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한재우가 정말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지금 집으로 찾아올 게 아니라 병원에 있을 때 찾아왔어야 했다.
아니, 설령 그랬다고 한들 진심으로 사영을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영을 챙기고 배려하는 다정한 남자’의 이미지를 조금 더 고수하려 했을 뿐이리라.
하물며 이제 와 선물이라니. 눈 가리고 아웅도 이렇게 뻔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고민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 굳이 그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가 있을까.
“…전 괜찮으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 주세요.”
사영은 여전히 문을 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은성은 더욱 크게 당황하며 이제는 아예 화면 앞에 이른바 ‘선물’이라고 들고 온 박스를 들이밀었다.
필사적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했다.
한재우가 결코 좋은 의도로 자신을 보낸 게 아니라는 걸 그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눈치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한재우의 매니저로 일할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사영을 끌어내려는 눈앞의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영은 입을 열었다.
“은성 씨.”
- …네.
“한재우가 뭐라고 했어요?”
범상치 않은 사영의 질문에 은성이 머뭇거렸다. 그의 입장에선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윤사영은 한재우의 선물이라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받들었을 테니까.
재우의 이름을 앞세웠는데도 사영에게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다.
“정말로 선물 주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
- 그… 그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그냥 가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몸이 안 좋아서요.”
거절의 말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한재우가 직접 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의 사영이 은성에게조차 얼마나 극진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놀라울 일이었다. 하물며 최은성 본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저, 그러니까… 어….
“한재우가 저한테 전하라고 하는 말은 없었나요?”
놀라고 당황한 채로 사영에게 거듭된 요청을 받은 은성은 결국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행동을 똑바로 해 달라고 하셨어요.
“…….”
- 이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배우님 얼굴에 먹칠하지 마, 말고… 아무 남자한테나 접근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목발을 잡은 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은성은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현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화면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 처신을 잘하시라고… 배우님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들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영이 누군가를 만나거나 외부에서 활동할 때마다 재우는 너의 그 행동들이 내 이미지를 깎아 먹는다고 화를 냈다.
사영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게 싫어서, 그가 화를 내는 게 싫어서 알았다고 했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렇게 조심하고, 한재우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행동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영은 오랫동안 그와 같은 말에 자신을 가두고 억압되어 살았다.
처음에는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다음에는 들끓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영은 죽었는데. 죽고 살아난 덕분에 겨우 한재우에게서 벗어났는데. 그랬는데도 왜 여전히 그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은성 씨.”
그래서 사영은 입을 열었다. 언제나 침묵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을 그만두고 말을 꺼냈다.
이전이라면 알았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그러니까 재우 씨한테 은성 씨가 말 좀 잘해 달라고 부탁했을 테지만 이제 사영에게는 그럴 이유도, 그 말로 재우와의 사이가 좋아질 거란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이 부당한 말인 거, 은성 씨도 알고 있잖아요.”
은성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재우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아닌가요?”
- 저, 저는 그냥… 저는….
“네. 은성 씨는 그 사람 매니저죠.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인 거 알아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와서 그런 말을 전하는 일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아요.”
한재우는 늘 최은성의 모든 변명이었다. 그 이름만 있으면 은성은 자신의 이름과 행동을 전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사영은 말했다.
“돌아가세요.”
- …….
“가서 한재우가 듣고 싶은 말을 전하세요. 어차피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무의미할 테니까.”
말을 마친 사영은 그대로 화면을 꺼 버렸다. 은성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
사영은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다쳤던 다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동안 무의식중에 다리에 힘을 줘 목발에 제대로 지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그렇게 통증에 끙끙거리며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사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팔로 얼굴을 가리곤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곱씹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복수를 결심한 후 사영은 늘 자신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야 흔들림이 없었지만 아무런 지표가 없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이 순간. 사영은 시간을 되돌아온 후 처음으로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복수의 첫걸음을 잘 디뎠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를 얻었다.
최은성의 방문이, 그리고 그를 통해 전달받은 한재우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혼하던 날, 한재우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후련한 얼굴을 했다. 그런 얼굴로 사영에게 적선하듯 잘 살라는 말까지 건넸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 굳이 매니저를 보내면서까지 자신에게 졸렬한 경고를 해 왔다. 사영이 유준에게 접근한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신경에 거슬렸다는 뜻이리라.
한때 모든 생을 걸어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확인받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영에게는 어차피 한재우의 사랑이 없었다.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쥐어 본 적이 없다. 그 사실에 새삼 상처받기엔 너무 많은 날을 돌아왔다.
김유준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고 그는 무슨 얼굴을 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존심이 상했을까.
버러지만큼의 위협으로도 보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김유준 곁에 나타나니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나. 그래서 이렇게 헐레벌떡 사람의 입에 칼을 물려 보냈나.
여전히 자신이 사영에게 지극히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그에게 그런 자신감을 심어 준 게 다름 아닌 윤사영 그 자신이라는 점이 기가 막혔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사영은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더한 일들이 있을 텐데. 유준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될 텐데. 벌써 이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견디려고.
‘서단우’ 역을 사영이 맡게 됐다는 소식을 재우가 듣는 순간을 상상하며 사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짜릿한 순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역을 따내야 했다. 필사적으로 오디션을 준비해야 했다.
이미 캐스팅에 더없이 불리한 상황인 그는 모든 걸 뛰어넘을 만한 능력을 보여 줘야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사영은 침대맡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오디션용 대본을 손에 쥐었다. 비참하게 죽어 간 한 생을 위해, 사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역을 꼭 손에 넣고야 말 것이다.
***
“뭐라고 그랬다고?”
차에 올라타다 말고, 재우가 은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은성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게….’ 하고 말을 머뭇거렸다.
사영을 만나러 갔던 은성이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땐 광고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휴식 없이 끝까지 이어진 촬영 때문에 바로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재우는 촬영이 끝난 지금에서야 은성에게 사영이 어땠는지를 듣는 중이었다.
“제대로 말해.”
재우는 딱딱한 목소리로 은성을 재촉하곤 우선 차에 탔다. 은성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문을 닫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곤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틀어 재우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사영 씨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문도 안 열어 줬다고? 걔가?”
“네. 그냥 현관 밖에서 얘기하다가 돌아왔어요.”
“…내가 보냈다고 얘기했는데도?”
은성은 속으로 네가 시킨 게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으나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 하루를 피곤하게 만드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은성은 솔직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네. 그렇게 말했는데도… 안 들여보내 주더라고요.”
“…….”
“그래도 형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니까… 그냥 그 앞에서 말하고 왔습니다.”
재우가 사영에게 전하라고 시켰던 수많은 말 중에는 은성이 굳이 전할 필요가 없는 말들도 있었다.
은성이 조금만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냥 삼켰어도 되었을 말들. 사영에게 상처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그런 말들. 구태여 사영에게 전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었을.
하지만 은성은 한 번도 그 말들을 자신이 감당하지 않았다. 은성은 한재우의 사람이었고, 그의 지시를 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들통 나 재우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다. 자칫 잘못하면 돈을 많이 주는 자리를 잃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었을 때 사영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은성은 한 번도 사영을 위해 제 의지로 뭔가를 해 본 일이 없다.
문조차 열어 주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기어코 그 모진 말들을 전부 내뱉고 온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네. 은성 씨는 그 사람 매니저죠.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인 거 알아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와서 그런 말을 전하는 일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영의 말이 머릿속을 윙윙 맴돌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사영이 어떤 표정으로 제 말을 듣고 있었을지 같은 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말을 한 건 한재우지 자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