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34화 (34/193)

#034

“그… 어….”

이번에는 사영이 당황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유준에게도 알려야 할지 고민하긴 했다. 그저 개인적인 일이라고 치부한다면 굳이 유준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재우의 반응이 앞으로의 계획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유준에게도 알리는 게 맞았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유준은 사영과 한배를 탔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을 다시 만나게 되면 오늘의 일을 적당히 요약해서 말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듯 불시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쑥 토해 놓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 뭡니까, 윤사영 씨.

“…….”

- 걔가 직접 찾아왔어요? 그랬습니까?

유준의 목소리는 질문이 추가될 때마다 높아졌다. 그는 마치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 탓에 사영은 덩달아 마음이 초조해져 적당히 상황을 정리할 정신이 없었다. 사영이 대답했다.

“…직접 찾아온 건 아니고 매니저를 보냈어요.”

- 집으로?

“네….”

- 집 안까지 들어왔어요?

사영에게 은성이 집 안으로 들어왔는지, 들어오지 않았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준이 그것을 먼저 묻는 게 조금 신기했다.

“아니요. 그냥… 굳이 마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어요.”

- …잘했어요. 잘했어요, 윤사영 씨.

너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안도한 것처럼 들렸다. 사영은 자신이 유준을 잘 몰라서 전화 통화로 그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유준이 계속 물었다.

- 그래서… 와서는 뭐랍니까?

“으음….”

- 나한테 뭐 감추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의 말이 맞았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는 이상 자신은 그에게 모든 정보를 제대로 제공할 필요가 있긴 했다. 그렇기에 오늘 일도 일단은 그에게 대강이라도 알려 줘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한재우가 몸에 좋다는 선물을 보냈다는 핑계를 댔어요.”

- 지랄하네.

즉각적으로 흘러나온 욕설에 사영이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복수는 사영의 일이다. 사영이 매달려 유준이 복수를 돕는 거지 한재우를 향한 유준의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일은 아니었다. 유준의 입장에서야 한재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어도 딱히 그에게 악감정을 가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준은 한재우를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하는 것처럼 반응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사영은 의문을 가지며 계속 말했다.

“당연히 그게 진짜 목적이었을 리는 없어서 물어봤어요. 한재우가… 전하라는 말이 따로 있었냐고.”

- 그랬더니?

“…….”

- 말해요, 윤사영 씨.

“기사를 봤나 봐요.”

거기까지 말을 꺼내자 은성이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기한 건, 사영은 분명 그 말을 은성을 통해 들었는데 머릿속에선 한재우의 음성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써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사영의 기억 속에는 이미 한재우가 그와 비슷한 내용을 말한 음성이 수도 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사영은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이미 한 번 죽기까지 했던 마당에 내려놓지 못할 마음이 뭐가 있겠냐마는 오랫동안 상처 입어 왔던 망가진 마음은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사영은 제 허벅지를 꼬집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애쓰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유준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처신을 잘하라고….”

- 처신?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무 남자한테나 껄떡대서 자기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고….”

원래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전달하려던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정돈된 말로, 대략적인 뜻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걸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유준이 너무 갑작스럽고 조급하게 물어보는 바람에 말을 다듬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말을 다 뱉고 나서야 너무 쓸데없이 떠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사영은 조금 긴장한 채로 유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진짜 미친 새끼네, 그거.

사영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절로 입이 벌어졌다. 사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는 사이 유준이 다시 말했다.

- 그걸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까?

사영은 갑자기 군기가 든 사람처럼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요.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돌아가라고 했어요.”

- 잘했네.

왜 그에게 꼭 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어진 그의 칭찬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몸의 긴장이 풀렸다.

- 다음에는 욕을 해 줘요.

“아….”

- 설마 욕도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죠?

“…할 줄 알아요.”

- 그럼 해요. ‘미친 새끼 헛소리 나불거리지 말고 꺼져.’ 이렇게.

‘나라면 더 심한 욕을 하겠지만.’ 하고 덧붙이는 말은 꽤나 진심 같았다.

사영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방금 유준이 한 말을 읊조려 보았다. 욕설 그 자체보다도 재우에게 그런 말을 내뱉는 제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놀랍게도.

하지만 사영보다 더 그런 말에 놀랄 사람은 아마 한재우일 것이다. 불현듯 사영은 제게 거하게 욕을 얻어먹은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유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아무튼. 선전포고는 한 셈이네요.

“…….”

-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제대로 일을 진행해야 해요. 윤사영 씨 계획의 핵심은 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겁니다. 맞죠?

“네. 맞아요.”

- 연기 연습은 하고 있어요?

그렇게 묻는 유준의 목소리는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날카로웠다. 사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 이번 영화는 나한테 정말 중요한 영화에요.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서단우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어 배역을 따지 못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적어도 연기로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게요.”

사영은 몰랐지만 그때 유준은 ‘똑바로 해요.’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 사영이 한재우의 매니저를 통해 들었다는 말들이 떠올라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 잘해 봐요.

그래서 사영은 똑바로 하라는 말 대신 잘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 사영에게는 딱히 따뜻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유준으로서는 나름대로 다정한 말을 고른 것이다.

통화를 마친 그날 밤 사영은 잠들기 전까지 오디션용 대본을 보았고, 유준은 어째서 똑바로 하라는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는지를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

유준은 이른 아침부터 차를 타고 사영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사영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들은 바로는 경과가 좋으면 깁스를 풀 수도 있다고 했다.

유준은 요즘 거의 매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영에게 전화를 걸어 그에게서 일종의 일상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명목은 그럴듯했다. 사영이 얼마나 준비가 됐는지, 사영의 상황이 얼마만큼 나아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자신도 그에 맞춰 준비할 거 아니냐는 매우 타당성 있는 이유였다.

솔직히 유준은 그놈의 복수만 아니면 이렇게까지 사영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 하기로 한 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오늘도 택시를 타고 다녀오면 된다는 사영에게 기어코 자신이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아무튼 유준은 이런 상황을 딱히 원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데리러 가기 위해 무슨 핑계를 댔는지는 솔직히 기억도 안 났다. 딱히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느새 사영의 집 앞에 도착한 유준은 룸미러로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출발할 때도, 중간중간 긴 신호에 걸릴 때도 몇 번이나 했던 행위였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머리를 몇 번이나 쓸어 넘겼다가,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렸다가를 반복하던 유준은 한참 만에 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요.”

요란을 떨어 대며 여기까지 온 것치고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유준은 자신이 비록 여기까지 사영을 직접 데리러 오긴 했지만 딱히 그를 과보호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마음을 쓰는 상대에게 이렇게 재수 없게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 집에서 나오는 사영이 보였다. 아담한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사영은 여전히 목발에 의지한 채였다.

오늘 깁스를 풀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직 통증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걸을 때 목발을 짚어야 할 정도라면 결코 상태가 나아졌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의사는 전문가이고, 검사를 통해 정확한 판단을 할 테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다.

유준은 자신이 의사를 직접 만나 사영이 아직 목발을 짚어야 한다는 걸 꼭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사영은 제 몸을 그다지 아끼지 않아서 의사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따를 공산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도 더 빠진 것 같다. 그때도 이미 마른 상태였는데 더 빠질 살이 있었나 싶다.

사람이 저 정도로 마르는 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닐까. 지금 다리가 문제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검사를 싹 받아 봐야 하는 건 아닐까.

현대인의 많은 질병은 스트레스에서 기인한다. 어쩌면 그동안 사영이 겪은 특수한 상황들이 그의 몸 어딘가를 망가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유준 씨.”

그렇게 유준의 머릿속이 사영을 입원시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건강 검진을 받게 만드는 계획으로 가득 찼을 때쯤, 어느새 뒷좌석에 목발을 넣은 사영이 조수석에 올라타며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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