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51)화 (51/136)

#51

“…나 새우잡이 배에 끌려가는 거 아니야?”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현혹시키고 잠든 사이에 새우잡이나 오징어잡이 배에 끌고 갈지도 몰랐다. 불안한 마음에 재빠르게 주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배인 아저씨가 수동으로 바꿔준 현관문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피고 문 옆 수납장에 올려둔 후추까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꼬르륵-

“다행히 잘 잠겼는데…. 아, 배고프다….”

다시 거실로 향하자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고문과도 같은 맛있는 냄새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이상한 약이라도 탔을지도 모르니, 먹을 수 없었다. 주린 배를 붙잡으며 아까 편의점에서 후추랑 같이 산 라면을 바라보았다.

50%나 할인하길래 내일 아침으로 먹으려고 산 거였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지금 먹을까 고민이 되었다. 아까 먹은 음식은 언제 벌써 소화가 된 건지. 남은 돈이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참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이건… 내일 먹으려고 산 건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하다 결국 라면 뚜껑을 과감하게 뜯었다.

꿀꺽.

꼬불꼬불한 면 위에 수프를 솔솔 뿌리자 라면도 꽤 맛있어 보였다. 물을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가자 아까 그 만찬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고기…. 맛있겠다. 식으면 맛없는데.

그래도 아니야.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라고 그랬어.

그래놓고도 미련을 떨치지 못해 붉은 껍질을 뽐내는 바닷가재와 두 눈을 마주한 채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더 씻어야겠다.”

물이 끓는 동안 얼른 씻기 위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전부 벗어 맨몸인데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따뜻한 물도 콸콸 나왔다. 역시 돈이 짱이다. 우리 아가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돈을 많이, 많이 모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샤워 가운을 걸친 채 라면을 먹었다. 역시 샤워 뒤에는 라면이 짱이었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가를 위해서라면 더 영양가 있는 걸 먹어야 했지만.

“아가야, 미안. 아빠가 내일부터는 열심히 일해서 건강한 음식 먹을게.”

텅 빈 라면 그릇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밤바다를 눈에 담았다. 벌써 늦은 밤이었는데도 연인끼리, 또는 친구끼리 나와 해변을 걷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얼른 나와서 아빠랑 같이 놀자….”

문뜩 외로워진 기분에 배를 문지르며 아가에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 찾아보니까 태명을 지어주는 게 아가한테도 좋다는데.

“어떤 태명이 좋으려나….”

당장 생각나는 태명은 없었지만 꿈속에서 만났던 백호를 떠올리면 엄청 멋있는 이름으로 지어주고 싶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침대에 갈 기력도 없어 소파에 몸을 뉘이고 나를 끌어 내리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아가야…. 내일은 꼬옥 지어줄게….”

그러다 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익숙한 페로몬 향을 맡은 것도 같았다.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고 페로몬 향을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유원이 깊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1호와 2002호를 연결한 문이 열렸다. 2002호 쪽에서 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범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든 유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하, 내가 진짜….”

태평한 얼굴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유원의 모습에 태범은 피곤에 지친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원의 뒤를 쫓는 동안 그의 마음은 1초에 한 번씩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유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조그만 일에도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 왜인지 모르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이 꼴이다. 태범은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유원을 품에 안았다. 아이처럼 따끈따끈한 체온이 닿자 태범의 굳은 얼굴이 천천히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차유원.”

“으응….”

“유원아.”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유원이었다. 유원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투정하듯 태범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흐응… 우음….”

“하아… 이걸 진짜 어쩌지.”

태범은 유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유원의 체향이 폐부에 들어차자 답답하게 꽉 쪼이던 가슴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태범은 조금 마른 듯 뼈가 도드라진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인상을 썼다. 주방을 확인하자 준비했던 음식이 전혀 줄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이상한 브랜드의 컵라면 잔해만 뒹굴 뿐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태범의 표정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임신 초반에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위주로 먹어야 하는데 오늘 하루 동안 차유원을 지켜본 바로 그의 입에 들어가는 건 순 불량 식품뿐이었다. 태범은 입가에 라면 국물을 묻히고 잘도 자는 유원을 못마땅하게 보다가 픽, 웃음을 지었다.

“서울 올라가면 치과부터 가야겠어.”

쪽, 하고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춘 태범은 그대로 유원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기대앉은 태범은 유원을 품에 안은 채로 천천히 자신의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아이한테 가장 좋은 건 아버지의 페로몬입니다. 특히 임신 초반에는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공급해줘야 아이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보통 남성체 오메가의 아이는 평균적으로 1.2배에서 높게는 1.5배 이상 빠르게 자라니까 임부와 아이를 위해서라도 많은 양의 페로몬이 필요해요. 그리고 지금쯤 아이의 기관이 본격적으로 형성될 시기이니 임부에게 스트레스는 절대 금물입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임부의 안정이라는 점 잊지 마세요. 무조건, 무조건 임부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의사는 몇 번이나 유원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당부했다. 유원을 데리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잘 먹지도 못하고 점점 말라가던 유원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없었다. 태범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도망간 이유가 뭐지. 태범은 답답해진 마음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아가야….”

그때 유원이 자신의 배를 감싸 안고 잠꼬대를 했다. 태범은 그제야 유원의 배를 확인했다. 이 안에 유원과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태범의 검은색 눈동자가 순간 빛을 내었다. 태범은 그 순간 차가운 족쇄 대신 아이를 통해 유원을 제 곁에 묶어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핏줄을 이은 아이의 존재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유원과 제 아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차유원을 닮은 아이라….”

태범은 지금보다 더 앳되었던 유원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좋은 것도 같았다. 태범은 유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원아. 태교 여행은 일주일뿐이야. 그 안에 잘 생각해.”

태범이 고개를 숙여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자 유원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우응….”

귀여운 잠꼬대에 태범이 작은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곤 유원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내 인내심은 거기까지니까.”

태범은 도둑 같은 키스를 유원에게 퍼붓고는 그를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몸을 눕혔다.

***

“학생~”

또다. 오늘만 해도 벌써 5번이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삐거덕거리며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나를 부른 아저씨가 비닐봉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내가 너무 많이 사서 그런데, 학생 이것 좀 가져가서 먹어.”

“괘, 괜찮아요.”

한두 번이야 사람들의 선의에 감사하며 흘려넘겼지만, 벌써 몇 번씩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너무 무서웠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아저씨가 내 손에 억지로 봉지를 쥐여 주더니 줄행랑을 쳤다.

“씻어서 나온 거니까 바로 먹어도 돼요! 맛있게 먹어요, 학생!”

“하아….”

결국 또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내게 무언가를 전해 준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렸다.

‘어떻게 하나같이 똑같을까….’

한숨을 내쉬며 검은 봉지를 열어보자 그 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인 머스캣과 딸기가 들어있었다.

그래, 물론 이번에도 그냥 주고 갔다…. 그놈의 그냥, 그냥, 그냥!

체크아웃을 할 때 오늘도 ‘그냥’ 와서 자고 가라는 지배인의 말을 시작으로 아무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어도 무조건 ‘그냥’ 가라는 사장님, 택시를 타도 ‘그냥’ 공짜로 태워주겠다는 기사님.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까지.

이건 아무리 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씨이… 권태범!!”

이건 분명 권태범 짓이었다. 그가 아니고서는 누가 이런 짓을. 내가 씩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어색한 동작으로 흠칫 몸을 숨겼다.

“한두 명이 아니잖아.”

이 시간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어쩐지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이상하다 했다. 그 아저씨의 직장 상사라는 사람이 권태범을 말하는 것일 줄이야.

어느새 내 품에 잔뜩 안긴 핸드폰, 과일, 심지어 돈까지, 처치 곤란한 짐이 한가득이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이를 갈았다.

“이게 무슨 도망이야….”

아무래도 첫 도망 시도는 권태범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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