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아마 한재우도 오늘 기사를 보았을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유준이,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는 윤사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하면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재우에게 노출되는 게 앞으로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다.
한재우는 치밀하고, 집요하고, 영악한 사람이었다. 사영은 혹시라도 그가 벌써 자신을 경계해 무슨 수를 쓰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유준은 사영의 불안이 후,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릴 티끌 정도에 불과하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사 나면 안 됩니까?”
“혹시라도 한재우가 무슨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해서요.”
“지가 수작을 부리면 뭐 어쩔 건데.”
유준은 정말 별것도 아닌, 제아무리 발악을 해 봤자 손톱만큼도 제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지렁이 따위를 대하듯 말했다.
제까짓 게 뭔 짓을 하면, 그러면 뭐 어쩔 거냐고.
사영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유준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사영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사영에게 한재우는 너무나도 크고 단단한 세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가질 수 없고, 부술 수도 없었다. 절대적인 신이었다. 사영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사영은 유준의 세계에서 한재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았다.
유준에게 재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김유준에 비해 너무나도 하찮아서, 그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유준이 겁을 먹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미세하게, 세계의 전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영에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세계였던 한재우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너무나도 작고 미세한 행성이었다.
유준의 말이 맞았다. 업계에서의 위치든, 배우로서의 커리어든, 그 외의 어떤 영향력이든 김유준과 한재우 사이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그걸 깨달은 이 순간이 아주 비참하고도 짜릿해서.
사영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의 얼굴이 굳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영의 웃음은 분명 자조적이었다. 전혀 사랑스럽거나 해맑게 보일 만한 미소가 아니었고, 유준이 과거 사영의 작품 속에서 보았던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다. 늘 슬픔에 너무 깊이 잠식되어 오히려 무심함을 가장하는 듯한 얼굴만 보다 갑자기 마주친 미소는 그것이 비웃음인지 무언지 깊이 따져 볼 수 없을 만큼 유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 사람이 진심으로 웃는다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연기도, 자조도 아닌. 정말로 기쁘고 행복해 웃는 얼굴은 과연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준비 다 됐으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나와요.”
그래서 유준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다리가 불편한 사영이 바로 따라오기는 힘들 걸 알았지만 그건 유준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
유준은 앞에 앉은 사영을 관찰하듯 유심히 보았다. 사영은 이 자리가 무척 어색한 사람처럼 애매한 표정으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자세를 고쳐 앉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설마 윤사영쯤 되는 사람이 고급 레스토랑이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닐 텐데 이상했다.
“불편합니까?”
유준이 삐딱하게 물었다. 이 공간 자체가 어색한 게 아니라면 함께 있는 사람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간 사영을 대했던 태도를 떠올려 본다면 그가 불편해하는 걸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 꼴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이 정도도 뻔뻔하게 견뎌 내지 못할 거면 한재우 앞에서는 어떻게 버티겠다는 건지.
그때,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말을 고르던 사영이 대답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불편한 게 아니면?”
“누군가랑 함께 밖에서 식사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그게 조금 어색해서….”
이번에 할 말을 잃은 건 유준이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하든 날카롭게 쏘아 주려 벌어졌던 입이 그대로 멈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지만 다행인지 무언지, 사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느라 유준의 꼴을 보지 못했다.
재우는 사영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었다. 여자든 남자든, 알파든 오메가든, 심지어 베타일지라도 재우는 사영의 모든 친구와 지인들을 경계했다.
처음에는 질투인 줄 알았다. 실제로 아직 사이가 좋았던 시절의 재우는 자신이 질투가 많아 그런다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도 했다.
그것이 사실은 사영을 철저히 고립시키기 위한 계략일 뿐이었다는 걸 사영은 아주 늦게 알았고, 그때는 이미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된 후였다.
아마 사영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때라도 관계를 되돌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영의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사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사영이 뒤늦게라도 다시 손을 뻗었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히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였던 건, 그때에도 여전히 재우의 마음을 어떻게든 얻고 싶었던 사영은 그의 말을 거스르는 게 힘들었다.
희망은 늘 그런 식으로 사영에게 끈질기게 잔인했다. 차라리 한재우와의 관계에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사영도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사영의 침묵을 깨고 들어온 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유준의 목소리였다. 시선을 들자 황당한 얼굴을 한 유준이 보였다. 그 눈동자에는 사영을 한심하게 여기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그 눈동자를 보자 사영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당연한 걸 보지 못하고 홀로 늪으로 걸어 들어가기만 했던 자신의 지난날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고 우스웠다.
사영은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멍청하다거나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망가진 삶을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사영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타인이, 그것도 김유준처럼 잘난 사람이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사영의 유년 시절은 불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영의 어머니는 힘든 와중에도 사영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주기 위해 노력했고 사영은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며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왜 인생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한재우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사영은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삶이 전부 망가지는 순간까지도 마약을 갈구하는 중독자와 자신이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죽음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 사영은 한재우에게서 벗어나는 일 같은 건 머릿속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유준은 사영의 침묵을 집요하게 기다렸다. 사영은 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듣고자 한다는 걸 알았다. 사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지점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어요. 그와 내가 절대로 엇갈릴 수 없는 운명으로 만났다는 그런 확신이 존재했어요, 분명.”
유준은 감추지 않고 사영의 말을 비웃었다. 유준은 운명이니 무어니 하는 말들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사영은 유준의 비웃음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사실 기억나지 않게 된 지 한참 됐어요.”
“…….”
“어느 순간부터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한테 남은 게 그 사람밖에 없어서 더 절박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영은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의 손톱으로 왼쪽 손등을 긁었다. 죽기 전 가지고 있던 습관이었다.
견딜 수 없이 춥고 고독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울고 싶을 때마다 사영은 손등을 긁었고 그 위에는 숱한 생채기들이 문신처럼 덧그려졌었다.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했는데 그조차 얻지 못하면… 그러면 정말로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제가 견뎠던 모든 고통은 무가치한 게 되어 버리고 소중한 걸 놓아 버렸던 노력도 전부 무의미한 게 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한재우 하나라도 얻고 싶었나 봐요. 그게 모든 것을 포기한 보상이라고 믿으면서….”
멍하니 말을 이어 가던 사영은 또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것도 어쩌면 핑계인지도 몰라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정말로 그만큼 마지막까지 사랑했는지도 모르죠. 그냥 사랑에 빠진 한심한 쓰레기였던 거죠.”
“…….”
“사실은 사랑이 아니고, 한재우의 꼬임에 넘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말하면 덜 비참하고 덜 한심하니까 다른 이유를 덧붙이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모든 걸 한재우의 탓으로 돌리면 쉬웠다. 그러면 사영은 운 나쁘게, 정말로 나쁜 남자에게 걸려 버린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런가? 사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로 나는 불쌍한 피해자이기만 한가? 그냥 내가 멍청한 패배자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게 된 건 아닐까.
결국 내가 못나서. 모자라서. 소름 끼치고 답답해서. 한재우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못난 사람이라서 그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었던 건 아닐까.
문득 눈앞이 어지러웠다. 한재우가 제게 쏟아 냈던 화살 같은 말들이 이명처럼 귓가에 윙윙댔다. 종국에는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어깨를 움츠리는데 조여 오던 공간을 찢고 낯선 목소리 하나가 귀에 닿아 왔다.
“윤사영, 그만해!”
사영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울지도 않았는데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놀라 일그러진 유준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제 것이 아닌 양 멀어졌던 감각이 차례대로 돌아왔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시선을 내리자 유준이 제 오른쪽 손목을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왼쪽 손등의 피부가 까져 살갗에 피가 맺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