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21화 (21/193)

#021

얼마 전 유준에게 사고가 날 뻔했으나 우연히 지나가던 시민이 그를 구하고 대신 다친 사건이 있었던 건 재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재우는 유준이 무사한 것이 다행스러워 내심 그를 구했다던 이에게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윤사영이라니. 김유준의 은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윤사영, 그 사람이라니.

“정말 확실해?”

재우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기사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충격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은성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리면서도 동명이인일 거라고,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네, 여러 번 확인했는데… 윤사영 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성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재우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세상에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막상 제 앞에 닥치자 단순한 우연이라 쉽게 치부하기가 어려웠다. 연신 재우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은성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놀라긴 했는데… 그래도 우연이지 않을까요? 우연이 아니면 사영 씨가 굳이… 그럴 이유가….”

“그건 그렇긴 한데….”

재우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으로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기사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은성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재우는 분명 김유준에게 정상적인 범위 이상의 사적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지금까지는 사영에게 그다지 티를 내지 않았다.

조심했다기보다는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만 큰 어려움 없이 사영을 제 인생에서 떨쳐 낼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영은 질긴 사람이었다. 일정 부분은 한재우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그는 제게 의존하는 면이 과했고, 적당히 마음이 식은 척하는 것으로는 도려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재우는 제 민낯을 어디까지 보이며 그 마음을 갈가리 찢어야 그가 제 인생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는 와중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영이 먼저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꽤 있기는 했다. 당시에는 드디어 그가 제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고 홀가분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흔쾌히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날까지만 해도 짜증스럽게 질척이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돌변하다니. 의심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설마 알고 있었나? 자신이 김유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가장 비참한 방식의 이혼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눈치채기라도 했던 건가?

순간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따라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아니. 아니야. 그럴 주변머리나 되면 내가….”

하지만 재우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짐작은 사영에게 과분한 의심이다. 말마따나 그가 그만큼 약은 사람이기라도 했다면 재우가 그를 볼 때마다 그토록 답답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간 제가 아무리 매몰차게 굴고, 모진 말을 내뱉어도 당신을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사영의 말간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에 비친 한재우의 모습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악랄하며, 졸렬하고, 치졸한 사람이었다. 재우는 자신을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윤사영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지긋지긋하다, 진짜. 안 그러냐, 은성아?”

기사 댓글에 달린 사영을 향한 수많은 악의를 무심한 시선으로 읽어 내리며 재우가 물었다. 은성은 차마 한숨도 내쉬지 못하고 그저 ‘네….’ 하고 신음하듯 대답을 할 뿐이었다.

윤사영 먼 한재우 꼬셔서 그렇게 사람 멘탈 조지더니 이혼하자마자 김유준?ㅋ 의도가 뻔히 보이네 야 한때 국민어쩌구 소리듣던 윤사영이 어쩌다 저렇게 됏냐 한재우꼴 안나게 김유준도 조심해야할덧

액정을 쓸어 올리던 재우의 손가락 끝이 한 댓글 위에서 멈췄다. 그 몇 줄의 글자들 안에는 재우가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은밀하게 심어 온 윤사영에 대한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응? 다시는 재우 씨 허락 없이 인터뷰 같은 거 안 할게요. 절대 안 할게요.’

재우가 말없이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졸이며 애처롭게 몸을 붙여 오던 사영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에 순간 신경이 날카로워지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 봐도 사영이 일부러 김유준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제발 이제 그만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라. 제발.”

재우는 짜증을 내듯 소박한 바람을 중얼거리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유준은 자신을 구해 준 이가 사영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여태 조용했던 걸 보면 그 역시 사영과 얽힌 게 내키지 않았던 게 분명할 터.

퇴원을 하게 되면 그 후로 두 사람이 다시 엮이는 일은 없을 테니 재우는 이번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윤사영이라는 이름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되기를 바랐다.

***

퇴원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정리하던 사영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는 간호사거나 간병인일 줄 알고 자연스럽게 들어오시라고 말을 했던 건데 지금 사영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김유준 씨…?”

사영은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유준은 가만히 선 채로 그 얼굴을 잠시 만끽했다. 자신이 보아 온 윤사영치고는 제법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제 다녀갔던 사람을 오늘 또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마 조금은 사람 같은 모습에 유준은 미미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영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표정을 정리했다.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짧게 다신 유준이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아… 오실 줄 몰랐어요.”

지극히 당연한 사영의 대답에 유준은 어깨를 살짝 으쓱하곤 사영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솔직히 유준은 나도 그쪽이 이렇게 갑자기 퇴원할지는 몰랐다고 쏘아 주고 싶었다. 그럴 계획이었으면 어제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오지랖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계약 관계라면. 적어도 앞으로 꽤 친밀한 관계를 연기해야 하는 사이라면 서로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공유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었을 뿐.

하지만 유준은 행여나 그 질문이 사영을 향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비칠까 싶어 내뱉지 않고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어제 기사 봤죠?”

“…네.”

“뭐, 할 말 없어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니 괜히 또 속이 뒤집혔다. 자신은 그 때문에 대표에게 한 소리 듣기까지 했는데 그런 건 알지도 못하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소 생색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유준으로서는 드문 감정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번 사건 자체는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유준의 이미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유준이 잔소리를 들은 건 상대가 ‘윤사영’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대표의 입장에서는 윤사영이 훈훈한 일화로도 써먹지 못할 정도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잠시 시선을 내려 생각에 잠겼던 사영이 곧 대답했다.

“곤란하셨겠어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죄송해요. 그런데….”

그놈의 죄송하다 소리가 나올 건 이미 예상했다. 그는 언제나 같은 방식의 사과로 유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사영은 단순히 사과로 끝내지 않고 뒷말을 덧붙였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유준이 주먹을 살짝 쥐었을 때, 사영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

“저랑 엮인 이상… 유준 씨도 안 좋은 말을 피해 가긴 어려울 테니까요.”

그 순간, 어제 기사가 뜬 후 온종일 유준이 직접 보았던 수많은 악의가 떠올랐다.

마치 사영의 결혼 생활을 전부 본 것처럼, 그가 무슨 생각으로 한재우를 만났고, 결혼했으며, 이혼했고, 그리고 어떤 의도로 김유준에게까지 접근한 건지 전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특정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이 제멋대로 사영을 재단해 각자 죄명을 붙이고 있었다.

유준은 말을 마친 사영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덧붙일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유준은 어렵지 않게 그가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후회하느냐고.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건 아니냐고. 이렇게까지 상황이 바닥인 줄은 몰랐으니 아무래도 엮이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선 건 아니냐고. 사영은 아마 그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내가 경고했죠.”

하지만 정작 입을 연 유준은 다른 말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좆같이 담담한 척 굴지 말라니까?”

기본적인 예의도 잘라 버린 말끝이 날카롭게 사영을 찔렀다. 유준은 어느새 사영의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짧은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버티지 않고 시선을 떨군 건 사영이었다.

“죄송해요.”

이번에도 즉각적으로 사과부터 흘러나왔다. 여전히 그는 하나도 죄송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모르겠어요, 저는… 저는 사실 하나도 담담하지 않은데.”

“…….”

“저는 정말 간절한데.”

제 말이 왜, 그렇게 들리는 걸까요.

마지막 물음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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