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67)화 (67/136)

#67

“하, 할머니. 태범 씨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니는 가만히 있그라.”

“넵.”

‘태범 씨, 미안해요.’

권태범을 도우려 했는데 할머니의 무서운 눈초리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자마자 흡-하고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시방 우리 유원이가 니랑 살림 합쳐 뿐다고 할 때도 내가 기가 막혔는디, 뭐? 임신? 니가 사람 새끼냐!”

“죄송합니다.”

집 안이 떠나가라 버럭 소리치는 할머니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호빵이가 혹시 놀랐을 까 배를 살짝 쓰다듬자 할머니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적어도 아 대학 갈 때까지는 참았어야지.”

“면목 없습니다.”

권태범은 가타부타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나 사죄를 표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할머님.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후회는 없습니다.”

“뭐라꼬?”

태, 태범 씨!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부어요? 당황스러워서 권태범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유원이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일은 다 치고 와서 결호온?”

잔뜩 화가 난 할머니는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허락 안 해주시면 어쩌지? 나 태범 씨랑 결혼하고 싶은데….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권태범이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유원이 대학은 제가 책임지고 보내겠습니다. 유원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평생 아껴주며 살겠습니다.”

쌍팔년도식 고백이지만 그게 할머니한테는 먹혔나보다.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유순해졌다.

“…우리 유원이 눈에서 눈물 한 방울 안 나게 할 수 있나?”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헙, 태, 태범 씨!”

나 잘 운단 말이에요! 그런 걸로 목숨까지 걸면 어떡해요. 취소해요, 얼른 취소해!

내가 당장 취소하라며 엉덩이를 들썩이자 맞은편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유원이가 잘 우는 건 내가 아니께, 목숨까진 안 걸어도 되고. 그리 하고 싶으면 결혼혀라.”

“네…?”

갑자기 떨어진 허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배부르기 전에 결혼혀. 와? 유원이 니 결혼하기 싫으냐?”

“아, 아니요?! 너무 하고 싶어요! 감사해요, 할머니!”

“하이고, 좋단다.”

“감사합니다, 할머님. 잘 살겠습니다.”

권태범이 바닥에 이마를 닿을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할머니가 내게 윙크를 날렸다.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권태범은 보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봤다.

엥…?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빡이자 할머니가 입 모양으로 내게 속삭였다.

‘한 번은 반대해야 내 새끼 귀한 줄 알제.’

귀여운 할머니의 계획에 나도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할머니,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그제야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 나도 권태범의 손을 꽉 잡았다.

옆방으로 건너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랑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 보니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뻐근한 허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금세 눈치챈 권태범이 내 허리를 주물러주었다. 큼지막한 손이 허리를 꾹꾹 눌러 엄청 시원했다. 눈이 조금씩 감겼다.

“으…. 시원해여….”

“더 아픈 데는 없어?”

“네에… 지금이 딱 좋아요….”

지금 당장 곯아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이 커서 그런지 살짝살짝 누른 것뿐인데 엄청 시원하네. 새삼 권태범의 손 크기를 감탄하고 있을 때 그가 허리 아래를 꾹 누르자 이상한 감각이 찌릿하고 올라왔다.

“아흣- 헙.”

입에서 나온 야릇한 소리에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차유원. 거기서 느끼면 어떡해!

부디 권태범이 듣지 못했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권태범은 내 신음 소리를 아주 잘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느낀 부분을 느릿하지만 교묘하게 짓누르는 집요한 손길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왜, 흣-, 왜 거기만….”

“글쎄. 그냥 그러고 싶네.”

“그, 그만해요.”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서 그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힘이 풀려버린 몸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헉… 태범 씨….”

바닥에 엎어지려는 나를 잡아 품에 안은 권태범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있는 권태범의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뜨거웠다. 나는 홀린 듯 눈을 감고 입을 벌렸….

“유원아!”

“윽.”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권태범의 얼굴을 주먹으로 밀어냈다. 묵직한 주먹에 맞은 권태범이 얼굴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헉, 괘, 괜찮아요 태범 씨?”

“괜찮아.”

권태범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광대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어, 어떡해.”

“너 울면 나 죽을 수도 있는데.”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거리자 권태범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씨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의 뺨을 붙잡고 호호 입김을 불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잘생긴 얼굴에 흉지면 안 되는데. 속이 상했다.

“둘이 뭐 하누.”

어느새 방문을 열고 들어온 할머니가 찰싹 붙어있는 우리를 향해 혀를 쯧쯧, 찼다.

“안 되것다. 차유원이 짐 가지고 건너와라.”

“어디를요?”

“할미방.”

할머니 방으로 짐을 옮기라는 소리에 권태범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떨어지기 싫은데…. 내가 그의 허리에 매달려 고개를 젓자 할머니의 얼굴이 엄해졌다.

“차유원이.”

“저, 저희 부부예요!”

“지금은 아니지.”

“그래도 우리 호빵이 아빠예요!”

부부는 각방을 쓰면 안 되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울었다간 권태범이 목숨 어쩌고 해서 울지도 못하겠고. 씨이….

“유원아.”

할머니와 내가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이는데 권태범이 나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권태범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내려주세요.”

바닥에 발이 닿기 무섭게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밖으로 잡아끌었다.

“태범 씨… 안녕….”

권태범을 향해 애처롭게 인사를 하는데도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며 문을 쾅, 하고 닫았다. 60세가 넘은 할머니가 무슨 힘이 이렇게 좋은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 방으로 왔다.

포근한 할머니 냄새가 가득해 기분이 조금 나아지긴 하지만 나와 권태범을 생이별하게 만든 할머니가 미웠다.

“니 삐쳤나?”

“아니요오….”

입술을 쭉 내밀자 할머니는 톡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하이고, 붕어맹치로 입 튀어나온 것 좀 봐라.”

“아으포….”

“유원아. 니 저놈이 그렇게 좋나?”

“네에….”

이미 끝난 얘기고 허락까지 해주셨으면서 왜 또 이러시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할머니의 팔을 잡고 다시 가겠다며 조르자 할머니는 내 손등을 탁, 하고 내리쳤다.

“할미가 저번에 그랬제? 알파 오메가 사이엔 자고로 밀당이 중요허다고.”

“밀당이요…?”

“그랴. 그니께 할미 집에 있는 동안은 요로코롬 거리를 좀 두면서. 저놈이 안달 나게 맹드러야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유원아. 눈 딱 감고 이 할미 말 들어라.”

모태 솔로라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런가?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숨기고 이러는 게 난 너무 어려웠다. 할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권태범이 너무 좋은걸….

같이 있어도 보고 싶고, 붙어 있어도 더 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화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속상한 마음에 두 볼을 부풀리자 할머니가 내 손에 젤리를 쥐여 주었다.

“이거 먹고 우리 똥강아지 오늘 밤만 딱 눈 감고 있으라.”

“네에….”

하지만 이게 다 날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인 걸 알았다. 나는 결국 할머니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손에 바스락거리는 젤리를 입에 넣고 싶었지만 권태범이랑 싸우기 싫으니 꾹꾹 참았다.

“하아….”

아까 낮에 하루 종일 자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니 할머니는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이쪽저쪽 뒤척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범 씨는 잘 자고 있으려나….”

귀를 쫑긋 세우고 방 밖의 소리에 집중했지만 귀뚜라미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잠든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할머니의 얼굴 위로 손을 몇 번 흔들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푹 잠이 드셨는지 눈을 꾹 감고 계셨다. 할머니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할머니 죄송해요, 근데 저 밀당은 안 될 거 같아요….”

살금살금 거실을 나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태범 씨, 자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범 씨…?”

너무 깜깜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조심히 몸을 낮추고 천천히 손을 뻗는데 누군가 나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힌 콧등에서 권태범의 향이 느껴졌다.

“노, 놀랐잖아요.”

쪽-

다정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춘 권태범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할머님은?”

“주무세요…. 근데 전 태범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두운 방 안을 핑계로 부끄러운 말을 잘도 했다. 이미 얼굴이 뜨거워진 게 느껴지니 아마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권태범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나 못지않게 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그 말에 푸흐- 하고 작게 웃었다. 권태범이 내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더니 등을 토닥여주었다.

‘근데 벌써 새벽인데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던 거지? 혹시 나처럼?’

“왜 아직까지 안 주무셨어요?”

“차유원이 올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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