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유준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닌데 머리로 제어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속으로 적잖이 당황한 나머지 유준의 입이 제멋대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뭐, 말을 하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혹시 당신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거나 어디 병원에라도 잡혀 가면 나도 곤란하니까요.”
“…….”
“기껏… 동정심으로 내키지도 않는 일에 발을 담갔는데….”
그만. 제발 그만 말해.
유준은 드물게 속으로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를 말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죽 당황했으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다 흐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용히 유준의 말을 듣던 사영은 이내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린 채 대답했다.
“아니요. 그걸 아는 사람은… 유준 씨 말고는 없어요.”
“…….”
“제 복수에 꼭 필요한 사람은 유준 씨니까, 그래서 말한 거예요.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사영의 음성은 상처받지도, 유준을 탓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진 유준은 사영의 말을 곱씹을 수 있었다.
제 복수에 꼭 필요한 사람은 유준 씨니까.
그 문장의 울림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생각할 때쯤, 사영의 집이 나타났다.
***
“혼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집 앞에 차를 댄 유준은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필요한 말만 내뱉었다.
유준 씨 말고는 없어요.
그런 문장들이 연신 머릿속에서 특별한 의미라도 되는 양 돌아다니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영 역시 유준에게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반응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영은 늘 유준에게 무심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감안하면 모순적인 태도였다.
“네,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태워 주셔서 고마워요.”
사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곤 뒷좌석을 슬쩍 쳐다보았다. 목발을 둔 곳이었다. 사영은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 발로 움직여서 뒷문을 열고 목발을 꺼낼 생각인 것 같았다.
유준은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사영의 불안한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가느다란 몸뚱이가 비척거리며 내리는 게 짜증스러웠다. 유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영에게서 시선을 떼 앞을 보며 괜히 입술을 씹었다.
사영은 등 뒤에서 유준이 어떤 감정의 변화를 겪는지 알지 못한 채로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목발을 꺼내기 위해 뒷좌석으로 절뚝거리며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가만히 있어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내린 건지 차 밖으로 나온 유준이 단숨에 걸어와 사영을 지나쳐서는 차 뒷문을 열고 안에서 목발을 꺼내 사영에게 내밀었다.
사영은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목발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유준은 그런 사영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은 부탁은 잘도 해 놓고 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일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사사건건 도움을 요청해 온다면 그 뻔뻔함을 욕하겠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때조차 내외하니 그도 딱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유준은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목발을 짚는 사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분히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나중에라도 회사 차원의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네?”
“오디션을 보고,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시끄러운 일들이 많아질 겁니다. 윤사영 씨가 영화에 참여하는 걸 한재우가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거고요.”
뜬금없는 유준의 말에 잠시 당황한 얼굴을 했던 사영은 한재우라는 이름을 듣고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영이 자신이 나오는 영화에 출연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는 사영을 떨어트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사영이 ‘서단우’ 역을 욕심내는 이유에는 그 작품과 캐릭터 자체에 가지고 있던 관심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으나, 그보다 더 우선적인 이유는 영화 <하지>의 감독과 작가가 그나마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연기를 올곧게 봐 줄 사람들이라 판단을 내린 데에 있었다.
한재우와 얽혀 있는 추잡한 뒷이야기들로 인한 편견을 가지고서 자신을 판단하지 않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의 감독은 그런 면에서 사영이 그나마 희망을 걸어 볼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사영의 짐작이고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영화의 중요한 배역을 맡았고, 든든한 대중의 호감을 등에 업고 있으며,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까지 한 재우가 크게 반대한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었다.
사영이 믿을 구석이라고는 자신의 연기력과, 적어도 사영이 배역을 맡는 걸 거부하진 않을 김유준의 방관이 전부였다. 초라하다는 말조차도 아까운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유준이 한 제안은 확실히 사영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사영은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유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옅은 색의 눈동자는 갑자기 먼저 이런 제안을 해 오는 유준의 의도를 짐작하려는 것 같았다.
유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이제는 사영 씨와 내 이름이 엮이게 됐잖아요.”
“…….”
“그쪽의 평판을 지키는 게 곧 내 이름을 지키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이 말입니다.”
유준은 핑계를 대듯 계속 말을 이었다. 절박한 건 윤사영이지 자신이 아닌데 이상하게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거슬렸다.
“뭐 내가 굳이 먼저 나서서 관여하진 않겠지만….”
그래서 유준은 자꾸만 곁가지를 댔다. 지금 신경이 곤두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윤사영 바로 당신이라고, 사실은 그렇게 졸렬한 말을 내뱉고 싶었다.
“정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나한테 부탁이라도 해 봐라 이겁니다.”
“…네. 고맙습니다.”
유준은 사영이 대답하기 전 찰나의 침묵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것이 고마움인지, 비참함인지, 아니면 경계심으로부터 비롯된 공백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사영이 몸을 돌렸다. 유준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고맙다는 대답이 정말로 내게 고마워서 나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방패처럼 뱉은 말은 아닌지 답을 듣고 싶었다. 어째서 별것도 아닌 순간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날 그 병실에서 무슨 헛소리를 하든 무시하고 지나쳤어야만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 여기에서 이해하지 못할 구차함을 가까스로 삼킬 일도 없었을 텐데.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 비슷한 감정들에 유준은 서둘러 몸을 돌려 차에 타려고 했다.
“유준 씨.”
그때, 불현듯 유준을 불러 세운 건 사영이었다. 그 작은 목소리 하나에도 유준은 못 박힌 듯 자리에 멈추어 섰고, 조금 전보다 다소 긴 침묵 끝에 사영이 말했다.
“드릴 건 커피 한 잔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 들어왔다 가실래요?”
“…….”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유준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여태껏 잘도 감추어 왔던 사영의 솔직한 속내를 이제야 마주한 것 같아 만족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잠시 쉬었다 가시라며 알파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오메가. 되도 않는 클리셰였다.
조금 여지를 주었다고 이렇게 금방 밑바닥을 드러내는 꼴이라니.
“…그러죠.”
유준은 대놓고 비웃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삼키며 대답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유준은 조금 더 철저히 사영의 민낯을 제대로 들추고 싶었다.
***
“편한 곳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준은 사영의 그 말이 아주 우습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유준의 눈앞에 보이는 공간에는 도무지 ‘편한 곳’으로 보이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유준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영의 집은 전혀 좁지 않았고 심지어 별다른 가구도 없어 답답하게 보일 지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집은 아무것도 없어 너무나도 황량해 보였다.
유준이 숨이 막히는 감각을 느낀 건 바로 그 ‘황량함’ 탓이었다.
사영이 커피를 내려오겠다며 주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유준은 꼭 무언가에 겁을 먹은 사람처럼 느릿느릿하게 거실로 향했다.
한 번도 누군가가 앉은 적이 없는 새것처럼 보이는 소파와 그 앞에 놓인 테이블을 빼곤 커다란 거실엔 있는 게 없었다.
단순히 가구가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영의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았다. 온기가 없었다. 사영이 유준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비어 있던 집을 자기 집이라 속이고 데리고 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온통 새하얗기만 한 차가운 집은 신기하게도 메마른 사막을 연상케 했다.
“커피는 차갑게 드릴까요?”
남의 집 거실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사람처럼 혼란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유준을 일깨운 건 주방에서 들리는 사영의 목소리였다.
유준은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를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그다음에는 다시금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집은 주인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네.”
유준은 자신의 경계심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짧게 대답하며 주방으로 가 식탁 앞에 앉았다. 차라리 냉장고나 식탁, 기타 기본적으로 필요한 가전제품들이 있는 주방 쪽이 거실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던 사영은 유준이 거실이 아닌 주방에 앉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향조차도 없던 공간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쪽 팔에 목발을 끼고서 잘도 움직이던 사영이 고저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집에 별로 있는 게 없어요.”
“…….”
“딱히 필요한 것도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사영에게서는 꼭 이 집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황폐함이 느껴졌다. 말라비틀어진 모래알의 서걱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