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46)화 (46/136)

#46

“아, 뜨뜨-! 그래도 마, 이따.”

“그렇게 맛있어요?”

아주머니는 물까지 떠주시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조금 머쓱해졌지만,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다시 어묵을 베어 물었다. 엄청나게 뜨거운 어묵이지만 짭조름한 맛이 혀 밑으로 녹아들었다.

금세 하나를 다 먹고 새 어묵을 집어 들자 다 구워진 와플 한쪽 면에 생크림을 듬뿍 바르던 아주머니가 잘 먹어서 보기 좋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진짜 복스럽게도 잘 먹네, 학생 혹시 떡볶이도 좋아해? 조금 줄까?”

완성된 와플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어묵을 5개째 먹고 있을 무렵, 계속해서 실시간 먹방을 찍어대는 나를 구경하던 아주머니가 떡볶이를 국자로 저으며 물었다.

“좋아는 하는데요, 아가 때문에 못 먹어요! 임신 중에 빨간 거 먹으면 아가가 빨개진다고 해서요.”

사실 미신에 가까운 말이지만. 내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말하자 아주머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직 어린 거 같은데 벌써 애 아빠라고? 배는 하나도 안 나온 거 같은데.”

아주머니께서 고개를 숙여 힐끔 내 배를 보며 물었다,

“아직 얼마 안 됐어요. 우리 아가 태몽이 백호예요, 백호!”

처음에는 남자가 임신할 수 있다는 이 세계관이나,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는데 꿈에 아기가 한 번씩 나오면서부터 그런 이질감은 조금씩 사라지고 아기에 대한 애정만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어우, 백호? 아가가 아주 크게 될 인물인가 보다~”

아주머니는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셨다. 그동안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잘됐다. 나는 슬금슬금 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며 동그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도 엄청 귀엽고요, 눈망울도 엄청 깨끗하니 천사 같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막 우는데-”

그동안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꿈에서 봤던 우리 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자랑하고 백호를 따라 크흥, 하고 소리를 내자 아주머니가 박수까지 치며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다.

“너무 잘 먹었습니다. 완전 오랜만에 이렇게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주머니와 수다도 떨고 배도 빵빵하게 채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가 휩쓸고 간 자리를 쭉 훑어보니 정말 돼지처럼 엄청나게 먹었다. 가득 쌓인 어묵꼬치와 접시들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에이~ 애 아빠가 잘 먹어야지 아가가 쑥쑥 크지. 자, 그리고 이거 받아.”

“헐… 아주… 아니, 이모….”

아주머니의 손끝에는 알이 탱글탱글한 찐 옥수수가 들려있었다. 감동에 젖어 바라보자 아주머니가 내 어깨를 툭툭 치고 격려해 주었다.

“보아하니까 애기 아빠가 아직 어린 학생인 거 같은데, 잘 키워요. 아기 생각해서 힘내고.”

“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마음이 따뜻해져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옥수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이모!”

열차 출발 시간이 겨우 십 분이 채 남지 않았다. 양손에 옥수수와 와플을 한가득 들고 서둘러 플랫폼으로 향했다. 비록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었지만 최고의 소비를 했다는 만족감에 열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탑승권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여기 있습니다.”

“확인되셨습니다. 5호차 19D 좌석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탑승권을 건네자 열차 승무원이 확인하고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열차 창문에 양손 가득 먹을 것만 잔뜩 든 내가 비쳤다. 엄청난 욕심쟁이처럼 보이는 모습에 귓가에 열이 올라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이렇게 생겼구나.”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지하철은 자주 타봤지만 이렇게 생긴 기차는 태어나서 처음 타 보는 거였다.

“너무 좋다….”

간이 테이블을 세팅하고 그 위에 와플과 옥수수를 올려놓자 세상을 전부 가진 듯 마음이 풍요로웠다. 어묵을 좀 많이 먹긴 했지만 그건 간식이었으니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와플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얇게 발린 생크림과 사과잼의 조합이 진짜 최고였다.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와플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곧이어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이 차올랐고 그만큼 가슴도 행복으로 물들었다.

***

“말해.”

“강릉행 KTX에 탑승하신 걸로 확인 마쳤습니다. 이미 6시 5분에 출발하는 열차 탑승하셨고 오후 8시 4분 강릉역 도착 예정입니다.”

“헬기로 움직이지.”

태범은 허름한 역내 분식집에서 양손에 어묵을 들고 밝게 웃고 있는 유원의 사진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해맑게 웃는 걸 본 게 언제더라. 순간 태범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태범은 사진 속 유원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따뜻한 체온을 떠올렸다.

“옥상에 헬기 대기 시켰습니다.”

전화를 하던 준석이 태범에게 말했다. 태범은 애써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차유원을 제 손에 넣어야 했다. 그게 먼저였다. 태범은 피곤한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던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가장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범과 남자들이 발을 뻗었다. 그때, 준석의 핸드폰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네, 박준석 비서실장입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돌린 준석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게 사실입니까?”

태범은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고 자리에 우뚝 멈춘 준석을 돌아보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리죠.”

“무슨 일이야.”

“형님, 이거 한 번만 확인해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준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태범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준석의 핸드폰 화면에 한 장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태범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임신 중절 수술 안내서?”

“그게…. 형수님 방에서 나온 거랍니다. 정확히는 휴지통에 찢어서 버린 걸 이모님이 발견하신 거고요.”

화면 속에는 안내서가 여러 갈래로 찢어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이게 차유원 방에서 나왔다고.”

“네. 임신이라는 단어가 보여서 혹시 몰라 맞춰보셨다고 합니다.”

“하, 시발….”

태범은 순간 유원이 남긴 편지 속에서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차유원이 애를 가졌다고.”

“…….”

“그래서 도망간 건가?”

비릿한 미소를 짓는 태범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유원과의 그날 밤이 머릿속에 박힌 듯 생생하게 떠올랐지만 유원이 남긴 편지 내용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만약에 차유원이 다른 놈의 아이를 가진 거라면….

형용할 수 없는 태범의 분위기에 준석은 잠자코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그의 곁에 있었지만 이렇게 서늘한 형태의 분노를 자아내는 태범은 처음 보았다.

“강릉에 도착하는 대로, 차유원 서울로 데리고 와.”

“그럼 형님은….”

“차유원이 갔다던 병원. 우선 거기부터 가지.”

태범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버튼을 누르는 태범의 손엔 힘이 잔뜩 실렸다. 준석은 이번에야말로 아무 일도 없길 간절히 빌었다.

***

옥수수 하나를 손에 쥔 채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번쩍 떴다.

“헉… 크, 큰일 날 뻔했다.”

깜빡 졸았는데 아직 강릉역에 도착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입 주변에 흥건한 침을 소매로 닦고 머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임신을 하면 잠이 많이 온다는데 정말 그랬다.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하고 눈을 떠보면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이번 역은 강릉역입니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챙긴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부산스럽게 짐을 챙기는 승객들을 따라 괜히 짐을 정리하는 척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때였다.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온 것인지 다섯,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해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저기 엄청 큰 공룡 있어요, 공룡!”

“우와, 진짜 우리 채우가 좋아하는 공룡이네?”

오동통한 손으로 카메라를 가리킨 아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이의 부모는 웃음을 머금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귀엽다….”

너무 예쁜 가족이었다. 똑같은 가족 티를 맞춰 입은 것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우리 아가는….”

눈매가 아래로 축 처지며 배를 문질렀다. 완벽한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줄 수 없음에 아가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래도 아빠가 최선을 다할게. 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줄 거야.”

절대 나처럼 외롭게 만들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어렸을 때 항상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아이를 절대 외롭게 키우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그쪽 세계는 어떻게 됐으려나….”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문뜩 원래 세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 한 명 없다고 큰일이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회사 사람들이 많이 곤란해하고 있을 것 같았다. 원래 하던 프로젝트는 임 대리가 잘하고-

그때.

“아…!”

머리가 지끈거리며 순간 눈앞이 긴 터널에 들어온 듯 새까맣게 물들었다 사라졌다.

“왜, 왜 이래… 차유-”

나도 모르게 입에 붙은 ‘차유원’이라는 이름을 내뱉다 문뜩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원래 내 이름은 뭐였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