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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36화 (36/193)

#036

유준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 오는 한재우의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우는 무척 예의 바르고 점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르고 봤다면 취향과 상관없이 참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여겼을 외형이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대꾸도 없이 무시하고 싶었다. 꼭 사영 때문이 아니라 유준은 그냥 한재우라는 인간 자체가 못마땅했다.

사영과 얽히기 전부터, 결혼한 주제에 제게 은근슬쩍 호감을 비추던 음흉한 태도가 별로였다.

그래도 이전에는 그냥 같은 배우로서의 호감 표시를 자신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냥 사람의 성향이 맞지 않을 것 같아 호의의 표현조차 거슬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유준은 제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를 마주하는 게 더 불편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재우 씨. 여기서 다 뵙네요.”

그러나 유준은 성질대로 그를 무시해 버리거나 비꼬아 대꾸하는 대신 제법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돌려주었다. 은근슬쩍 이렇게 마주쳐서 반갑다는 눈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준은 사영의 계획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복수의 순간 한재우에게 더 큰 고통을 주려면 그를 최대한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기대감과 희망으로 부풀어 있어야만 그 모든 것이 깨져 버렸을 때 더 큰 타격을 받는 법이다.

그러려면 유준이 그에게 여지를 주어야 했다. 재우의 호감이 지금보다 더 애틋한 무엇이 될 수 있도록 깊어지게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유준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유준의 의도가 먹혔는지 재우는 유준의 대답에 은은히 기쁜 낯을 했다. 그는 유준에게 뭐라도 더 말을 덧붙이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곧 곁에 선 사영을 슬쩍 한번 쳐다보더니 입맛을 다시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평소 팬으로서 좋아하고 있던 배우를 만나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유준은 재우의 시선이 사영에게로 향하는 걸 보았다. 그냥 쳐다볼 뿐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말끝을 흐리는 한재우의 의도는 명백했다. 사영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것이다.

유준은 저 역시 고개를 살짝 돌려 사영을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 선 바람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사영을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한재우의 가증스러움에 감탄하며 유준은 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차에서 기다릴게요. 이야기 나누고 와요.”

차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재우의 표정이 아주 짧게 일그러졌다 평정을 찾았다. 잠시 얼어 있던 것처럼 보이던 사영은 그제야 어깨를 살짝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유준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유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제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걸 느꼈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한재우 앞에서 사영과 눈동자를 마주쳤다는 사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선사했다.

잠시 함께했다고 벌써 동료애 같은 거라도 느끼는 걸까.

유준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재우를 향해 살짝 묵례하고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한재우가 또 개소리를 짖어 대진 않을지 미친 듯이 걱정되고 궁금했다.

그러나 유준은 점잖은 사람이므로,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차로 향했다. 사영도 다 큰 어른인데 굳이 유준이 신경 쓰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차에 앉아서 다리를 좀 떨었고, 혼잣말로 욕을 조금 하긴 했지만 아무튼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

사영은 구석으로 눈짓하는 재우의 뒤를 가만히 따라 걸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크게 당황한 터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은성을 보내 굳이 경고를 전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굳이 직접 만나려 행차까지 하실 줄은 정말로 몰랐다.

김유준이 그만큼,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다. 두 번 다시 만나기도 싫다던 자신을 직접 찾아올 정도로. 하기야, 그랬으니 죽기 전 생에서 제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었을 테다.

감정의 동요는 별로 없었는데 자꾸만 손이 떨렸다. 사영은 어쩌면 자신이 단순히 시간을 되돌아온 게 아니라 제 영혼이 과거의 몸에 빙의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제어하기가 힘든 느낌이었다. 마치 한재우에게 지나치게 길들여진 타인의 몸을 제어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너 뭐 하냐?”

사영이 이상한 몸의 감각을 뜻대로 되돌리기 위해 애쓰는 사이 병원의 구석진 복도에 멈추어 선 재우가 에두르는 말도 없이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사영아, 하고 걱정스럽게 부르던 목소리는 남의 것이었던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사영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재우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다행스러운 건 심장이 뛰고 두 손이 떨리는 것까진 제 의지로 어쩌지 못해도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죽기 전의 사영은 재우가 명령하기 전까진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죽음을 한 번 겪었다고 해서 이렇게 단시간에 많은 것을 극복하다니.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죽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 같았다.

전부 다 쓸데없는 상념이었지만 재우 앞에서 딴생각을 한다는 건 그게 무엇이든 꽤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윤사영.”

그 침묵의 이질감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한재우가 좀 더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사영은 조금 전 유준의 앞에서 제게 ‘사영아.’라고 애틋한 첫사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불렀던 음성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재우의 얼굴이 조금 희게 질린 것 같았다.

사영은 착각일지도 모를 정보를 즐기며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뭐?”

“은성 씨 보내서 할 말 했으면 됐지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궁금해서 여기까지 직접 왔어요?”

“…….”

“내가 유준 씨한테 일부러 접근한 것 같아서 신경 쓰여요?”

말을 하는 목소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떨렸다.

조금 더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리는 걸 제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목소리 역시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었다.

사영은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한재우에게 이렇게 말하는 자신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던 한재우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

“꼴에 오메가라고, 김유준 꼬셔서 팔자라도 고쳐보려고?”

사영은 재우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스웠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는데 그와 동시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였다.

마치 온몸의 모든 세포가 그 말을 뱉어 내는 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내도록 억압당하고 있었음을 죽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한들 아니라고 외면했을 것이다.

사랑이었으면 해서. 사랑이고 싶어서. 결국엔 사랑으로 돌아왔으면 해서. 그래서 사영은 한재우가 자신에게 하는 짓들을 당연한 일로, 마땅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 기억들이, 본능처럼 몸에 지니고 있던 순종이 사영의 말을 막고 사영의 생각을 다그쳤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한재우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가 그가 영영 너를 미워하고 돌아봐 주지 않으면 어쩌냐고 매달렸다.

그래서 사영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한재우 씨 당신 얘기예요?”

“너 지금 뭐라고… 뭐…?”

“잘나가는 배우한테 접근해서 팔자 편 거… 그거 되게 익숙한 얘기, 으윽…!”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가던 사영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우가 사영의 어깨를 쥐고 그대로 벽으로 밀친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영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감각에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가 사영을 향해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막으려 했다. 재우는 그런 사영의 손을 붙들어 결박했다.

결혼생활 중에도 늘 사영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킬 때만 사용하던 페로몬을, 그는 지금도 아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쓰고 있었다.

사영의 턱이 애처롭게 떨렸다. 숨통을 틀어쥐듯 거칠게 밀려오는 한재우의 페로몬에 대응하기 위해 급하게 제 것을 맞서 피워 냈지만 오랜 기간 그에게 눌려 있던 사영의 몸은 본능에 새겨진 두려움을 가진 사람처럼 제대로 그를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사영아. 네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고 뭐가 좀 달라진 것 같아?”

“흐… 으윽….”

“이미 한참 전에 너를 버린 건 나야. 여태 구차하게 매달려 있다가 이제 겨우 떨어진 주제에 이렇게 기어오르면 안 되지.”

“저, 저리 치, 워, 윽….”

사영은 한 음절 음절 씹어 뱉으며 계속 저항했다. 한재우가 좋아서, 어쩌다 그가 페로몬을 흘려 주면 아무리 비참한 상황이라도 그에게 자신을 내어 주던 날들이 끔찍한 기억이 되어 사영의 숨통을 조였다.

희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사영의 꼴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귓가에 가까이 다가온 재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그래, 사영아.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흐, 흐으…!”

“이제는 김유준이 아니면 싫어?”

재우는 그 말을 끝으로 폭풍처럼 쏟아 내던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사영을 결박하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온몸에 힘이 풀린 사영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였다.

재우는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사영의 페로몬이 묻은 옷을 털어 내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윤사영. 그나마 나나 되니까 너 같은 애랑 그렇게 오래 살아 준 거야.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괜한 사람한테 헛물켜지 마.”

“…….”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거면 꿈 깨고.”

재우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은 사영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페로몬에 반응했을지 궁금했다. 물론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랬을 게 확실하니까.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윤사영 씨.”

재우는 조롱하듯 내뱉은 그 말을 끝으로 사영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 사영의 향에 아랫배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사영과 이혼한 후 몸을 사려야 했기에 아무와도 관계를 갖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윤사영의 향 따위에 몸이 동하다니 아무래도 너무 오래 참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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