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나도 그 기분 알아요. 조금 개운해지죠? 따뜻한 공기 맞고 깨끗한 바람 맞으면 좋은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일광욕하기 참 좋은 날씨죠?”
“네에.”
하며 수더분하게 웃는 희완은 촬영장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시키지 않아도 척척 자기 몫을 찾아 해냈고, 매우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눈치도 빠르고 의외로 싹싹한 구석도 있어 단막극이란 열악한 상황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고 있었다. 또 연극계 출신에 대한 기대감도 곧잘 충족해주고 있는 편이었다. 아직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과장된 몸짓을 보일 때도 있지만 감정 처리 하나만은 일품이라고, 감독은 가장 중요한 장면 하나를 원 테이크로 끝내기까지 했다. 덕분에 스태프들도 여러 번 고생 안 해 또 희완이 점수를 땄다. 안 그래도 평소에 엔지도 잘 안 내 예뻐 죽겠는데 말이다.
밥차 앞에 줄지어 서서 오랜 촬영으로 지친 몸을 서로 수다로 풀어 내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 혼자 껑충한 희완의 곁으로 이번 누이 역을 맡은 주민이 다가왔다. 아이돌 출신 배우로,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걸그룹 멤버이기도 한 그는 우울한 누이 역과는 달리 쾌활하고 살가운 구석이 있었다.
“와, 저녁은 불고기 덮밥이네요? 맛있겠다. 여기 밥차 맛있어요. 유일하게 맘에 드는 거죠.”
어느새 옆에 붙어 와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주민이 힐긋 희완의 어깨 너머로 아직 한참 남은 줄을 확인한다.
“에이, 여기는 주인공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어. 단막이라서 그런가 봐요.”
“아 그런가요?”
“네네, 저번에 미니 찍을 때는 막 알아서 다들 챙겨주고 그랬었는데, 이번 단막극은 영 정이 없어요. 하긴, 그땐 팬들이 조공도 많이 오고 해서 대접받은 것도 있지만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래도 할 말은 다 하는 주민이 어? 눈을 반짝 뜨더니 갑자기 희완의 손목을 붙잡고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냉큼 희완을 줄 가운데 끼워 넣고 본인도 슬쩍 새치기를 한다. 졸지에 눈총을 받게 된 희완이 내심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니 샐샐 눈웃음을 치며 웃는다.
“뭐 어때요. 그래도 면전에서 욕은 못 할 거예요.”
키가 훌쩍한 희완의 어깨를 당겨 작게 속삭이는 주민이 까르르 웃고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꾸벅꾸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희완이 오빠가 너무 배고프다고 하셔서요, 은근 슬쩍 희완에게 책임을 지우는데 그게 또 밉지가 않으니 대단한 고단수였다.
“어디 가세요?”
“아, 바람이 좋은 것 같아서요.”
“바람? 어휴, 추운데요? 낮에는 그렇게 찌더니, 이 동네 이상하지 않아요? 개새끼 한 마리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고, 꼭 버려진 동네 같아.”
추운지 어깨를 움츠리며 희완의 곁으로 바짝 붙은 주민이 찝찝하다는 얼굴로 어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린다. 저쪽 냇가로 돌아 나가서 남자와 통화를 하려했던 희완은 제 곁에 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주민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려고요?”
“네, 바람 쏘이러 간다면서요. 같이 가요. 여긴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심심해 죽겠어요.”
“춥다면서 그러고 가려구요? 감기 걸려요. 잠바라도 걸치고 와요.”
“에이, 나 떼어 놓고 가려고 그러는 구나. 귀찮으면 바로 얘기해요. 이래 봬도 연예계 짬밥이 못지않아서 눈치가 백 단인데. 그런 얕은 수는 안 통한다구요.”
“네에, 귀찮은 건 아니고, 잠깐 통화하려고 나온 거거든요.”
“애인이구나?”
에이, 아쉽네, 하며 생긋 웃는 주민이 불쑥 희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가려 했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휙 들어 피한 희완이 외려 당황을 한다. 이렇게까지 무례한 상대는 처음이라 놀란 것이었다. 게다가 악의까지 없어 보이는.
“어어? 정말인가 보네? 아직 무명인 것 같은데, 여자친구가 돈 없어도 괜찮대요?”
“네, 없어도 된답니다. 여자친구는 없지만요.”
“어? 그럼 남자친구?”
실없이 짚어본 거겠지만 괜히 정곡을 찔린 희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고는 훌쩍 앞서 나가는 희완을 멍하니 보던 주민이 쪼르르 그 뒤를 쫓아왔다.
“같이 가자니까요?”
“통화 마치면요. 매니저 불러줄 테니까, 같이 바람 쏘여요. 나랑 다니면 오해받잖아요.‘
“어머, 그런 것까지 신경 쓰셨어요? 괜찮아요. 우린 사생팬이 많아서 웬만한 일로는 스캔들도 잘 안 나거든요. 사생들이 다 알아서 쟤들 사귀는 거 아니라고 기자들한테 찌르고 다니니까요.”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며 또 바로 옆으로 따라붙는 주민을 난감한 기색으로 쳐다본다. 그러니까 희완이 안 괜찮다는 말인데, 은근히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주민은 그것이 특별히 나쁘다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어 보였다. 희완에게 있어선 신기한 부류였다.
“와, 여긴 진짜 예쁘네요. 낮엔 볼 것 없더니, 여긴 밤이 압권인가 봐.”
나중에 캐스팅 디렉터한테 말해줘야겠다며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장소를 쭈욱 롱테이크로 잡아 동영상을 찍던 주민이 불현듯 희완을 불렀다. 환한 달빛이 고스란히 비치는 냇가 근처에 서서 맞은 편 숲 어딘가를 응시하던 희완이 주민을 돌아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 머리칼을 스치니 나부끼며 희완의 뺨을 건드린다. 그걸 감탄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민이 곧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 희완에게 다가온다.
“와, 오빠 완전 사기 캐릭.”
“네?”
“역시 신은 불공평한가 봐.”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주민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가까운 바위에 앉으며 냇가에 발을 담갔다. 인공적인 소음 하나 없이 풀벌레가 울어대는 냇가로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만이 울렸다. 좀 전의 그 쾌활한 음성과는 달리 꽤 우울해 보이는 목소리에 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희완이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옆에 앉는다.
“물 시원해요?”
“차가워요. 그런데 기분 좋네요. 시원하기도 하고.”
관심을 보여주니 그새 또 생긋 웃는 주민이 어서 오빠도 발을 담가보라며 재촉을 한다. 그러면서 생글생글 웃는 게 귀여워 저도 모르게 피식 웃는 희완이 원대로 신발을 벗고 냇가에 발을 담가보았다. 과연 발바닥을 찌르르 훑으며 지나가는 냇물이 무척 시원했다.
“오빠 스물여덟이죠? 만 나이는, 여섯?”
“네, 주민 씨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걸그룹엔 영 무지한 희완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기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다 곧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주민이 또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참 표정이 풍부하다는 생각이다. 누이 역을 맡을 때는 생기도 없이 유령처럼 그리 잘도 돌아다니더니, 어려도 괜히 배우가 아니라는 감탄이었다.
“나는 이제 열아홉이에요. 하긴 내가 걸그룹 멤버인 줄도 모르고, 내 이름이 주민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나이 하나 모른다고 뭐 별거겠어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