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00)화 (100/136)

#100

개학하고 첫날인 만큼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간단한 수업만 진행했던 학교 수업이 끝이 났다. 첫날부터 주번인 것은 조금 운이 없었지만, 나름 괜찮은 하루였다.

가게가 오픈하기 전에 서둘러 재료 손질을 해야 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서려는데 김상철이 문 앞에서 나를 가로막았다.

“야, 얘기 좀 해.”

항상 붙어 다니던 친구들은 먼저 보냈는지, 교실에는 김상철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주먹을 꽉 쥐고 눈에 힘을 주었다.

“너랑 할 얘기 없어.”

“야, 씹- 비싸게 굴지 말고 얘기 좀 하자고.”

“하… 야, 김상철.”

김상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지독한 악연은 언제 끝이 날까. 졸업만 한다면 끝날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째 반복되는 일상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너 나 좋아해?”

“…뭐?”

허를 찔린 듯 일그러진 김상철의 표정이 그 대신 대답해주고 있었다.

설마 진짜 나를 좋아하고 있을 줄이야.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온통 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항상 아닌 척 뒤쫓아 오는 시선과 결정적으로 방학식에서의 그 일은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나를 억지로 노래방으로 끌고 가 강간하려 했던 그날만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당장이라도 김상철을 죽여 버리고 싶은 나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너 싫어해.”

“…….”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할 만큼 너를 증오해.”

“야, 차유원. 누가 너, 너 같은 더러운 오메가 새끼를 좋아한다고-”

내 말을 듣고만 있던 김상철이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내 뺨을 후려칠 듯 위협적이었지만 눈 한번 피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그렇게 놀라지는 말았어야지.”

“…….”

“넌 진짜 비겁한 새끼야.”

“씨발, 이러니까 내가!”

김상철을 이를 악물더니 내 어깨를 세게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니가 이러니까 그동안 괴롭힌 거야. 그렇게라도 해야 날 보니까!”

정말 최악이었다. 겨우 그런 감정 하나 때문에 그동안 지독히도 나를 괴롭힌 거였다니. 저 스스로 깨닫지 못한 비틀린 감정에 대한 화살을 나에게 돌리다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너무도 비겁한 일이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설움과 세월이 안쓰러웠다. 내 자신이, 내가 흘렸던 피와 눈물이 너무 가여웠다. 모든 일이 전부 허탈했다.

“놔.”

“야, 차유원!”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놓으라고!”

있는 힘껏 소리치자 김상철이 나를 놓아주었다. 이를 악물고 그를 쏘아보았다.

“다신 나한테 말 걸지 마. 아는 척도 하지 마. 그냥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탁해진 시선으로 나를 쫓는 김상철을 버려둔 채 홀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빨리 형을 만나고 싶었다. 형에게 가고 싶었다. 겨우 저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턱에 단단히 힘을 주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걸음을 빨리하다 결국 복싱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나를 꽉 끌어안는 단단한 품에 몸을 기대고 싶었다.

“하아, 학… 후우….”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몇 초마저 초조했다.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튕겨 나갈 듯 횡단보도를 건너 쏜살같이 복싱장으로 달렸다. 계단을 단번에 올라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꽉 잡은 채 문고리를 잡았다.

“선은 잘 봤어?”

“그냥 뭐….”

“예뻤냐?”

이게 무슨 소리지? 문가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문고리를 꽉 잡은 채 걸음을 멈추었다.

‘선… 이라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숨을 작게 내뱉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는 생각으로 아랫입술에 힘을 주며 조용히 입을 다물자 그들의 대화가 이어져갔다.

“일은 제약 둘째 딸이라고 했나?”

“어.”

“캬, 이 복 많은 자식. 일은 제약이면 예쁘다고 자자하던데! 게다가 우성 오메가라면서.”

“어.”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아무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잘 생각해봐. 그리고 집안에서 연결해 준 거…….”

차마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건물을 빠져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미 한계치까지 몰아붙인 다리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지고 아스팔트에 살갗이 쓸렸다. 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더 아팠다.

‘그래, 나랑은 너무 다른 사람이야. 나랑 사는 세계가 달라.’

이렇게 아는 사이로 지낸다는 것부터가 기적일지도 몰랐다. 눈물과 함께 형을 향한 감정이 힘없이 무너져 내려 바닥을 적셨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있다가 비척비척,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뜨거운 열기에 질식할 거 같았다.

“조금만 쉴래… 힘들어.”

그대로 침대 안으로 들어와 뜨겁고 무거운 머리를 베개에 기댔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그저 조금만 잠들고 싶었다.

***

밤새 열이 올라 죽을 고비를 넘겼다. 늦은 새벽. 가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가 나를 살피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만큼 위험했다.

아랫배를 누가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이 일었다. 혈관 사이사이에 누가 억지로 불덩이를 밀어 넣는 것 같은 작열통도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기어 나왔을 때는 모든 기력을 소진해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희미한 시야에 할머니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연신 부르시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오메가로 발현하셨습니다.”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지금, 뭐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안경을 바로 세운 의사 선생님은 묵묵하게 말을 전했다.

“평균적인 발현 나이보다 늦긴 했는데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닙니다. 다만 후천적인 이유가 있었을 거 같은데, 최근에 알파와 접촉한 적, 있었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그 말을 하자 권태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파 중에서도 우성 알파라던 그의 형질이.

“그, 그게 이유가 되기도 하나요?”

“당연하죠. 특히나 차유원씨 같은 경우에는.”

의사는 힐끔 나를 내려 보더니 차트를 톡톡 치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도 극극극, 극 열성 오메가였을 확률이 높은데, 거기에 혹시라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게 발현의 원인이 된 거 같습니다.”

우성 알파라면… 형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권태범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무 살을 겨우 몇 달 앞두고 갑자기 발현한 이유가 그 밖에 없었다.

“그, 그럼 다시 베타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을까요? 오, 오메가는 싫어요, 선생님.”

“이미 오메가로 발현한 이상 페로몬 샘도 완전히 생성되었기 때문에 돌아갈 방법은 없을 거 같네요.”

게다가 오메가의 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탓에 페로몬 샘 제거 수술도 우리나라에서는 합법이 아니었다.

“저, 저는 그럼… 어떻게 하면, 하윽.”

결국 나를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추측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오메가라니, 내가 오메가가 되었다니.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손에 닿는 것을 마구 긁고 발버둥을 쳤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때마침 물을 떠오던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아가! 유원아!”

할머니는 급히 내 손을 붙잡고 상처를 살폈다. 피가 나는 곳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

“할머니….”

“괜찮어, 다 괜찮어.”

내 등을 쓸어주며 괜찮다고 달랜 할머니도 결국 눈물을 훔쳤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오는 것부터 할머니가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런 모습을 보이게 해드려 죄송했다.

하지만, 그동안 겨우 버텨내고 있던 내 앞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파도가 나타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저 오메가래요….”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기도 하는구나. 헛웃음을 터트리는데 몸이 덜덜 떨렸다. 흐느끼면서 할머니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말았다.

“제가 오메가래요… 흐으….”

“아가….”

“저 이제 어떡, 흡, 어떡해요? 저 싫어요. 진짜, 흐으아….”

단 한 번도 할머니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울어본 적은 없었다.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할머니가 잠이 든 새벽이 되어서야 이불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렇게 내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듯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 할머니도 많이 당황하셨을 거였다.

작고 노쇠한 품에 기대 눈물을 뚝뚝 흘려대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보호자 분, 일단 환자 분이 안정을 먼저 취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충분히 상황 설명을 전달해주세요.”

그런 다음 병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나는 황급히 멀어져가는 선생님을 붙잡을 듯 손을 뻗었다.

“아가. 괜찮어. 오메가라지만 열성이고, 약만 잘 먹으면….”

“그래도, 그래도 오메가잖아요.”

역시 내가 오메가로 발현하는 건 모두가 예상한 일이었을까, 그래서 학교에서 그들이 나를 오메가로 확신하듯 그렇게 말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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