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지난 몇 년 동안 가우룽싱구는 비약적인 발전과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국내외 많은 시공사 측에서 수주계약건을 따내기 위한 로비가 성행하고 있었고, 태범도 그 못지않게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마카오 쪽 조직과 왕 회장 밑에 있는 홍콩 조직이 대대적인 지역 쟁탈전을 벌였을 때, 태범은 왕 회장 쪽에 힘을 실어줬다. 그 모든 게 이번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왕 회장 측과 얘기해 조만간 스케줄 정리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태범은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주치의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임신 14주 차 정도면 안정기에 접어들어 비행기 탑승이 괜찮다고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유원을 데리고 홍콩에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여행만 가면 입덧이 사라지는 유원이니 오히려 집에 있는 것보단 괜찮겠지. 태범은 좋다고 방방 뛸 유원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화룡 그룹 쪽은 따로 신경 쓸 만한 움직임은 없지?”
“네, 일단 거기는 곧 검찰 조사가 이뤄질 거라는 얘기가 대대적으로 나와서 그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겁니다.”
대개 건설 회사가 뒤를 봐 주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듯, 화룡 그룹 또한 쌍곤파의 뒤를 봐주고 있는 기업이었다. 안 그래도 쌍곤파가 점점 세력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있어 거슬렸는데 최명진의 일까지 겹치니 넘어가 줄 이유가 없었다.
“황 검사 측에 자료 확실하게 넘기고.”
“네. 그리고 이거.”
준석은 사진 몇 장을 태범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주 화룡 그룹 차남, 조인철을 강남에 있는 룸살롱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증거는.”
“수거했습니다.”
태범은 마약을 투약한 정황이 보이는 사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까지 한 번에 엮어서 문 검사한테 보내. 확실하게 끝내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자료 정리되는 대로 문 검사와 접촉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최소 내년 하반기까지는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화룡 주식을 조금 더 매수해야겠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너무 몰아붙이면 돌아오는 위험부담이 큰 법이다. 준석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듯 조심스럽게 태범에게 말했다.
“뼈를 취하려면 살 정도는 내어줘야겠지.”
그 말인즉슨, 어느 정도 출혈은 감수한다는 뜻이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태호 그룹을 지금 수준까지 성장시킨 태범이었다. 준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그리고 윤설아 씨 말인데요.”
“윤설아는 왜.”
“상담이 아니어도 가끔 형수님의 상태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직은 안 돼.”
삼척항에서 유원이 쓰러진 이후 태범은 유원이 기억을 찾을 만한 모든 상황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중 하나가 심리 상담이고 과거를 떠올릴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원의 상태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고민하는 태범을 향해 준석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윤설아 씨 공부 잘하지 않으십니까. 의사니까요.”
“그래서.”
“윤설아 씨한테 형수님 공부를 맡겨보는 건 어떠십니까. 가장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인 거 같아서요.”
“…글쎄.”
차유원은 정이 많았다. 쉽게 제 곁을 내어주고 쉽게 사람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알파인 윤설아를 유원의 곁에 두어도 괜찮을까. 물론 두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저가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렇게 해.”
하지만 유원을 위해서라면 좋은 방법이긴 했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한 태범의 얼굴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웃은 준석은 천천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권태범의 페로몬 향이 느껴지는 걸 보니 벌써 나를 깨우러 왔나 보다.
“유원아. 이만 일어나야지.”
하지만 너무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내 마음대로 생활했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패턴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권태범과 나의 공통된 의견이었는데…. 역시 사람은 계획대로 살 수 없었다.
“으응… 오 분만….”
비몽사몽해선 잠기운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자 권태범이 나를 추슬러 안았다.
“많이 피곤해? 그냥 더 잘래?”
날 깨울 생각은 있는 건가? 권태범의 다정한 목소리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잠결에 웃어버리자, 권태범이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잤어?”
“네에…. 아, 회장님은요?”
그의 팔을 잡고 내려달라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 말을 따라 나를 바닥에 내려준 그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분간 별채에 머무르기로 했어. 대신 내가 없을 땐 본채로 못 오시게 할 거니까 너무 걱정-”
“네? 뭐라고요?”
지금 권태범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 건지. 지금 제 아버지를 별채로 보냈다는 말이야?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권태범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 진짜. 태범 씨 진짜 딱 기다리고 있어요.”
잠기운이 확 달아나버렸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뻗친 머리를 물에 적셔 준비를 마쳤다. 1층으로 내려가는 나를 뒤따라오던 권태범은 내가 현관문으로 향하자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
“별채요.”
마치 ‘네가 거길 왜?’라고 묻는 것 같은 눈빛에 입을 열었다.
“회장님 모시고 와야죠.”
“아버지는-”
“그러니까요.”
권태범의 말을 뚝 자르고 선수쳤다.
“태범 씨 아버지잖아요. 잘 얘기해보라니까 어떻게 그렇게 별채로 홀랑 보낼 수가 있어요?”
뾰족한 어투로 나무라고 ‘태범 씨, 정말 실망이에요.’라고 조용히 내뱉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섰다.
“형님, 형수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들.”
마당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하니 밖으로 나가려던 건지 아저씨들이 나와 권태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활짝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형수님 오늘따라- 헙.”
“네?”
“아,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저씨들은 나를 향해 무어라 얘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바로 뒤에 서 있는 권태범의 얼굴을 보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자리를 떴다.
권태범이 눈으로 욕이라도 했나. 왜 이렇게 겁을 먹으셨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데 권태범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회장님은 어디에 계세요?”
“…….”
“태범 씨.”
권태범은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입을 꾹 닫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회장님이랑 같은 집에 있는 게 싫은 건가?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20년 이상을 산 나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첫 번째 집부터 하나씩 찾아가면 되겠네요. 너무 많이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좀 고픈 것 같은데 태범 씨가 협조할 생각이 없으면 그렇게 하세요.”
혼자 중얼중얼 말을 내뱉자 권태범이 결국 나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별채 중에서도 본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물 앞에 멈춰 선 권태범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아버지가 본채에 오면 네가 피곤해질 거야.”
“네. 괜찮아요.”
회장님은 나를 엄청 반대하고 우리 사이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으름장 놓으려 오신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랑 놀려고 오셨다던데. 아까 명훈 아저씨한테서 권태범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쓸쓸하고 커다란 집에 혼자 있을 회장님을 상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저희 그냥 합가할까요?”
“그만.”
“넵.”
합가까지는 오버였나 보았다. 아주 그냥 정색을 해서 꼬리를 내렸다.
띵동-
“아버지.”
권태범이 벨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편안한 옷차림을 한 회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여긴 무슨- 오, 새아가도 왔구나?”
권태범과 비슷하게 차가운 얼굴을 한 회장님은 그 옆에 선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크흠. 여긴 무슨 일이냐, 아가.”
“제가 없는 사이에 태범 씨가 회장님을 별채로 모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참,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역시 서운하신 게 분명했다. 씁쓸한 얼굴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는 회장님이 측은했다.
“저희랑 본채로 건너가요, 아버님!”
은근슬쩍 회장님에서 아버님으로 호칭을 바꾸고 손을 잡았다. 그러자 회장님, 아니 아버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딱딱하게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아빠라고 부르렴, 아가.”
싱글벙글 웃는 아버님을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앞으로 처, 천천히 할게요. 하하…. 아버님도 저를 그냥 유원이라고 불러주세요.”
재벌 아빠가 생기면 나야 좋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부를 자신은 없었다.
“허허. 그러자꾸나.”
다행히 아버님은 인자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화기애애한 우리를 바라보던 권태범은 아버님을 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 나오세요.”
“사실 새아가, 아니지. 우리 유원이가 이럴 줄 알고 짐을 풀지도 않았다. 허허.”
권태범의 말대로 그냥 넘어갔으면 아주 큰일 날 뻔했다. 남몰래 안도하고 내 손을 잡는 아버님을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우리의 뒤에서 권태범이 쯧- 하고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