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29화 (29/193)

#029

“아… 아, 죄송해요….”

사영은 그제야 자신이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져들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까지 되고 나서도 재우가 했던 말들을 손에 쥐고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기억들은, 습관은, 세뇌로 이루어진 자학은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음을 사영은 경험하고 있었다.

사영은 유준에게 잡혀 있던 손을 어색하게 빼내고 두 손을 전부 테이블 아래로 감추며 말했다.

“괜히 제가 밥맛 떨어지게….”

유준은 허전해진 손을 거두며 입술을 깨물었다.

밥맛 떨어지게 굴어 죄송하다는 사영의 말은 타인의 앞에서 쓰기엔 너무나도 비일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었다.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뇌리에 박혀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들었던 거다, 저 말을. 누군가에게.

유준은 한숨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여기에서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간 사영이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걱정될 수준이었다.

이전의 비웃음은 분명히 사영을 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게 결코 아니었다.

테이블 위로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죄를 지어 유준을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자꾸만 한재우의 앞에서 죄를 청하며 몸을 웅크렸을 사영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기분은 더 엉망이 되었다.

그 순간, 다행스럽게도 종업원이 주문한 메뉴를 들고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유준은 그가 하는 음식에 관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장 말을 걸었다.

“혹시 상처 난 곳에 붙일 밴드 같은 걸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치셨나요?”

“네, 심한 건 아니라 밴드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바를 수 있는 연고가 있다면 더 좋겠고요.”

뜬금없는 요청에 사영이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허리를 살짝 굽히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고는 멀어졌다. 사영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다치셨어요?”

“…장난합니까?”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반응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사영의 질문이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그런데도 사영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급격히 피로가 밀려와 유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한 번 쓸어내리곤 말했다.

“윤사영 씨 손등이나 보고 말해요.”

“…….”

사영은 그제야 아래로 내리고 있던 제 손등을 확인하고는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유준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또다시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윤사영 씨 진짜로… 사람을 왜 이렇게 질리게 만들어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재우에게 내도록 온갖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던 사람이니 굳이 유준까지 말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도 지금 사영이 하는 꼴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도무지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뱉어 내지 않으면 당장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될 것만 같았다.

김유준의 인생에 윤사영 같은 사람은 없었다. 유준은 절대 저런 사람을 제 선 안에 들여놓지 않기 때문이다.

사영이 더 입을 열기 전에 유준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죄송하다고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요.”

“…….”

“어차피 하나도 안 죄송해 보이니까.”

사영은 정말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할 생각이었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양새까지 빠짐없이 거슬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사이 종업원이 다시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준에게 상처 난 곳에 바르는 연고와 밴드를 건네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라는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유준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대충 옆으로 치우며 사영에게 말했다.

“손 이리 줘요.”

“아,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죠.”

자꾸만 말이 날카롭게 나가는 건 유준 역시 일종의 쇼크 상태인 탓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사영이 눈에 초점을 잃고 덜덜 떨며 손등을 긁어 대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 터였다.

강압적인 유준의 어투에 사영은 그제야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사이 상처 위를 아무렇게나 문지른 건지 피가 옅게 번져 있었다.

물티슈라도 하나 더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다시 사람을 부를 만큼 유난스럽게 굴고 싶진 않아 참았다.

유준은 아직 쓰지 않은 냅킨에 물을 살짝 묻힌 후 손등 위에 묻은 피를 우선 대충 닦았다. 혹시 쓰라리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정작 사영은 어색하고 민망한 기색을 보일 뿐 특별히 아파하는 것 같진 않았다.

별것도 아닌 상처인데 괜히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도중에 그만두는 게 피차 더 민망한 일이 될 것 같아 유준은 연고를 상처 위에 대충 짜내곤 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다.

오늘 새로 난 상처 주변으로 비슷한 결을 가진 오래된 흉터들이 보였다. 그 흉터를 보는 유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사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어요. 되돌아온 이후로는 잘 참고 있었는데 오늘 왜 이랬는지….”

사영 입장에서는 놀란 유준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으나 유준의 귀에는 그게 꼭 자신을 책망하는 말처럼 들렸다. 괜한 말로 잘 참고 있던 사영의 속을 뒤집어 놓은 건 자신이었다.

사영이 자신을 탓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다. 그저 제 발을 저리고 있을 따름이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인 거 알고 있죠.”

“네….”

“스스로 제어하는 게 어려우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봅니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유준이 연고를 바른 사영의 상처 위로 조심스럽게 밴드를 붙여 주었다.

사영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 이런 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영은 정말로 머지않아 연예계에 복귀해야 하고, 스스로 배역을 따내야 하며, 나중에는 한재우가 있는 촬영장에서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때가 되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노출될 텐데 수시로 지금처럼 무너져서는 곤란했다.

“네. 생각해 볼게요.”

다행스럽게도 사영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유준은 이미 잘 붙은 밴드 위를 괜히 손가락으로 몇 번 더 문질러 보다가 곧 손을 떼었다.

사영은 황급히 손을 거둬 다시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유준은 더 이상 그 상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 식사하죠.”

사영은 따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제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가만히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적당히 구워진 스테이크 한 조각을 썬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유준 씨.”

“네.”

유준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제 접시 위의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손등에 난 상처를 누군가가 치료해 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해서 유준을 껄끄럽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사영은 여전히 대답 없는 유준을 향해 그냥 다시 말했다.

“…고마워요.”

피가 나게 내버려 둘 때는 아픈 줄도 몰랐던 손등이 약을 바르고 밴드를 바르자 쓰라려지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사영은 조용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혀끝에 닿은 스테이크의 맛이 어떤지는 여전히 잘 알 수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

“깁스는 언제 풉니까?”

집 앞에 차를 댄 유준이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목발을 짚고 서는 사영을 보며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유준은 다리가 불편한 사영을 다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먹는 속도가 느린 사영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게 먹었지만 이른 시간에 만났기 때문에 날이 저물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준과 사영, 그 누구도 그런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았다. 사영은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유준은 사영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는데 자신이 굳이 먼저 제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잠시 내려다봤다 고개를 든 사영이 대답했다.

“아마 다음 주면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번거로우실 텐데 계속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괜히 통증 가셨다고 섣부르게 풀었다가 다시 악화되는 수가 있어요. 오디션에 영향 주지 않으려면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마지막까지 얌전히 잘 유지하고 있어요.”

“네. 그럴게요.”

사영은 착실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유준의 시선이 짧게 사영의 손등에 붙은 밴드에 닿았다가, 곧 그 뒤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순간 겉으로 보기엔 꽤 근사하게 보이는 집 안의 풍경이 얼마나 삭막하고 황량했는지가 떠올랐다. 유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한재우에게서 탈출해서, 좋은 집까지 마련해 놓고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못마땅했다. 유준이 말했다.

“집에 가구 좀 들여놔요. 그게 어디 사람 사는 집입니까?”

“……?”

“이번엔 복수만 할 거예요? 그것만 하고 끝납니까? 윤사영 씨 지금 사는 거잖아요. 그럼 좀 사람답게 살아요.”

한재우 때문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다면서. 그래서 이번에는 그에게 복수하겠다면서. 그러면서도 여전히 인생에 한재우밖에 없는 사람처럼 구는 윤사영이 싫었다.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한 꺼풀 걷어 내고 보면 결국 그는 안타까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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