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유준은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의 말을 신경 써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의심하는 유준의 기색을 고스란히 읽어 내면서도 사영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그가 생각을 마치길 기다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방법이었던 터라 이제 와 초조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유준이 단순히 사영을 미친놈으로 생각해도, 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만나 보니 평범하게 접근했다면 유준은 한재우의 배우자였던 자신을 경계했을 터라 제대로 된 대화조차도 나누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유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영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아직 그에게 밝히지 않은 이유 하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사영은 유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곧추세운 유준이 말했다.
“도대체 누구한테 뭘 어떻게 복수한다는 건지.”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사영은 그가 저런 목소리로 한재우의 호감을 칼같이 거절하며 벽을 세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유준에게는 적잖이 의심스러운 미소였겠으나 제 앞에서는 늘 오만하게 콧대를 치켜세우던 한재우가 이 사람 앞에서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였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지금 자신이 비웃는 게 한재우인지, 아니면 그런 한재우에게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매달리던 자신인지는 모호했다. 어느 쪽이든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유준은 사영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복수에 왜 내 도움이 필요한 건지.”
“…….”
“그리고 내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우선 일주일 후에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도록 하죠.”
순간 이불을 쥐고 있던 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당장은 믿지 않아도 증명해 보일 기회를 한 번은 주겠다는 뜻이었다.
“네. 좋아요.”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자신이 삶을 틀어 버린 이상 이후의 일들이 죽기 전과 똑같이 흘러갈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만약 과거의 일이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차피 사영이 세운 계획은 전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릴 테니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타격도 없었다.
유준은 순순히 대답하는 사영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요. 어차피 언론의 관심을 피하려면 당신도 그게 편할 테니까.”
“네, 그럴게요.”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낸 것치곤 지나치게 순종적이고 조용한 태도였다. 유준은 여전히 그런 사영의 태도가 거슬렸다.
처음 병실에 들어와 마주했던 느낌 그대로,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그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흐릿해 보였다.
유준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과도 비슷했는데 유준은 그것이 눈앞의 이 사람이 가진 특이한 존재감 때문인지, 아니면 한재우와 엮인 사람이라는 것 때문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유준의 짧은 인사에 마찬가지로 간단한 인사가 되돌아왔다. 도와 달라는 말을 해 놓고도 그는 유준이 저를 믿어 주든 그렇지 않든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유준을 매캐한 공기를 떨쳐 내려는 사람처럼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틈 너머의 사영을 보았다.
그는 이미 유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공기가 채 유준에게 닿아 오기 전, 병실 문이 닫혔다. 그뿐이었다.
***
“뭐래요?”
유준이 차에 타자 운전석에 있던 정민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차에서 대기하는 내내 초조하게 기다린 티가 났다.
처음부터 이 상황을 석연치 않게 생각하던 정민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의 빛이 어려 있었다.
유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마구 엉켜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다만 자신을 보던 윤사영의 눈빛과 얼굴만이 또렷이 떠올랐다.
복수를 말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표정. 말이 안 되는 미친 소리를 해 대면서도 이질적으로 차분했던 눈동자.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었다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던 고요한 목소리. 오로지 그런 것들이.
정민은 심상치 않은 유준의 침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하필 그 자리를 ‘우연히’ 지나가다, ‘우연히’ 유준을 구한 게 윤사영이라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민이 유난스럽게 반응한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정민에게는 나름의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이혼하긴 했지만 한재우와 윤사영의 러브스토리는 한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 만큼 요란했다.
결혼 후에도 한재우가 자신의 배우자를 얼마나 아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둘의 이혼을 두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별의 책임은 윤사영에게만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토록 배우자를 사랑하는 한재우가 이혼 전부터 유준에게 치근덕거렸다 한다면 순순히 정민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준의 가장 가까운 곳에 늘 붙어 있는 정민은 알고 있었다. 한재우는 결코 사람들이 말하는 대단한 ‘사랑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적어도 최근에는 아니다.
그 탓에 안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유준이 한재우와 엮이는 일을 막고 싶은 마당에 이런 식으로 그의 전 배우자인 윤사영과 얽히다니.
설사 사영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민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한참의 침묵 뒤에야 유준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좀 두고 보자. 대신 한 번씩 누가 드나드는지 좀 확인해 봐.”
“…네, 그럴게요. 집으로 가실 거예요?”
“응.”
유준은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며 창밖을 보았다. 애써 밀어낸 보람도 없이 사영의 유령 같은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보나 마나 헛소리일 게 뻔하다. 차라리 갑자기 신내림을 받아 미래를 보는 눈이 생겼다고 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믿음이 갔을 것이다. 한 번 죽었다가 갑자기 되살아나 과거로 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정말로 머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도 윤사영이 말한 스캔들 같은 건 벌어지지 않을 거고, 유준이 이렇게 그의 말을 곱씹고 있는 순간들은 헛된 시간이 될 게 뻔했다. 확신했다.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복수를 말하던 사영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하게 아른거리는 건 무엇 때문일까.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 값싼 흥미가 돋기라도 한 걸까.
수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던 이가 되살아난 삶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복수란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말하는 ‘죽기 전의 삶’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죽음에 다다르고, 다시 살아나 복수를 꿈꾸게 된 걸까.
실재하지 않을 망상의 세계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유준은 계속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복수라….”
“네? 뭐라고 하셨어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은 정민이 앞에서 룸미러로 유준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유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미친 소리를 조금 더 캐묻고 더 들어나 볼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그 모든 게 미친 헛소리로 밝혀지기 전, 그 망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더 구체화되어 있는지 들어나 볼 걸.
점점 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 너머로 한재우의 곁에 서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사영이 떠올랐다.
그의 헛소리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건 아마 그때의 모습이 유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던 탓인 건지.
심상을 어지럽히는 기억을 빠르게 지워 내며 유준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일주일 후면 그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이 날 테고 그 이후엔 사영과 다시 엮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유준은 그렇게 확신했다.
***
윤사영은 자신이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잘해도 좀처럼 진심을 주지 않는 한재우의 곁에 남기 위해 헛된 기대 같은 건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결국 언젠가는 정말로 너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하지만 재우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보다도 더 차가운 눈빛과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마주한 바로 그 순간.
사영은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영은 여전히 어떤 기대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