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20화 (20/193)

#020

놀랍게도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죽음과 함께 그에 대한 감정들은 전부 다 피로 물든 아스팔트에 놓아두고 왔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여기에 윤사영은 살아 있어서.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놓은 검은 말들이 살아 있는 사영의 심장을 쿡, 하고 찔러 왔다.

한재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나 아픈 것이 아니다. 다만 사영은 자신이 남겨 두고 온 윤사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저 모든 말들을 묵묵히 감당한 채 죽어 버린 가련하고도 멍청한 사람을 말이다.

한재우가 전부였던 그때, 그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이전 생에서 사영은 자신의 평판이 얼마만큼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별거 아닌 사람이 되어 갈수록, 못난 사람이 될수록 재우의 마음이 더 편안해질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면 어느 날부터 자신에게 날카로워졌던 그의 마음도 차차 풀릴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사영은 제 이름이 더러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해명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사영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낮춰야 하는 그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영은 제가 잃었던 모든 것들을 되찾아 와야만 했다.

부나 명예 같은 것들이 탐나서가 아니라 그래야 한재우의 잘난 얼굴에 보기 좋게 엿을 날려 줄 수 있을 테니까. 사영은 그 순간을 노릴 뿐이었다.

하물며 그 발판이 될 작품이 한재우가 유준과 함께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을 영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지금은 온갖 악플로 가득한 댓글란이 사영을 향한 호의로 가득 차게 된다면 한재우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토록 오랫동안 공들여 왔던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결 마음이 가라앉은 사영은 손가락 끝으로 연신 기사들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사진도 같이 제공해 줄 걸 그랬나….”

“네?”

갈아입을 환자복을 준비해 오던 간병인이 사영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되물었다. 사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가,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얼굴로 간병인을 향해 말했다.

“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지금과 180도로 달라진다면 어떨까. 그렇게 만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때가 되면 과연 한재우는, 어떤 얼굴을 할까.

신기하게도 심장이 뛰었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복수는 의외로 즐거울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

“그게 정말이야?”

유준이 되물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정민이 곧바로 대답했다.

- 네. 간병인 말로는 당장 내일이라도 퇴원했으면 한다던데요.

“…그래. 일단 내일 퇴원 수속 밟는 걸로 해.”

- 네, 형. 아, 그리고….

필요한 답을 들은 뒤에도 정민은 무언가 망설이며 말을 늘였다. 유준은 듣지 않아도 정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대표님하고도 이미 다 얘기해 놨으니까.”

- 아….

“막말로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눈치 보면서 숨길 필요가 뭐 있어?”

-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굳이 엮여서 좋을 건 없잖아요.

염려가 가득한 정민의 말에 유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민의 반응을 마주하자 새삼 사영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실감이 된 탓이다.

말 그대로 이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가 일반인이었어도 훈훈한 일화로 포장할 수 있었고, 연예인이라면 더더욱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상대 연예인이 오메가라면 쓸데없는 스캔들로 이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그 또한 크게 대수롭진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단지 그가 윤사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금 전 통화를 마친 회사 대표는 물론이고 정민까지도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때 앞에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았을 정도로 사랑받던 사람의 이름이 이렇게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존재하였을 무수한 날을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유준이 말했다.

“아무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 네…. 그럼 쉬세요.

여전히 어딘가 편치 않은 목소리의 정민과의 통화를 마치고 유준은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어제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줄곧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유준은 모처럼 맞이한 짧은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도, TV를 보아도, 다른 그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한 가지 생각을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닌 척을 하려고 해도, 외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준의 머릿속은 온통 윤사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좋은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가 보고 싶다거나 하는 종류의 마음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유준은 궁금했다. 그가 과연 오디션에서 중요한 배역을 따낼 수 있을 만큼의 연기력을 가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서단우 역할을 따내겠다고 말했던 자신감 이면에 정말로 근거가 존재하는지 궁금했고, 직접 두 눈으로 어서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 천장을 응시하던 유준이 곧 옆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쥐고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화면을 띄웠다.

결코 함께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김유준과 윤사영의 이름이 온갖 곳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 정도로 난리가 났으니 분명 한재우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 인간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두었던 적이 없는 유준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얼굴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윤사영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냈다던 한재우는 과연 사영이 유준을 구했다는 기사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정말 사영이 영화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러면 과연 한재우는 어떻게 반응할까.

윤사영으로부터 비롯된 많은 궁금증이 자꾸만 유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준은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유준은 마치 사영의 말들이 전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영이 이미 죽음을 한 번 겪었던 사람이고, 시간을 거슬러 되살아난 사람이며, 그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과거에 한재우에게 온갖 종류의 폭력을 아주 오랫동안 당해 왔던 사람이라는 말을. 사영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그 모든 말들을.

유준은 어느새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사실인 양 받아들인 채로 한재우를 보고 있었다.

“미친 소리를 자꾸 듣다 보니 같이 미쳐 가나….”

유준은 의식적으로 그 생각들을 우습게 만들려 애써 말을 읊조렸다.

마치 자신은 여전히 사영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다는 듯이. 단지 그 꼴이 우습고 재밌어서 흥미로 어울려 줄 뿐이라는 듯이.

문을 열어 놓은 곳도 없는데 문득 코끝에서 겨울의 향기가 스쳤다. 올겨울은 유달리 추운 모양이라고, 유준은 그 겨울 내음을 다만 계절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그래서… 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높아진 재우의 목소리에 매니저 은성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은성은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베테랑이라고 불릴 만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웬만한 연예인의 성질은 무던히 받아낼 만큼 내공이 쌓였지만 그런 은성에게도 이상하게 한재우는 유독 어려운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딱히 성격이 괴팍하거나 매니저를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일하는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이따금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는 과하게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그건 다른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한재우와 함께 일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대하는 데 미묘한 불편함과 껄끄러움이 남아 있는 이유를 은성은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한 사람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끝끝내 나락으로 떨어트렸는지를 너무 가까운 곳에서 봤기 때문일까, 하는 짐작을 이따금 해 보곤 했지만 그건 단지 짐작일 뿐.

은성은 굳이 그 생각에 깊은 의미를 두진 않으려 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습관적으로 눈치를 보며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대충 문지른 은성이 대답했다.

“네. 그 이후에도 윤… 사영 씨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 몇 번 병문안을 왔었다고….”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은성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지금 자신이 보고하는 일에 관련된 두 사람 모두가 얼마나 재우에게 신경 쓰이는 존재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이 두 사람이 엮여서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지. 은성이 속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사이 재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말이 안 되는데….”

말 그대로였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김유준과 윤사영.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절대로 나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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