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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1화 (11/193)

#011

“저, 혹시….”

퇴근하기 위해 병실을 나서는 간병인의 발길을 붙든 건 좀처럼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잘 없는 사영의 목소리였다.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나 싶어 돌아보는 간병인에게 사영이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고용하신 분이 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간병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 건지 순간 걱정이 된 탓이다.

간병인은 어쩌다 한 번씩 고용주에게 사영이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누굴 만나진 않는지,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없는지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고용주와 사영이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간병인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사영이 온화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사영의 그 말이 순식간에 간병인의 마음을 허물어트렸다.

간병인은 자신이 맡게 된 사영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는 사영이 나왔던 드라마를 꽤 재밌게 챙겨 보던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 자신이 간호할 사람이 바로 ‘그’ 윤사영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사영은 간병인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도, 그간 들었던 소문과도 전부 다 달랐다.

그는 과거 사랑스럽게 웃던 모습보다는 더 슬퍼 보였고, 조용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였다. 또한 소문처럼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는 말수는 적었지만 말을 해야 할 때는 늘 예의 바르고 온화한 말투를 사용했다. 조용한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타인을 향한 배려가 엿보였다.

오랫동안 간병 일을 하며 사람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무례해질 수 있는지 몸소 겪어 온 이에게는 충분히 좋은 인상을 받을 만한 시간이었다.

밖에서는 한재우와 윤사영의 이혼을 두고 이렇다 저렇게 말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사영을 향한 모진 말들이었지만 간병인의 눈에 사영은 표독스럽거나, 남편의 성공을 시기해 집요하게 그를 괴롭히고 급기야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남편과의 가정을 파탄으로 내몬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굳이 말을 전해서 좋을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입을 열게 된 것은.

“…이따금 사영 씨의 몸 상태를 묻거나, 병실로 누군가가 찾아오진 않았는지를 묻곤 하시더라구요.”

“아….”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진 않았고 사영 씨를 걱정하는 기색이긴 했는데….”

고용주는 간병인에게 물으면서도 딱히 사영에게는 이것을 비밀로 해 달라느니 하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어쩌면 그 정도는 눈치껏 당연히 지켜 주리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절대로 사영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면 분명 경고를 했을 거라고, 간병인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래도 혹시나 말을 전한 게 큰 문제가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전부 떨칠 수는 없어서 간병인은 최대한 좋게 들릴 수 있도록 말했다.

간병인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사영이 곧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께 들은 말이 없는 걸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상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단번에 파악해서는 그 불안함을 덜어 주는 사영의 모습은 아무리 나쁘게 꼬아 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간병인은 곧 사영을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병실을 나섰다.

아무리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저런 사람이 한재우에게 그토록 고약하게 굴었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단순히 말 몇 마디를 예쁘게 해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직접 마주 겪은 사람에 대한 감각이었다.

연예인에 관한 소문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간병인은 병원 복도를 서둘러 걸었다.

***

사영은 착실하게 치료되어 가는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이 부상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모든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한 보람이 있었다.

조금 전 간병인에게 들은 대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행여나 사영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불쾌함을 느낄까 봐 말을 고르는 것 같았지만 사영은 실제로 그들이 대놓고 자신을 감시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니, 그만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오히려 문제였다.

의심이든 무엇이든 김유준이 자신의 행보를 궁금해한다는 건 적어도 아직 사영의 부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일 터. 계획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영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낙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영은 그날 유준이 병실에서 나서기 전 제게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만약 제가 거절하면… 그래도 사영 씨는 한재우에게 복수할 겁니까?’

사영은 이제 슬슬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김유준을 이 복수극에 가담시킨 건 그것이 가장 성공 가능성이 크면서도, 한재우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유준이 말했던 대로 사영은 직접 한재우를 유혹하여 자신에게 반하게 하거나, 아니면 유준의 진심을 얻어 내 재우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준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이 두 방법은 사영이 생각할 때 너무나도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

유준에게 말한 바와 같이 온 생을 다 바치고도 얻는 데에 실패한 사람의 마음을 이제 와 어떻게 얻을 것이고, 이런 꼴로 유준의 마음은 또 어떻게 사로잡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거듭 생각해도 유준에게 모든 걸 다 밝히며 접근한 게 분명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만약 김유준이 이대로 사영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영의 말을 단순히 미친 소리로 치부하거나, 설령 믿어 준다 하더라도 이런 흙탕물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고 한다면 과연 차선책은 무엇일까.

복수를 진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복수를 포기한다면 또 어떻게 마음을 버려야 할까.

안개가 차오르듯 막막해지는 머릿속을 내버려 둔 채 사영은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물이 담긴 컵과 그 옆에 놓인 흰색 알약 두 알을 손에 쥐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안정시키고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게 조절해 주는 약이었다. 죽기 전에도 지겹게 먹어 왔던 약이다.

재우와 결혼 후, 더 이상 이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사영은 평소 굳이 억제제 같은 걸 먹지 않아도 될 만큼 페로몬 컨트롤이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재우는 결혼 전 아이를 낳는 일에 꽤 적극적이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약은 필요 없게 될 거라 여겼다.

딱히 아이를 서둘러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재우가 그러길 원한다면 빨리 아이를 낳는 것도 좋았다. 재우와 자신, 그리고 둘을 꼭 닮은 아이가 함께하는 평범하고도 행복한 일상을 사영은 결혼 전부터 머릿속에 그려 왔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뒤 재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영이 임신하는 것을 꺼렸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재우는 사영과 결혼한 후 여태 받지 못했던 주목을 받으며 빠르게 커리어를 쌓아 가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육아라는 짐을 얹고 싶진 않을 터였다.

그때까지도 사영은 굳이 억제제를 먹진 않았다. 피임만 제대로 한다면 히트와 러트를 보내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약을 먹기 시작한 건 사영을 향한 재우의 멸시가 슬슬 심해지고 있을 즈음, 스트레스로 인해 사영에게 불시에 히트가 찾아왔던 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와, 윤사영… 이제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천박하게 굴어서 나를 어떻게 해 보시겠다?’

그가 올 때까지 거실에서 불도 켜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사영을 발견한 재우가 처음으로 내뱉은 그 말은 여전히 사영의 심장 한구석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재우의 향에 반응해 다리 사이를 적시는 스스로가 그의 말대로 얼마나 ‘천박’하게 느껴졌던가.

그 이후로 사영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집착적으로 약을 챙겨 먹으며 히트를 억제해 왔다.

사영은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들이 자신을 휩쓸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며 두 알의 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여전히 사영은 자신의 페로몬을 잘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순간에 괜한 변수로 일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물과 함께 알약을 목으로 넘기며 사영은 불시에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유준이 자신을 돕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 조용히 산책이라도 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한결 도움이 될 텐데. 사영은 아직 혼자 걷기에는 불편한 다리를 아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떠한 예감처럼 사영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을 듣고 나서도 유준은 들어가지 않고 잠시 그대로 서서 심호흡했다.

자신은 분명히 이 우스운 놀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데 이상하게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디디면 늪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몇 없는 위기의 상황에나 느껴 보았던 본능적인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유준은 이 경고에 반하는 선택을 할 생각이 없는데도 왜 이렇게 전신의 감각들이 요란하게 날뛰는지 모를 일이다.

유준이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에도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차라리 사영이 유준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어떤 노력이라도 더 하였으면 그 반동으로 가뿐하게 몸을 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영은 여전히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유준은 마지막으로 숨을 훅, 하고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무엇이 자신에게 이득인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을 두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준은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며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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