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8화 (8/193)

#008

유준은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는 사영의 얼굴에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다.

지금쯤 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아니면 유준이 오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어서 동요하지 않은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유준은 병실 안으로 곧장 들어서지 않고 문간에 서서 사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의심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영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옅은 가을색의 눈동자는 유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투명한 유리벽처럼 시선을 통과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다시 느껴졌다. 윤사영이 있는 공간은 밖의 세상과는 완전히 괴리된 다른 차원 같았다.

유준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면 원래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와는 다른 공간으로 완전히 먹혀드는 건 아닐까 하는 기묘한 두려움이 일었다. 우스운 감정이었지만 마냥 웃어넘기기 어려운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순,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그냥 미친놈을 잠깐 만났다 치고. 예언 같은 건 그저 우연이었거나, 그가 인맥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자신을 농락한 일이었다고 단정 지으면서.

이대로 돌아가 남은 치료의 금전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적절한 보상금 따위를 주는 것으로 기분 나쁘게 얽힌 인연을 끊어 버리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러면 윤사영의 세 치 혓바닥에 놀아나는 일도 없을 거고, 한심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는 일도 더는 없을 테니까.

그냥 한 발자국만 돌아나가면 된다. 그러면 사영은 자신을 잡지 않을 거고,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거라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유준이 그 모든 고민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도 네 선택이 무엇이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고요한 태도의 사영은 유준의 확신을 뒷받침해 주었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하지만 결국 유준은 말없이 돌아서 사영의 공간에서 벗어나는 대신 안쪽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말을 걸며 등 뒤의 문을 제 손으로 닫았다.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의 파동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되어 유준을 병실 안으로 떠밀었다.

잘 만든 인형처럼 앉아 있던 사영은 유준의 물음에 그제야 숨을 깊이 내쉬곤 대답했다.

“들은 게 아니라, 직접 겪은 거예요.”

주어가 없었음에도 사영은 곧장 의도를 파악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상적인 이해력이었다.

다만, 그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이 여전히 미친 소리 같은 게 문제였다.

유준은 사영의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든 윤사영은 어제보다 더 마르고, 약하고, 그리고 흐릿해 보였다. 그것이 또다시 신경에 거슬려서, 유준은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당신 헛소리에 맞장구쳐 주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

이전과는 달리 위협적인 음성이었다. 그런 유준의 태도에도 사영은 여전히 별다르게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다시 병실 안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유준은 사영에게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유준의 요구대로 윤사영이 말했다.

“저는 유준 씨를 속이고 싶지 않아요. 내 불행에 당신의 그림자가 존재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김유준 씨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

“그래서 나는 당신을 속여 이용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사영의 대답을 듣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영은 한재우가 유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그들의 치정 싸움에 억울하게 끼게 된 입장이기도 했지만 꼭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사영이 유준을 거짓으로 꼬드기려 했다면 이것보다 나은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만약 사영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이것은 사영이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선택지 중 최악이었다. 바로 그 점이 자꾸만 유준의 마음속에 혹시나, 하는 의심을 피워 냈다.

너무나도 거짓말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게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영은 혼란스러워하는 유준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김유준 씨 마음에 달렸어요. 믿기지 않으면… 믿고 싶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면 돼요. 그럼 끝날 일이에요.”

그럼 끝날 일이에요.

사영의 그 말이 기묘한 파동이 되어 유준의 마음을 헤집었다.

그의 말대로다. 유준이 여기서 돌아나가면 그것으로 모든 건 끝이다. 이 일은 그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될 거고 유준은 아마도 영영, 윤사영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갈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하게.

“후….”

유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유준은 한재우가 제게 보이는 관심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단순히 한재우가 제게 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가 알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하고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하물며 결혼까지 한 유부남이 그런 식으로 질척대니 여태 얼굴에 주먹을 꽂지 않고 참은 게 대견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윤사영과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이제는 이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재우와 수년간 결혼 생활을 지속하던 사람과 굳이 얽혀 봐야 여러모로 피곤할 일만 생길 게 당연했다.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믿어야 할 이유는 없고 오히려 믿어선 안 되는 이유만 즐비했다.

그런데도 왜 유준은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계속 사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의문을 곱씹으며 유준이 말했다.

“복수할 사람이 있다고 했죠.”

유준은 오히려 사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복수할 사람이 있다고, 그 복수에 유준 씨가 필요하다고 뻔뻔하게 말하던 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사영은 지극히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복수에 왜 내가 필요합니까?”

“…….”

“사실은 복수의 대상에 내가 포함된 건 아니고?”

유준은 의심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한재우의 마음을 사영이 알고 있었다면 유준 역시 사영에게는 적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유준은 잘못한 게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본디 논리적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질 않나.

사영의 입장에서는 재우의 마음을 앗아 간 유준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영은 잠시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려 이불을 쥐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윤사영의 손이 유준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한겨울 나뭇가지 같은 그의 손이 마치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최고의 스타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결혼 생활을 지속한 사람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꼴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메마르게 만들었을까.

정신 이상을 앓는 것이든 아니면 정말 죽음을 겪고 와 복수를 꿈꾸는 이가 된 것이든 그의 삶이 온전히 행복하게 흘러갔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준은 처음으로, 저와 상관없는 완벽한 타인의 삶이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그사이 짧은 침묵을 끝낸 사영이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저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제가 굳이 그 말에 대답할 필요도 없겠죠.”

“…….”

“제 부탁을 받아들여 준다면, 모든 건 그때 설명할게요.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말해 드릴 용의가 있어요.”

역설적이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준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예언과도 같은 증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자신이 그의 미친 계획에 동참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뿐이었다.

표정을 굳힌 유준이 대답했다.

“아니. 중요한 건 당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야.”

“…….”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당신의 헛소리에 내가 동참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중요한 거죠. 아닙니까?”

유준의 말에 사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유준이 사영의 유치한 복수극에 동참하는 건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까 내 도움이 왜 필요한지를 말하고 나를 설득해요. 당신이 미친 사람이어도 내가 돕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기꺼이 도울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사영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뱉기를 반복했다. 유령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가진 이가 마른 가슴을 들썩이며 숨 쉬는 모습은 눈에 거슬릴 만큼 이질적이었다.

유준은 문득 무릎을 덮은 이불 위에 얹어진 그의 두 손이 추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윽고 눈을 뜬 사영이 다시 말했다.

“제가 죽기 전 한재우는… 아직 그의 배우자였던 저에게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제발 자기 인생에서 꺼져 달라고 말했어요.”

남들 앞에 쉽게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을 걸어 사랑한 사람에게 그런 말까지 들은 주제에 더 이상 남아 있는 자존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깟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사영은 유준의 다른 것을 얻고 싶었다.

“저는, 한재우가 꼭 저와 같은 방식으로 비참해지길 원해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유준은 알 수 있었다. 한재우가 죽기 전의 그에게 말했다던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게 어떤 건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서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여전히 사영은 너 같은 걸 감히 김유준 같은 사람과 댈 수나 있을 것 같으냐고 말하며 눈앞에서 자신을 비웃던 한재우의 얼굴을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도대체 나는 그의 무엇을 그토록 사랑했을까.

사영은 자조의 상념에 빠져들지 않도록 애쓰며 유준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공허함이 그 어떤 증오의 감정보다도 더 유준의 숨을 막히게 했다.

자신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사영은 알고 있을까.

입 밖으로 뱉지 못한 유준의 의문을 뒤로한 채 사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김유준 씨, 당신이 필요해요.”

“…….”

“당신이야말로 한재우를 바로 그 비참한 감정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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