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131화 (130/136)

외전 15

아오, 씨. 찬물 세수의 효과는 이제 끝이 나는지 점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 담배 새끼 때문에 그나마 잠잠해졌던 속도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시계를 보니 이제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취했으니 양해를 구하면 보내 줄지도 몰랐다.

“선배님, 저 몸이 안, 후우, 좋아서….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 어디 가. 아니다. 나 자취하는데 우리 집 갈래?”

나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런 눈빛이나 행동을 보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은근히 내 몸을 조금씩 터치하던 남자는 순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알파인가. 만약 이 선배 놈이 페로몬으로 날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무척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난 이미 형과 각인한 몸이라 페로몬이 통하지 않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쌍방 각인이 쉬운 것도 아니고.

“베타였어?”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선배 놈과 말을 하면 할수록 술기운이 사라지고 정신이 말짱해지는 기분이었다. 후, 어찌 됐든 더 이상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서둘러 짐이 있는 가게로 돌아가려 몸을 돌린 순간, 남자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하… 진짜 피곤하다, 피곤해.

어쩜 내 손목을 붙잡는 인간은 한두 명이 아닌 건지. 어딘지 이 남자 선배 놈을 보자 지금쯤 감옥에서 썩고 있을 인간이 떠올랐다. 후, 하고 짙은 한숨과 함께 남자의 팔목을 잡고 몸을 휙 돌아 그의 명치를 팔꿈치로 세게 내리쳤다.

“악, 시발-”

“야, 너 몇 살이야?”

내가 가뜩이나 늦게 들어오고, 동기들보다 나이도 많아서 꼰대 짓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놈이 하는 꼴을 보니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냈다. 바닥에 넘어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묻는데 그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꿈틀거렸다.

“씹, 너 학교생활 그만하고 싶어?”

아, 어차피 든든한 남편도 있고 귀여운 아들도 있겠다, 학교생활 따위 혼자 하든 둘이 하든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이놈한테 휘둘릴 대학 같으면 차라리 내 발로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남자의 명치를 발로 한 번 더 꾹 눌러 준 다음 버럭 소리치는 선배 놈을 향해 말했다.

“너나 조심해. 우리 남편이 얼마나 질투가 많은 사람인지 알아?”

나는 남자를 향해 내 약지에 끼워져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었다. 아니, 다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반지도 까먹지 않고 꼬박꼬박 끼고 다녔는데 이렇게 딱, 아주 대놓고 끼고 있는 반지를 대체 왜 못 보는 거지?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선배 놈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더니 포기한 얼굴로 바닥에 누워 버렸다.

“다신 아는 척하지 마세요. 이름도 모르는 선배놈아.”

남자를 향해 마지막 말을 내뱉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스스로 이상한 놈들을 퇴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러워졌던 기분도 제법 나아졌다. 자리에 앉자 동기들이 무슨 일 있었냐며 물어 왔다.

“아니야, 별거 아니었어. 아, 목마른데 이거 마셔도 되지?”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탔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물컵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는데, 예상치 못한 알싸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컥, 으….”

“헉! 그거 소주인데…!”

“으… 써….”

급하게 마시느라 소주인 줄도 모르고 한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 큰일 났다. 벌써부터 속이 화끈거리며 그나마 잠잠해졌던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시야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

“우웅, 우버미… 우버미랑 태버미 보고 시퍼….”

“유원이는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갑자기 술집에 등장한 한 남자의 모습에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찬물을 맞은 듯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봐도 우성 알파에, 가게 앞에 고급 세단을 멈춰 세운 남자는 술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모든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 없다는 얼굴로 술집 한쪽 구석으로 걸어간 남자, 태범은 테이블에 쓰러져 있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 괘, 괜찮았었는데 소주를 물로 착각하고… 먹, 아니, 드셔서….”

“후우… 그랬습니까.”

태평양 뺨치게 드넓은 등에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깜찍한 남자아이가 업혀 있었다. 큰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빼꼼 내민 아이는 토끼 귀가 달린 잠바를 입고 한 손에 호랑이 인형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앞에 있는 남자와 유원을 쏙 빼닮은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해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입을 벌리고 비현실적인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압빠, 파파 왜 구래…?”

“그러게, 유원 아빠가 왜 이럴까.”

유원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 만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남편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을 줄은….

“어어… 형이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있던 유원이 다정하고 편안한 손길에 눈을 떴다. 너무 보고 싶었던 태범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 찼다. 축 늘어져 있던 유원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유원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을 일으켜 태범을 와락 끌어안았다.

“형! 헤헤- 진짜 형이다아….”

“후우… 차유원. 누가 이렇게 많이 먹으래.”

“우응… 많이 안 먹었는데에….”

많이 먹은 기억이 없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하던 유원은 마지막에 물인 줄 착각하고 먹은 소주를 기억해 냈다. 그걸 생각하자 어쩐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형이랑 약속한 대로 적당히 잘 먹었는데 마지막에 그 이상한 선배 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금세 눈가를 붉히며 훌쩍거리는 유원의 모습에 태범은 혀를 차며 유원을 번쩍 일으켜 품에 안았다.

“일단 집에 가자. 울지 말고.”

“어어… 우리 아기도 있었네에…?”

“압빠, 치했어?”

태범의 품에 달랑 안겨 코를 훌쩍거리던 유원은 어깨 너머 호빵이의 모습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의 얼굴을 끌어안고 뽀뽀를 하자 유범이가 답지 않게 유원을 밀어냈다. 유원은 처음 마주한 상황에 당황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파파, 술 냄새나. 유범이 시러….”

“…지, 진짜…?”

“응. 파파 치했어, 지굼.”

이럴 때는 태범을 닮아 단호한 유범이었다. 아이는 술 냄새가 나는 유원의 입맞춤을 거절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유원 아빠를 만나러 간다길래 따라 나온 건데 사람도 많고 술 냄새까지 나는 상황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흑… 호빵이, 아빠 싫어…? 흐, 아빠는 호빵이가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데….”

하지만 태범의 품에 안긴 유원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유범이의 거절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유원은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쏟아 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한숨을 쉰 태범은 해수의 도움으로 유원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여기 오늘 이걸로 계산하세요.”

“네?”

태범은 가게를 나가기 전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해수에게 내밀었다. 검은색, 그것도 아무런 광이 없는 깔끔한 무광 블랙의 카드를 건네받은 해수는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우리 남편이 실례를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늘 학생들이 먹고 싶은 걸로 먹고, 이걸로 계산하세요. 카드는 내일 유원이 편에 주시면 되고요.”

“아, 그래도…!”

“아, 다음에도 혹시 이런 일이 있으면 여기로 전화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드와 함께 태범은 자신의 명함을 해수에게 건네주곤 가게를 빠져나갔다. 세 식구가 자리를 떠나고 뒤늦게서야 카드와 함께 명함을 내려다본 해수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태호그룹… 권태범 회장?”

태호그룹은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 회사 1위이자, 몇 년 전부터 건설 외에도 자동차 등 다방면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런 대기업의 젊은 회장이 유원의 남편이었다니….

해수는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를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킨 뒤 혼잣말을 이어 갔다.

“와… 유원 오빠 남편 대박….”

***

태범은 유원을 조수석에 내려 주고 뒷좌석 카 시트에 유범을 앉혔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그는 유범의 말에 충격을 받아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는 유원을 한참이나 달랬다. 유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서서히 그쳤다.

세상에서 가장 서럽다는 듯 울던 것도 잠시, 따뜻한 히터에 녹아내린 몸을 시트에 기대고 잠이 든 유원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뒤에서 그런 파파를 지켜보던 유범은 푹, 하고 어린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시퍼. 유버미 치곤해.”

“그래.”

하루 종일 유원을 기다린 유범을 알기에 데려왔던 것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고 올 것을 그랬다. 태범은 아이의 빵빵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다음 차에 시동을 걸었다.

번화가를 빠져나와 한산한 도로에 들어서니 조용한 밤이 찾아왔다. 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한 태범이 고개를 돌리니 입을 벌리고 고롱고롱한 소리를 내며 깊이 잠이 든 유원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유범도 유원과 똑같은 자세로 입을 벌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지….”

“우웅….”

“참 나… 그래. 일단 집에 가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