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모든 오해가 풀리자 50만 원 훔친 것도 미안하고 상의도 없이 도망친 것도 미안했다. 그냥 진작 물어볼 걸 괜히 오해해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어렵게 입술을 떼어내려는 그때,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차유원 씨.”
“아, 안녕하세요….”
하얀색 가운을 단정하게 입은 의사 선생님이 내 몸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혈압과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네요. 손바닥 상처만 덧나지 않게 잘 관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손목까지 붕대가 칭칭 감아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다쳤나 싶었다. 하지만 그 속을 열고 보니 반창고도 아까울 만큼 작은 생채기뿐이었다. 권태범의 과보호이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검사 준비 다 됐으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하고 권태범을 올려다보았다.
검사?
안정되었던 심장 박동이 다시금 빨라져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설마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가장 중요한 걸 물어보지 못했다. 권태범은 그럼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자 권태범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가자.”
그는 나를 품에 안은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태, 태범 씨. 저도 발이란 게 있는 사람인데요….”
나도 발이 있는데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이리저리 번쩍번쩍 안아 댄다. 우물쭈물 항의하자 그가 말했다.
“알아.”
“태, 범 씨….”
안다면서도 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의 목에 얼굴을 묻자 머리 위로 권태범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자 그럼 이쪽으로 누워보실까요.”
“태범 씨? 여, 여기가 어디….”
조금 어두운 내부에 내가 놀란 얼굴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초음파 검사실이야. 우리 아기 잘 크고 있나 봐야지.”
“우리… 아기….”
‘우리’라는 단어가 이렇게 감동을 주는 말이었나. 다시금 눈 주위가 뜨거워져 나도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내게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차유원 임부님,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좋아요…. 저, 그럼 우리 아기 볼 수 있는 거예요?”
배를 슬쩍 문지르자 의사 선생님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기 심장 소리도 들어볼 겁니다.”
“심장 소리….”
조그만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에 힘이 빠졌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자 의사 선생님도 나를 따라 웃었다.
“좋아요, 아직 제대로 된 초음파를 보신 적이 없다고 하셔서 오늘 저랑 꼼꼼하게 잘 볼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감사합니다.”
다정한 말에 안심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차트를 확인하더니 내게 한번 더 물었다.
“임신 10주 차라고 적혀 있는데 맞나요?”
그 말에 손가락으로 하나둘씩 세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을 보는 권태범의 시선이 부드럽기도 하고 조금… 야해 보이기도 해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네. 크흠.”
“자 그럼 배 좀 잠깐 볼게요.”
의사 선생님이 내 옷을 살짝 들추었다. 갑자기 차가운 것이 배에 닿는 느낌과 어두워지는 환경에 내가 긴장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권태범이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곧이어 네모난 스틱이 배에 닿았고 화면에 초음파 사진에서 보았던 모습이 나타났다. 스틱을 조금씩 움직이며 의사 선생님이 화면 위로 보이는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기집이고, 가운데 굉장히 조그만 젤리곰같이 생긴 거 보이세요?”
“어… 네.”
“이게 태아예요, 이렇게 보면 팔다리도 굉장히 잘 보이네요. 벌써 아버님들을 닮아 팔다리가 긴 가봐요.”
‘엄청 코딱지만 한 게 우리 호빵이라고?’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 조그만 것 때문에 기분도 오락가락하고 입덧도 하고 그랬던 거야?
“생각하신 것보다 엄청 작죠? 지금 보면…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 길이는 3.2cm 정도 되네요, 500원보다 조금 더 큰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네….”
조그만 게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무언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기를 보니 꿈에서 만났던 백호가 떠올라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이 시기부터 주요한 장기가 형성되기 시작하니까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자 호빵이한테 더더욱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몸이 아니라 입에만 좋았던 음식만 먹은 것 같다. 앞으로는 꼭 좋은 걸로 챙겨 먹어야지.
“이제 아기 심장 소리 한 번 들어볼게요.”
그러고 보니 권태범은 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무작정 그냥 책임지라고만 했지. 그는 아이를 원하긴 했을까?
의문에 휩싸인 찰나, 검사실 내부에 우렁찬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쿵-
“아….”
“아주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 활발하게 잘 움직이고 지금 자세도 좋아요.”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는 의사 선생님 말이 호빵이의 심장 소리를 듣느라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자세한 건 진료실로 옮겨서 설명해 드릴게요.”
“네.”
그렇게 십 분 정도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다시금 권태범의 품에 안겨 진료실로 향했다.
“초음파 검사로 봤을 땐 아주 잘 크고 있습니다. 기형아 검사는 보통 12주 차 때부터 하는 게 좋은데 예약 잡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강릉은 잠깐 온 거라서 앞으로 진료는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형아 검사라는 말에 내가 잠시 몸을 굳히자 권태범이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럼 의사 소견서랑 오늘 진행했던 검사 기록 첨부해 드릴 테니까 집 근처 산부인과로 가셔서 진료 다시 받으시면 될 거예요.”
“다른 문제 될 건 없는 건가요?”
“우리 임부님 혈당이 조금 높게 나오긴 했는데 크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고 앞으로 조절만 잘하시면 임신 당뇨까진 이어지지 않을 거예요. 식단 조절만 조금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보통 이때는 잘 모르고 오는 경우가 많아 당 수치가 높게 나온다며 안심시켜주었다. 그렇게 짧은 진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나는 떨리는 음성을 숨기며 말했다.
“저기, 태범 씨.”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 아기 낳아도 돼요?”
“그럼 낳기 싫어?”
“아, 아니요! 낳고 싶어요. 근데 저… 그 합의하고 아이를 만든 것도 아니고… 저희가 막, 겨,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도 낳아도 돼요…?”
아까 초음파실에서 들었던 호빵이의 심장 소리처럼 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권태범은 바짝 긴장한 내 얼굴을 문지르며 픽 하고 작게 웃었다.
“결혼하자, 차유원.”
“네, 네? 저, 저랑요?”
“그럼. 다른 사람이랑 할까?”
“아, 아니요! 그거 저랑, 저랑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혹시나 다른 사람이랑 한다고 할까 봐 허둥지둥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태범 씨.”
장난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권태범이 내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결혼하자 우리.”
***
오랜 여행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땐 내 방은 사라진 후였다.
“어? 제 방은요?”
“부부가 각방 쓰는 거 봤어?”
부부래… 어떡해, 부부래…!
결혼하자는 그 말 이후 권태범은 종종 저 ‘부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발끝을 웅크리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겨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헉, 그러면 내 일기장은? 너무 급하게 도망치느라 갖고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됐었는데. 그걸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태범 씨 그럼 제, 제 방에 있던 물건들은요…?”
“2층 끝 방에 옮겨놨어.”
“후… 다행이다.”
내가 눈에 띄게 다행이라는 얼굴로 숨을 내쉬자 권태범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이상한 거라도 숨겨뒀어?”
“아, 아니요! 이상한 거라니요!”
나를 지금 뭘로 보는 거야! 화끈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자 권태범이 내 뺨을 꾹꾹 눌렀다.
“속은 좀 어때.”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속이 메슥거리고 헛구역질이 나와 차를 몇 번이고 세웠다. 강릉에 있을 때는 입덧은커녕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았는데 강릉에서 벗어나자마자 입덧이 시작되었다.
“안 좋아요…. 우리 호빵이가 집에 온 걸 아나 봐요.”
“호…빵이.”
‘아, 그러고 보니 권태범한테 태명을 말해준 적이 없었지?’
어색하게 호빵이를 부르는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우리 아기 태명이 호빵이에요. 꿈에서 엄청 귀엽고 새하얀 호랑이가 나와서 그렇게 지었는데, 귀엽죠?”
“그래. 잘 지었네.”
말끝이 조금 느려진 거 같은데. 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자 권태범이 피식 웃으며 나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뭐 좀 갖다 줄까? 배 안 고파?”
“아무것도 먹기 싫어요. 속이 이상해요.”
“다시 괜찮아졌나 했더니.”
권태범은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안온한 느낌에 웃음을 짓자 권태범이 내 뺨을 꾹꾹 눌렀다.
“태범 씨, 저 힘들어요.”
“미안.”
“네? 태범 씨가 왜요?”
“힘든데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는 그의 손을 잡고 내 옆을 탁탁 내리쳤다.
“태범 씨, 옆에 같이 누워주면 안 돼요?”
그러자 그가 옆에 누워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평화로움에 안도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