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5화 (15/193)

#015

연기하는 사영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유준은 과거 사영의 연기를 꽤 인상 깊게 보기도 했다.

지금 틀어 놓은 데뷔작은 작품 자체가 유준의 취향이 아니라 계속 챙겨 보진 않았지만 그때도 정말로 마음을 울리는 연기를 한다고 느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마 사영이 그대로 연기 생활을 이어 갔다면 한 번쯤은 작품에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후 사영이 요란하고도 급작스럽게 한재우와의 연애와 결혼을 하면서 은퇴를 해 버렸고, 실력만큼 연기에 애정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인가 싶어 유준도 금방 사영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 이후로는 이미 알다시피, 한재우를 향한 반감 때문에 덩달아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고 말이다.

“다른 사람 같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상념을 치워 내며, 유준이 중얼거렸다. 화면 속의 사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웃는 그 남자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여름 햇살처럼 싱그러웠다.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존재 자체가 봄볕처럼 따뜻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런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어서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질, 윤사영이라는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 아주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빛깔 같은 그런 느낌. 유준이 말하는 건 바로 그런 종류를 칭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준이 다시 만난 사영은 겨울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의 감각을 일깨우는 존재였다.

“하필이면 역할도 저런 걸….”

메마른 나뭇가지 같던 사영의 몸을 불현듯 떠올린 유준은 결국 TV를 꺼 버렸다. 자존심도 무엇도 다 내버리고 타인에게 매달리는 그의 대사 하나하나가 유달리 신경에 거슬렸다.

거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지만 유준은 그 무거운 공기 가운데에서 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뭐든지… 하라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그것은 조금 전 드라마 속 대사와 비슷하되 같진 않은 그런 말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유준은 직접 들은 적이 없는 타인의 삶이었다. 실제와도 같은 상상이고 윤사영으로부터 불어오는 과거의 파편이었다.

‘제발… 제발 재우 씨….’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고, 끝끝내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배신한 한재우의 앞에서 사영은 그렇게 빌었을까. 드라마 속 캐릭터가 그랬듯이 비참함을 홀로 견뎌 내며 매달리고 애원했을까.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요….’

정말로 한재우를 그렇게까지 사랑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유준은 금세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과는 하나 상관없는 이의 과거를 굳이 왜 혼자 상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애초에 이제 와 사영의 과거 드라마를 보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의 터무니없는 계획에 잠시 동조해 준다고 해서 그의 불행까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었다.

유준은 주방으로 와 찬물을 한 잔 마시고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거실을 문득 돌아보았다. 윤사영을 잠시 떠올렸던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 겨울이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유준은 여름 햇살 같던 그가 겨울의 마른 나무처럼 변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은은하게 거실을 밝히던 조명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에 잠겨 든 공간이 일순 추워 보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

사영은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를 펼치고 있던 책을 덮어 버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걸 보니 감정이란 참으로 질기구나 싶었다. 그만한 일을 겪어도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어지럽히니 말이다.

손가락 끝으로 의미 없이 표지를 더듬어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하기만 했다.

그 밝은 불빛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우주의 별들을 가늠하며 사영은 책을 읽기 위해 세워 두었던 침대 등받이를 낮추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속는 셈 치고 당신의 유치한 장단에 한번 맞춰 보죠.’

창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고요한 방 안에 유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사영은 울고 싶은지 웃고 싶은지 모를 애매한 감정을 느끼며 무의미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월하진 않아도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영은 여전히 제 두 다리가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한 걸음….”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는 사람처럼 사영이 조용히 읊조렸다. 말 그대로 이제 한 걸음, 사영은 자신이 계획했던 ‘새 삶’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멀어지길 반복했다. 기대감, 통쾌함, 두려움, 설렘.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영은 유준이 이렇게 순순히 제 이야기를 들어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게 어디 보통 미친 소리냔 말이다. 입장 바꿔 자신이 유준이었다면 사영은 두 번 다시 이런 미친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영은 여전히 유준이 어째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 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은 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시 살아난 것도 모자라 시간을 거슬러 온 것도, 이다지도 쉽게 유준을 끌어들인 것도 전부 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현실이 아니고, 자신은 여전히 그 아스팔트 위에 피를 쏟은 채로 누워 있으며, 그래서 죽기 전 마지막 환상을 보는 중일 수도 있었다.

사영은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겨울의 길 위에서 죽어 가는 몸을 느끼려고 애썼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환상이라면.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 보는 마지막 백일몽 같은 거라면. 그러면 더 헛된 미래를 보기 전 깨고 싶었다.

으레 모든 꿈에서 그러하듯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직전에, 짝사랑하는 상대와 입을 맞추기 직전에 깨어나 버리는 그러한 경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깰 꿈이라면 차라리 지금 깨어나길. 복수의 달콤한 과실을 따 먹기 직전이 아니라 여기에서 멈추길 사영은 간절히 바랐다.

“…….”

하지만 사영의 몸은 식어 가지 않았다. 눈을 떠도 높은 천장은 그대로였고, 창밖은 여전히 화려했으며, 사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밤의 거짓된 평온을 실감하며 사영은 아주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너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이! 너무 비참하다고, 씨발! 알아?!’

사영은 재우에게서 들었던 그 어떤 폭언보다 그 말이 가장 아팠다.

가장 비참한 말은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왔던 것이지만 사영을 가장 아프게 한 말은 그 무엇보다 너의 존재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그 말이었다.

사영은 재우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사영이 생각할 때 그는 단지 운이 조금 없었을 뿐 너무나도 좋은 배우였고, 그런 그에게 자신이 꼭 필요했던 한 줌의 행운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기도 한재우를 위해 기꺼이 뒤로 미루었다. 능력이 출중한 배우가 윤사영의 연인, 윤사영의 남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슬퍼하는 게 미안해서였다.

그가 윤사영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때까지 사영은 기꺼이 대중으로부터 숨어 있는 쪽을 선택했다.

좋은 작품을 만나 빛나는 한재우를 볼 때마다. 그렇게 서서히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인정받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기뻤다. 사영 또한 연기를 하고 싶었고, 실재하지 않는 캐릭터를 제 손끝으로 세상에 피워 내는 감각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러면 자신 역시 한재우의 곁에서 당당히 배우로 함께 설 수 있을 테니까. 그때는 재우 역시 서러움을 벗어날 테고 그러면 정말로 배우로서, 반려로서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사영은 오로지 그날들을 기다리며 묵묵히 뒤에서 한재우의 모든 것을 도왔다.

그랬는데. 사영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재우를 지키고 싶었는데.

‘내가 너를 이용한다는 말도, 네가 나한테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말도 이제 지긋지긋해. 이 기분을 알기나 해?’

정작 한재우는 그 모든 것들이 끔찍하다고 했다. 너의 존재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너 때문에 나는 인정받지 못하고, 조롱받으며,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고.

그래서 내 인생에 네가 있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사영은 알았어야 했다. 얼마나 뻔뻔하고, 졸렬하며, 염치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 사영은 고립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교묘하게 진행되어 왔던 한재우의 감정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그 어떤 말과 행동 앞에서도 당당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사영은 재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를 상처 주는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그럼에도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죄책감을 느꼈다.

한재우는 그렇게 조금씩 둘 사이에서 사영을 가해자로 만들었다.

끝끝내 그 대가로 사영이 얻은 것은 차가운 도로 위에서 맞이한 죽음이었으니.

이 모든 추잡한 복수극은 전부 괜찮을 것이다. 사영은 자신에게 그 정도의 복수를 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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