각을 멈추게 한 건 남자의 이어지는 한마디였다.

“연희완은 내 것입니다.”

“…….”

“내 눈앞에서 딴 놈이랑 붙어먹던 주제에, 시위를 하는데.”

그때 그 상황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이 떠올랐다.

“성질대로 갈아버리질 못하겠더란 말입니다.”

서서히 벌어지는 우진의 눈동자로 곧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지난번 일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의 뉘앙스는커녕 형식적으로 말을 뱉은 남자가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우진을 보았다.

“바라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우진은 내내 입을 다문 채였다.

제 것을 건드려서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그 제 것이 조금 시위했다고,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사과인지 협박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여대고, 그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주겠다는 남자를 기가 찬 눈으로 바라본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고, 상종도 못 할 놈이라는 생각이 불시에 들었다.

그 속내를 읽은 건지 어떤 건지, 눈앞의 남자는 회색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우진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그날 남자와 마주 앉았던 휴게실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우진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하였다. 계절이 바뀐 풍경은 그럼에도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밝은 햇살이 창문으로 비치는 그 부드러운 광경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렇다 느끼는 우진은 아직 제 속은 그만큼 차구나 관조하였다.

정말 성질대로 그 연놈들 모두 죽여달라 그럴 걸 그랬지.

말만 하면 정말 그대로 해주겠다는 의도가 깃든 눈을 보며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희완을 대가로 남자에게서 무엇을 받는다는 건, 결국 우진도 희완을 화대 삼아 이용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희완이 남자를 떠나고 싶어 할 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자신이 그 걸림돌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시간과 영원은 상대적인 것이었고 그에 비해 감정이라는 것은 티끌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록 어딘가 기형적인 형태라 하더라도 희완을 향한 남자의 그 뒤틀린 감정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남자가 좋다며, 그 흰 얼굴 가득 푸른 기운을 드리운 채 긴 속눈썹을 내리깔던 옆모습이 눈으로 스몄다.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살면서 변변한 기쁨 하나 누려보지 못한 녀석이었으나, 앞으로는 소소한 것에서도 기쁨을 발견하며 그렇게 순탄히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남자라면, 그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우진의 시선이 다시 창밖 풍경으로 향하였다.

봄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양 볼에 대어지는 차가운 것에 가만 얼굴을 내맡기고 있던 희완이 곧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입술로 딱딱한 것이 닿아 오는 느낌에 감았던 눈을 떴다. 차가운 손바닥으로 열을 식혀주다 냉수가 담긴 컵을 입에 대주는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누구하고 마셨습니까.”

“도연이하고 태주하고 성희하고 마셨습니다.”

도연하고 태주는 학정에서 희완의 유일한 동기로 공교롭게도 둘 모두 뮤지컬 작품에 앙상블로 출연했다가 쪽박을 차고 나온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었다. 선배들이나 후배들에게 하소연을 하자면 걱정을 끼치거나 걱정을 사게 마련이니 자연스레 몇 안 되는 동기끼리 모이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요즘 한창 속 시끄러운 성희까지 합류해 꽤 걸한 술자리를 마치고 오는 중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졸았었다. 저를 당기는 손길에 눈을 뜨니 벌써 남자에게 손을 잡혀 잠시 세워둔 차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눈을 붙이니 그나마 술기운이 가셔 집에 도착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얼굴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 제작사 어딥니까.”

묻는 말에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신 희완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감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도연에게 들었던 이름을 짧게 답했다.

“술은 늘었는데, 주량은 준 거 알고 있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