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은성이 익숙한 변명을 습관적으로 되뇌는 사이 재우는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다가 곧 입을 열었다.
“일단 출발해. 집으로 가.”
“네.”
재우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은성은 불안함을 느끼며 똑바로 앉아선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고, 익숙한 몸짓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이대로 대화가 끝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의 배우는 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걔가 뭐래냐.”
예상대로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우가 다시 물었다. 입이 바싹 말라서 은성은 혀로 입술을 몇 번이나 훑었다.
‘그 말이 부당한 말인 거, 은성 씨도 알고 있잖아요.’
사영의 목소리가 사라지지도 않고 자꾸만 은성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은성은 부당한 건 오히려 사영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그걸 거부할 힘과 능력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재우가 하는 일이 부당한지 아닌지, 은성에겐 그런 걸 판단할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 왜, 마치 내가 한재우와 똑같은 사람인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죄책감과 반발심 사이에서, 은성이 입을 열었다.
“형님이… 자기한테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없지 않냐면서….”
은성은 사영의 말을 적당히 감추지 않고 들은 그대로 말했다. ‘뭐?’하고 날카롭게 되묻는 재우의 목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통쾌해서인지는 구분하기 힘들었다.
“제가 그 말을 전달하는 것도 부당한 거라고….”
“…….”
“어차피 자기 대답은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 가서 형님이 원하시는 대답을 해 주라고… 그렇게 말하고 더 대화하는 걸 거부했습니다.”
대충 말을 고르거나 재우의 기분이 덜 상하도록 단어를 조정하는 일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통쾌함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은성은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재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말 그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다고? 걔가 그래?”
“네. 그리고 부당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재우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혼잣말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은성은 일부러 대답했다.
그러자 룸미러를 통해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재우가 보였다. 은성은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미치기라도 했나?”
아까부터 말을 거슬리게 하는 은성에게 무언의 경고를 한 재우는 그대로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단순히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윤사영이, 아무리 직접 재우에게 말을 한 건 아니라지만 한재우에게 자격을 운운했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렇다고 은성이 없는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 낼 리는 없었다.
“이상하긴 했지….”
재우의 눈동자가 깊은 생각으로 젖어 들었다.
이건 해도 해도 도가 지나쳤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지금의 사영처럼 지나치게 극적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윤사영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변했다. 바로 전날까지도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비굴하게 매달리던 사람이 다음 날 갑자기 태연한 얼굴로 이혼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재우에게 자격이 없단 말을 했다니.
사영의 의도가 정말로 재우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줘 그 마음을 흔들어버릴 생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런 언행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기에 가볍게 넘겨 버렸던 의문들이 되돌아와 재우의 턱 끝을 찔러 댔다. 도대체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해 당장 사영을 찾아가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한재우는 이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영과 이혼하면서도 그가 정말로 자신을 완전히 떠나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는 걸 말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몰려 순간적으로 이혼을 요구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영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헤어진 것을 후회하며 다시 매달려 올 거라고, 재우는 자기도 모르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재우는 초조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어딘가 맞지 않는 조각들이 제멋대로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뭔가가 어긋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불편한 심경으로 재우가 입을 열었다.
“윤사영이 병원에 언제 또 가는지 알아 봐.”
한재우는 변수를 싫어했다. 모든 게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만족하는 성미였다. 삶의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이때, 사영이 또다시 어정쩡한 걸림돌이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우는 사영이 제 얼굴을 보고도 은성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말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직접 그를 만나면 지금 사영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네.”
은성의 대답을 들으며 재우는 눈을 감았다. 사영은 제 얼굴을 직접 보면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할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
유준은 초조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초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선 영화 촬영은 무사히 잘 마쳤다. 극의 흥행이야 열어 보기 전까진 모른다지만 이 정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열연했는데 망할 리가 없다.
설령 망한다고 해도 지금 유준의 위치에서는 그 정도는 티끌만큼의 오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차기작은 더더욱 망하기 힘든 기대작이다. 그럴수록 더 큰 압박을 받는 이들도 있겠지만 유준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유준은 압박을 즐기는 사람이고, 그걸 이겨 내고 더 큰 결과를 얻어 내는 것으로 늘 자신을 증명해 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유준은 지금 초조해할 이유가 정말로,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초조함을 느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래서 유준은 태연한 척 운동했다. 평소보다 더 과격하게 땀을 빼고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그런데도 초조한 마음을 덜어 내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책을 손에 쥐었다. 평소 유준은 책에도 쉽게 집중하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다음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TV를 틀었다. 습관적으로 늘 이용하는 OTT 서비스 앱을 열자 메인 화면에 지난번 보다 말았던 윤사영의 드라마 섬네일이 보였다.
유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던, 인정하기 싫었던, 저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던 이 집요한 초조함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말이다.
“미치겠네, 진짜….”
유준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사영을 인식하자마자 막혀 있던 벽이 전부 확장되듯 펼쳐져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유준의 시선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랬다. 유준은 지금 사영이 궁금했다.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 초조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제야 유준은 자신이 오늘 사영과 헤어지고 나서 단 한 순간도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춘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위태로운 표정으로 제 손등을 긁으며 자해하던 사영의 모습이 머릿속에 각인처럼 남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안정해 보이는 상태의 사람을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제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서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 테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윤사영 생각에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거라고, 휴대폰을 노려보며 유준은 차근차근 자신을 납득시키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인 사람이 혼자 집에 있다. 죽음을 한 번 경험하고 시간을 되돌아와 복수를 꿈꾸는 사람의 정신머리가 어디 온전하겠는가.
그 말이 전부 사실이어도, 거짓이어도 하여간에 사영의 상태는 지극히 비정상이다.
그렇다는 건 혼자인 사영이 지금 어떤 상황일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비정상인이 벌일 수 있는 극단적인 선택은 무수히도 많을 거란 소리였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유준은 누군가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을 수도 있음을 짐작하고도 모르는 척할 만큼 인간쓰레기는 아니었다.
결국 유준이 휴대폰을 쥐고 그의 번호를 찾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행해야 하는 지극히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유준은 그렇게 확신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김유준의 걱정이 무색하게, 사영은 오랫동안 집중하여 이어 간 오디션 연습을 마치고 식탁에 앉아 샐러드를 먹는 중이었다. 충분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굶는 것보다는 나았다.
식탁 위에 놓인 태블릿에서는 영화가 재생되는 중이었다. 영화 <하지>의 감독이 찍은 가장 최근 작품이었다.
<하지>와는 완전히 다른 현대 배경의 스릴러 작품이고 이미 본 작품이기도 했지만 사영은 그가 어떤 식으로 연기를 디렉팅하는지 파악하고 싶어 감독의 작품을 전부 다시 보는 중이었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한 건 그 순간이었다. 조각난 토마토 하나를 입에 밀어 넣은 사영이 깜짝 놀라 재생을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유준 씨
정직하게 액정에 뜬 이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오늘 재우의 매니저인 은성이 자신을 찾아왔던 게 떠올랐다.
어쩌면 한재우가 자신에게만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사영은 입에 남은 음식을 대충 삼킨 후 물을 한 모금 마셔 정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윤사영입니다.”
- …김유준입니다.
유준의 대답에는 짧은 공백이 있었다. 그것이 사영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태연한 바람에 그가 조금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걸 사영이 알 방법은 당연히 없었다.
다만 유준의 음성이 조금 불안정하게 들렸기에 사영은 오히려 유준을 걱정하며 물었다.
“네, 유준 씨. 무슨 일 있으세요?”
- 그, 그게….
유준은 계속 당황한 채였다. 사영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전화한 건데 오히려 사영이 유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물으니 대답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유준은 그야말로 사영을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별다른 핑곗거리도 준비하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고, 그 때문에 유준은 사영의 질문에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사영은 유준의 떨리는 음성에 제 짐작이 맞을 거라 확신하며 물었다.
“설마 유준 씨한테도 한재우가 연락했어요?”
- 그 새끼가 연락했습니까?
결과적으로 유준은 원하는 정보를, ‘윤사영에게 생겼을지도 모를 어떤 일’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