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그가 처음 화면에 잡히고, 첫 대사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제는 다 잘라 냈다고 생각했던 연기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듯 밀려왔다.
어떠한 근거도 없이 저 역할은 원래 내 것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강렬한 감각과 비례하여 끔찍한 상실감이 터져 나왔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한재우를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서단우라는 캐릭터는 단 한 순간에 사영이 애써 쌓아 놓았던 둑을 무너트리고, 그 앞에 세워 놓은 환상을 무너지게 했다.
연기를 하고 싶었다. 글자로 태어난 존재에게 생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없는 사람을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싶었다.
그날 사영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울음을 아주 오래오래 쏟아 냈다.
한재우는 그 작품을 찍으며 걷잡을 수 없이 김유준이라는 존재에게 빠져들었고, 사영은 몸과 마음이 전부 급속도로 말라 갔으며, 그때에 사라진 영혼의 조각들은 죽는 날까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영은 새로운 삶에 스스럼없이 서단우를 택했다. 그 이름 아래서 사영은 지난 생과 달리 한재우가 아닌 연기를 손에 쥘 거고, 바로 거기에서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
“서단우 역할을… 윤사영 씨가 하겠다는 겁니까?”
사영의 대답을 듣고도 유준은 다시 물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일이라 그랬다. 사영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되물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유준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영의 말은 이런 반응이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얼토당토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네. 제가 그 역을 할 거예요.”
사영이 대답했다. 유준의 반응에 당황하지도, 기분이 나빠지지도 않은 태도였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유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 역, 오디션으로 뽑는다는 건 알고 있어요?”
“네.”
“뭐, 나 모르는 빽이라도 있는 겁니까?”
막힘없이 대답하던 사영이 말을 멈췄다. 그제야 유준은 자신이 지나치게 삐딱한 태도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는 걸 깨달았다. 유준의 말은 다시 말해 뒷배 같은 것도 없이 네가 어떻게 그 역을 따내겠다는 소리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준은 굳이 그 말을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제 말엔 어디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다.
사과를 기다렸던 건지 무언지, 가만히 유준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사영이 유준의 침묵을 받아들이고 곧 대답했다.
“아니요. 집에서 저 자신을 가둬 두고 살다시피 한 저한테 무슨 인맥이 있겠어요.”
“그럼 무슨 수로 그 역을 맡겠다는 겁니까?”
“유준 씨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내가?”
“네.”
얕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영의 입가에는 아주 미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어 보던 유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탄성을 흘리듯 유준이 말을 꺼냈다.
“오디션…?”
“…….”
“오디션을 보겠다고?”
“안 되나요?”
“오디션을 봐서… 배역을 따내겠다는 거죠, 지금?”
“네.”
이렇게 여러 번 되묻는 것이 대놓고 그의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멀어져 있더니 감이 떨어진 걸까. 아니면 애초에 오만한 성격이었던 건가.
<하지>는 비밀리에 아주 공을 들여 유준을 캐스팅했을 정도로 힘을 주어 제작하는 대작이었다.
감독과 작가 둘 다 내로라하는 경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고 굳이 유준의 캐스팅 사실을 떠들지 않아도 서단우 배역을 맡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수년 동안 연기에서 손을 놓고 있던 사람이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그 역을 따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다니.
그게 꼭 작품뿐만이 아니라 연기 자체를 얕잡아 보는 것만 같아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유준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긴커녕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겠습니까?”
“…….”
“경쟁률이 만만찮을 텐데요.”
조금 더 솔직히 말해서 유준은 지금 자신이 드러낸 이 불쾌감을 사영이 알아채 주길 바랐다.
단순히 이 작품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영은 지금 수많은 배우들이 안간힘을 써 버텨 내고 있는 이 길을, 연기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고. 유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면 이 정도 배역은 얼마든지 따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사랑 따위를 위해 한순간에 연기를 버린 사람이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차갑게 식어 가는 유준의 눈동자에 한 떨기 꽃잎처럼 가련하고도 청초한 사영의 얼굴이 어렸다. 유준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
“그 얼굴 믿고 자신만만한 모양인데 글쎄요… 그렇게 만만하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계속되는 유준의 도발에도 사영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제게로 쏟아지는 말들을 듣고만 있었다. 하물며 그 표정은 상처조차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를 비웃으며 한편으로는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유준으로서는 맥 빠지는 반응이었다.
유약해 보이는 표정 너머에서 정말로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 유준을 잠 못 이루게 하여 결국엔 아침 일찍 병원으로 달려오게 했던 답답함이, 짜증이, 무어라 명확한 단어로 명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감정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유준이 말이 멈추고 나서야 사영은 입을 열었다.
“알아요. 만만하다고 생각해서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에요.”
유준이 보았던 작품 속 윤사영은. 그러니까 연기를 하고 있던 화면 속 윤사영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야말로 햇살로 살결을 빚어 놓은 사람처럼 말이다.
한겨울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지금의 윤사영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꼭 해내야만 하니까요. 꼭… 그 역을 연기하고 싶으니까.”
“…….”
“그래서 도전하려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유준은 묻고 싶었다. 다시 연기를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꼭 그 역할을 따내겠다고 이렇게 다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단순히 한재우를 향한 복수가 전부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연기가 당신에게는, 고작해야 복수를 위한 수단일 뿐이냐고.
“윤사영 씨의 복수를 돕겠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복수가 내 작품에 흠집을 내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준은 묻고 싶은 말 대신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그의 복수는 그의 삶에나 중요한 것이지 유준에게는 단순한 흥미 이상의 그 무엇도 되지 못했다.
“당신과 한재우 사이의 치정 따위는 내가 선택한 작품이 가진 가치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하니까. 알겠습니까?”
유준은 말을 씹어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네.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죄송합니다.”
“진심은 하나도 없는 사과도 그만하고.”
하나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잘도 죄송하다는 말을 흘리는 사영을 쏘아붙이며 유준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사영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게 잘한 일일까. 사실은 제 손으로 제 작품을 망칠 씨앗을 심고 있는 건 아닐까.
한재우가 끼어든 것도 못마땅한 판국에 정말로 윤사영까지 덜컥 합류하게 된다면 작품 외적인 일로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초조함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중 가장 유준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원인은 그렇게 불안한데도 이 자리에서 사영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었다.
***
“정말 오디션 열 거래?”
광고 촬영 사이 휴식 시간, 재우는 며칠 전 매니저인 은성에게 알아보라 일러 놓았던 것을 물었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커피를 재우의 손에 들려 주며 은성이 대답했다.
“네. 대표님이 넌지시 추천 이야기도 꺼내 봤는데 감독님이랑 작가님 둘 다 단호하게 거절하시더래요.”
“귀찮게 굳이 왜 그런 짓을….”
은성의 대답에 재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정말로 자신에게 답을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은성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우는 매니저에게 그간 열심히 공을 들여 마침내 계약을 확정한 영화 <하지>의 주요 캐릭터인 ‘서단우’ 캐스팅을 정말로 오디션을 통해 진행할 계획인지를 알아 오라고 했었다.
재우는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앞의 스툴에 발을 올리고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 영화에 가장 중요한 세 캐릭터 중 두 명의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김유준과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될 이번 작품에는 한재우 역시 거는 기대가 남달랐으므로 남은 캐스팅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서단우는 일견 유약해 보이는 외형과 분위기를 가져야 했지만 동시에 김유준과 한재우라는 존재감 넘치는 두 배우 사이에서 묻히지 않고 빛나야 했다.
연기를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고 두 남자가 어째서 서단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리는지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역이기도 했다.
아무나 맡아서는 절대로 안 됐다.
“은성아.”
“네.”
“하나만 더 알아 봐라.”
“네, 말씀하세요.”
재우의 기다란 손가락이 커피가 담긴 잔의 표면을 톡, 톡 두드렸다.
오디션이라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홍보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고, 이미 잔뜩 힘을 준 두 배역 사이에 적절히 신선한 맛을 첨가할 수도 있으니 나쁘진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디션이라면 인맥이 끼어들더라도 어느 정도는 연기를 보고 거를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름망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디션 때 나도 현장에 가겠다고 말해 봐.”
“직접 보시게요?”
“응. 그러는 편이 홍보에도 더 좋을 테니까 말리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은성의 대답을 들으며 재우는 들고 있던 잔을 놓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 때문에 다소 피곤했어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올 만큼 기분은 좋았다.
아무리 서단우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국 이번 작품은 김유준과 자신의 무대가 될 게 분명했다. 재우로서는 누가 캐스팅된다고 해도 크게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5분 후 촬영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재우는 촬영 스태프의 안내를 들으며 이리저리 목을 돌렸다. 어서 빨리 촬영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