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유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목발을 짚지 않으면 많이 아픕니까?”
“……?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섣불리 무리했다가 상태가 안 좋아질까 봐 조심하고 있어요.”
“아….”
“오디션에 차질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제야 유준은 누군가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관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소관이었다. 다리 완쾌에 신경을 쓰지 못해 오디션에 불리해지는 것도, 그가 제대로 자신의 건강을 살피지 못해 아픈 구석이 있는 것도 모른 채로 말라 가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유준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유준이 핸들을 힘주어 쥐었다.
갑자기 수치심과 비슷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며 얼굴이 뜨끈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제 생각을 그가 읽었을까 봐 심장이 뛰었다.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혹시나 사영이 제멋대로 페로몬을 내뿜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사영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제 향을 제어하고 있을뿐더러 차 밖에 있으니 그의 페로몬이 제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없었다.
“…유준 씨?”
그사이 심상치 않은 유준의 상태를 눈치챈 사영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출발하죠.”
유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대답하며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간간이 사영이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봤지만 모른 척했다.
오직 그것만이 이 민망함에서 살아남을 길이었다.
***
“병원 좀 가자.”
재우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은성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늘 그랬듯 군말 없이 지시한 시간에 찾아온 은성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은성이 놀라 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재우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제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목이랑 어깨, 등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 봐야겠어.”
“아, 그럼 가까운 곳으로 갈까요?”
대수롭지 않게 물었던 은성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건 재우의 눈빛 때문이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동자는 분명 은성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었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순식간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재우가 이런 식으로 무언의 요구를 할 때마다 은성은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한재우가 입을 열었다.
“좀 잘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괜찮은 곳 좀 찾아봐.”
그 순간 은성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를 깨달았다. 사영의 검사 예약일이 언제인지 알아내 재우에게 알려 준 건 최은성 자신이었다.
터질 것처럼 뛰었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한재우의 의도를 알아채면 이후의 일이 얼마나 피곤해지든 간에 긴장은 풀리기 마련이었다.
은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연예인들 자주 간다는 곳이 있어요. 제가 모실게요.”
“그래? 잘됐네.”
“바로 가십니까?”
“응. 차 입구에 대 놔.”
“네.”
은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재우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어놓으며 몸을 돌렸다.
나중에 수많은 병원 중 왜 하필 그곳으로 갔냐고.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욕을 먹는 건 자신이겠지만 이게 유일한 해답이니 어쩔 수 없었다.
***
“안 아픕니까?”
유준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물었다. 누가 보면 정말 화가 나서 당장 윽박지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시선을 받는 중인 사영은 인식을 못 하는 건지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오로지 제 다리 상태만을 점검하며 대답했다.
“네. 전혀 안 아파요. 진짜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영이 다쳤던 다리로 바닥을 꾹꾹 누르자 식겁한 표정의 유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어쨌든 한동안 힘을 안 주고 안 걸어 다녔으니까 무리하면 안 됩니다. 못 들었어요?”
“아, 그냥 살짝 디딘 건데….”
“살짝이고 뭐고 조심 좀 해요.”
“네.”
유난스러운 유준의 반응에도 사영은 별다른 의심 없이 얌전히 대답했다. 혹시 자신의 부주의로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거나 부상이 재발하기라도 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기껏 도와주기로 한 유준의 입장에서는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준은 그걸로 만족이 되지 않는지 나란히 병원을 빠져나오면서도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게 아무리 목적이 있었어도 그렇지 달리는 바이크에 뛰어드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유준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사영에게는 그 말이 어째서 자신의 인생에 멋대로 난입했냐는 질책처럼 들렸다. 사영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걸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유준 씨한테는 못할 짓인 걸 알았지만 너무 절박했어요. 유준 씨를 통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제가 바라는 복수를 할 방법이 없어서….”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제야 사영이 제 말을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는 걸 깨달은 유준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의 말을 막았다.
유준은 사영이 제 몸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 일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복수고 뭐고, 크게 다칠 수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실행한 게 못마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답을 들어 보니 사영은 자신이 그 상황에 뛰어들어 유준을 제 일에 끌어들인 것 자체를 사과하고 있었다.
“윤사영 씨, 내 말은….”
유준은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그러나 적잖이 당황한 탓인지 말이 유려하게 이어지질 않았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사영이 이해한 바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이상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유준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그 순간, 말 그대로 ‘불청객’인 존재가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영아.”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사영을 쳐다보던 유준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제법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앞에 서 있는 건 윤사영의 전남편이자 복수의 대상인, 한재우였다.
***
한재우로 말할 것 같으면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을 꾸미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인물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안에서는 윤사영을 억압하고, 학대하고, 제 입맛대로 그를 주무르며 상처를 입히면서도 밖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편의 모습을 제대로 실현해 온 그였다.
첫눈에 반해 사영에게 먼저 호감을 표현한 사람은 대외적으로 한재우였으므로 그는 사영이 없는 자리에서도 철저하게 그 이미지를 유지했다.
사영에 대해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별을 담은 듯 반짝였고, 사영을 표현하는 모든 언어는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는 타인의 앞에서 절대로 긴장을 푸는 법이 없는 철저한 남자였다.
술자리에서 만취해 저도 모르게 사영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하고 아프게 하는지를 실수인 척 흘리고, 그렇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절대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할 때도 사실은 당연히 취하지 않았다.
한재우는 능력 있는 배우였고, 그가 가진 천부적인 연기 능력을 비단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완벽하게 뽐내며 살아왔다.
그가 자신을 꾸미려 긴장을 하지 않고 그나마 제 본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있는 건 기껏해야 매니저인 은성과 단둘이 있을 때가 전부였다.
심지어는 은성과 단둘이 있을 때조차 재우는 제 모습을 전부 다 드러낸 게 아니었다.
다시 말해, 한재우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의도하지 않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경박한 욕설 따위를 입 밖으로 내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한재우가, 아무리 작은 소리였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욕을 뱉었다. 저만치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는 김유준과 윤사영의 모습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게 어떤 기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전남편이라고 해 봐야 사영에게는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었고, 유준에게 호감이 있긴 했지만 짝사랑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왜 그렇게 화가 치솟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유준을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사영에 대한 악감정이 더 깊어진 걸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재우는 두 사람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기 전에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렸다. 속으로 천불이 난다고 한들 둘의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재우는 ‘사영아.’ 하고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제 불쾌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저의 다정함이 오히려 사영의 마음을 더 크게 흔들고, 더 절망스럽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영은 시선을 들어 재우를 쳐다보기 전부터 이미 몸을 굳혔다. 목소리만으로도 누군지 곧바로 알아채고 반응한 것이다.
유준을 옆에 두고도 여전히 자신을 신경 쓰는 듯한 그 모습이 불쾌감에 찌든 재우의 기분을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사영은 정말로 제 마음을 어떻게든 얻어 내려는 마지막 발악으로 이혼을 선택한 게 분명해 보였다. 사영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머릿속을 채웠던 가정들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김유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재우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려는 심산이라면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로 불리고 있는 김유준만큼 적절한 상대가 또 누가 있겠느냔 말이다.
재우는 훅, 하고 짧게 숨을 내쉬고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누가 보아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당황한 표정이지만 사영을 만나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VIP 병동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르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이혼 후 처음으로 마주한 사영은 전보다 살이 조금 더 빠진 것 같았고, 그것 빼고는 딱히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훨씬 더 힘들어한 티가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재우는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영의 얼굴을 더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 재우의 앞에는 윤사영 따위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우는 사영의 옆에 서 있는 게 매우 거슬리는, 그와 함께 있기엔 지나치게 잘난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